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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 위에서 그를 기다렸던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불편했으나 눈이 부셨고 힘들게도 사랑하고 있었다. 여자는 길의 끝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듯 하다가 순간 미련 없이 고개를 돌려 반대편의 길로 걷기 시작했다.


태양이 이글거리는 오전의 일이었다.


짐을 가득 실은 마차는 이제 좁은 흙길로 들어섰다. 다그닥대는 말굽소리가 계곡을 울렸다. 곧 비가 올 것 마냥 하늘은 우릉거렸고 구름은 머리 바로 위까지 빼곡히 찼다. 가파른 산세와 빽빽한 나무 숲으로 좁디좁은 길을 헤쳐나가며 마부는 고삐를 좀 더 바투 쥐었다.


뿔나팔 소리가 울린 것은 바로 그 때였다.


멀리서부터 사람들의 고함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습기찬 공기가 진동했다. 수많은 발소리가 말발굽소리를 집어삼키고 땅의 울림에 놀란 말이 날뛰었다. 마차 안 여시종은 긴장으로 땀이 찬 손을 꼭 쥔채 제 여주인을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굳게 입을 닫고 여자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곧은 시선으로 정면을 응시할 뿐이었다.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여자는 평소에도 말이 많은 편이 아니었다. 언제나 고요한 것을 좋아했고 가끔가다 나누는 담소를 피하지 않았을 뿐으로 호들갑을 떠는 것은 어쩌면 그녀에게 가장 어울리지 않는 일중 하나일 것이다. 여시종은 그녀를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고 커튼 틈 사이로 바깥의 동향을 살폈다. 모든 것은 아비규환처럼 보였으나, 여시종은 제 주인이 당황하지 않는 것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한두 방울씩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수완이 좋은 드렉슬러가 직접 큰 거래를 성사시키기 위해 자리를 비우는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다만, 이번은 경우가 달랐다. 평소처럼만 무사히 짐을 싣고 돌아왔더라면.


그녀의 실종은 그리 오래지 않아 본가의 귀에 들어갔다. 비록 경제적으로 몰락하여 집안의 여식까지 상인에게 넘겼다고는 하나 귀족은 귀족.


상인은 제 불뚝한 배와 팔뚝에 밧줄을 감아 자신을 포박하는 병사들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았다. 제 재산은 모두 몰수될 것이고 목숨이라도 건질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감사해야했다. 하다못해 둘 사이의 자식이라도 있었더라면. 말도 되지 않는 것에 헛웃음이 났다. 팔려온 주제에 도도하기 짝이 없는 콧대로 애정은 고사하고 손찌검까지 하지 않았던가.


움직이려하지 않는 발을 억지로 질질 끌며 문밖을 나서자 3일째 내리 퍼붓는 비를 가리는 것 없이 고스란히 맞아야했다. 재수 없는 날이로군. 물에 젖어드는 가죽신의 코를 바라보다가 상인은 눈을 들었다.


그 비에 젖어 형형히 빛나는 푸른 빛을, 그는 아마도 평생 잊지 못할 것이었다.




귀족이란 것은 점점 쇠락하여 이름 뿐인 것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간의 전쟁으로 창고는 바닥이 났고 세금징수는 여의치 않았으며 짜내도 짜낼 것이 없는 상황 속에서 자리에 앉아 서류만 뒤적이던 이들은 일찌감치 폭넓은 바지를 정강이까지 걷어입고 나무를 베어 땅을 만들기 시작하던, 둘이 만난 것은 그런 시기였다.


유명한 기사집안이었던 알베르토는 전쟁의 패배로 순식간에 그 명성을 잃었다. 뿔뿔히 흩어지는 가족들 사이에서 고작 12살이었던 로라스 역시 예외일 수는 없었다. 잠시동안만. 제 아들은. 이번. 곡식. 영토. 왕. 명예. 제 안을 흔들어놓는 대화를 더는 견딜 수 없었다. 예의를 차려 자리를 빠져나와 성의 뒷문으로 향했다. 바람이라도 좀 쐬면 괜찮아지겠거니. 푸릇한 잔디밭은 숲의 경계까지 30야드정도 펼쳐져있을 뿐이었지만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성 안보다는 훨씬 나았다. 무엇이라도 지금 시간을 잊을 수 있는 것이 필요했다. 로라스는 잔디 위에 팔베개를 하고 누워 하늘을 보았다. 풀물이 베면 지지 않을 텐데. 생각해봤자인 일이었다.


한창 성장기인 뱃속이 시간을 맞춰 울렸다. 벌써 저녁시간이군. 배는 고팠지만 입맛은 돌지 않았다. 저 곳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배고파?"


장난스런 목소리가 물 흐르듯 귀로 흘러들었다. 목소리를 확인하려고 자리에서 벌떡일어나 좌우를 살폈으나 시야내 에 걸리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꺄르르- 맑은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야."


놀림 받고 있다는 생각에 인상을 쓰자 "위." 라는 대답이 들렸다. 나무 가지 사이로 주홍빛 등불이 좌우로 흔들리며 드레스자락이 얼핏 보였다.
Posted by Binc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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