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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끝이 났다. 파악하고는 금방이었다. 원래부터 있던 것. 상대는 조잡했다. 처음부터 꺼슬꺼슬 신경을 건드리던 것은 아마도에서 결국엔이 되었다. 다만 세번째 편지 후의 잠시간 흔들리던 마음이 여전히 맥을 못추고 있었다. 그래도 벌벌거리던 손으로 단 열흘만에 완벽한 답안지를 내었다. 이제 남아있는 일이라고는 제 흔들거리는 마음을 결정내리는 것이 하나, 또 그를 위한 선물을 결정하는 것이 하나였다. 사실 하나밖에 되지 않았다. 검은 개는 여전히 꼬리를 흔들었다.

 

 개는 오늘따라 침대에 납작 엎드려 움직이지 않았다. 동물의 감각은 사람과는 사뭇 다른 것이 있었다. 어쩌면 그간 자신의 행적이 결국 또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는지도 몰랐다. 드렉슬러는 곁눈질로 자신을 훔쳐보는 개에게 다가갔다. 가까워지는 거리에 개의 머리가 들렸다.

 

 "얼마 안 남았어."

 

 털의 결을 따라 부드럽게 쓰다듬자 개는 멀뚱히 자신을 바라보았다. 제 주인의 것과 닮은 눈은 아무런 뜻도 담지 않고 다음을 곧은 시선으로 기다렸다.

 

 드렉슬러는 실없이 웃었다. 그러면 그렇지.

 

 "참, 너도 안 어울리는 짓을 하는군."

 

 개를 조금 밀어내고 침대 머리부분에 앉아 벽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바닷가에서 자주 들려오던 자장가가 코를 울리며 작은 방을 가득 채웠다. 제 허벅지에 턱을 올려놓는 개의 행동이 조금은 사랑스러웠다. 괜찮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드렉슬러는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로라스는 눈을 뜨기 전부터 기분이 좋았다. 충분한 온기와 익숙한 느낌으로 어린 시절 자신의 요람에서 눈을 뜨는듯 평온하고 안정된 느낌에 절로 미소가 날 지경이었다. 뺨에 닿은, 평소보다 조금 거친 느낌의 천에 살갗을 문대었다. 기분이 너무 좋았다.

 

 눈을 떴을 때는 익숙한 돌벽이 시야에 차지 않았다. 바스락거리는 셔츠 천이 제 이마에 닿아 머리를 움직일 때마다 그 주름을 조금씩 바꿔가고 있었고 들이쉬고 내쉬는 편안한 숨에 천아래로 살덩이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알았다. 제 뺨과 눈가와 귀와 뒷통수에 걸쳐 얹어진 손바닥은 수면으로 인해 평소보다 높은 체온으로 따뜻했다. 꿈인가. 알 수 없는 기분에 이마를 더 바짝대었다. 넘어가려는 울대로 제 입술 위에 손가락 두 개를 얹었다. 맙소사.

 

 숨소리가 사근사근 났다. 그 숨이 스무번정도가 들락날락할 정도가 되어서야 로라스는 제 머리 위의 손을 받치고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여 바로 누웠다. 뒷목에 괴어진 허벅지가 단단했다. 주인이 일어나기 전까지 제 손아귀에 쥐어진 손은 제 장난감 같은 것이었다. 로라스는 마디 굵은 손을 조금씩 더듬으며 로이드와 반지와 잃어버린 전우들과 또 아까의 온기따위의 것들을 생각했다. 반지. 이 아름다운 손가락에 제 반지를 끼워넣어야했다. 그 전에 조금, 그 위에 키스하고 싶었다.

 

 "아."

 

 손을 빼앗기자 탄식이 흘렀다. 눈 안에 가득 들어왔던 손이 거둬지자 시큰둥한 얼굴로 저를 내려다보는 얼굴이 대신 들어찼다. 벌어진 입을 다물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로라스는 그 얼굴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멍청한 얼굴이라고 드렉슬러는 생각했다.

 

 "뭐 해. 뭐 해."

 

 타박하듯 손가락들과 손바닥으로 시선을 끊어내고 배려없이 몸을 일으키자 낡은 침대 위로 머리가 떨어지며 철제 프레임이 삐그덕삐그덕 비명을 질렀다. 무언가를 빼앗긴 어린아이처럼 로라스는 조금 심통이 났다.

 

 드렉슬러가 알 바는 아니었다. 잠은 완전히 달아났지만 잠을 깨려는 척 앞머리를 헤집고 뒷목을 벅벅 긁었다. 다시 삐그덕 소리가 났다. 침대에 걸터앉은 로라스는 다시금 엄지로 제 검지의 반지를 문질렀다.

 

 "…반지."

 

 들릴듯 말듯 말이 새었다. 그 어설픔에 순간 울컥하고 화가 밀려왔다. 드렉슬러는 제 책상의자에 꽤 거칠게 앉으며 거만하게 몸을 늘어뜨려 손깍지를 꼈다.

 

 "알게 뭐야. 그런 시시한 반지."

 

 잠시간 허공에서 시선이 닿았다. 시큰둥한 얼굴과 시큰둥한 목소리를 로라스는 잠이 덜 깬듯한 한껏 멍청한 얼굴로 응대했다.

 

 보기좋은 입가가 뒤틀리며 푸흐흐, 웃음이 나왔다. 고개를 숙인탓에 흘러내린 머리를 정리하며 로라스는 고개를 들었다. 노랗고 어두운 조명 아래서 파란눈은 따뜻하게 빛이 났다. 드렉슬러는 처음으로 로라스의 제 얼굴을 본 것 같았다. 나쁘지 않았다.

 

 "그렇지. 시시하지. 자네 말이 맞네."

 

 로라스는 제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내었다. 금장의 은반지는 알이 작은 푸른 보석을 빛내며 그간처럼 제가 해왔던 일을 했다.

 

 "갖고 싶지 않나?"

 

 "필요 없어. 그런 거 없었어도 여지껏 나, 잘 살았다."

 

 입을 열고 말들이 입 밖으로 튀어나가는 동안 드렉슬러는 그것들이 더더욱 확실해짐을 느꼈다. 그랬다. 제 길에 반지는 필요하지 않았다. 여태껏 그래왔고 지금까지 저런 상징들로 저를 옭아매려는 모든 것은 제 구둣발에 짓밟히거나 아니면 그 무게로 저를 짓이겨오곤 했었던 것이다.

 

 "그럴 줄 알았네."

 

 실망한 기색을 띠는 목소리에 그런 것이 아닌줄 알면서도 드렉슬러는 숨이 답답해지고 화가 났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이 허리 아래가 무거워진 탓이었다.

Posted by Binc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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