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tumblr : http://bincannote.tumblr.com twitter : @bincannote Bincan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65)
Faith&Spear (65)
Total
Today
Yesterday

달력

« » 2024.9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최근에 올라온 글

 끔찍한 침묵이 이어졌다. 두 사람의 발소리조차 적막했던 길고 긴 복도를 지나 실험실로 돌아온 둘은 각각 제자리를 찾았다. 침대는 흐트러져 있었다. 소란에 정돈할 시간이 없었던 것인지 두툼한 책이 두 권 펼쳐져있었는데 얼핏 보기에는 제 몫일 생화학 책이 한 권, 그리고 나머지 한 권은 지도책인 것 같았다. 제대로 쉬고는 있었던 건가. 로라스는 창백한 드렉슬러의 안색을 살피며 묘한 얼굴을 했다.

 

 "붉은 펜으로 표시를 해놨군. 여행이라도 갈셈인가?"

 

 "뭘 봐. 낯짝도 두꺼워선."

 

 순식간에 손 안에 들려있던 책을 빼앗겼다. 멍청한 얼굴로 눈을 깜박거리다 침음이 새자 오히려 당황한 쪽은 드렉슬러였다. 안 그래도 로라스를 몰아세운 것이 제깐에는 조금 마음에 걸렸던 참이다. 책을 책꽂이에 꽂아 넣으며 드렉슬러는 입을 열었다.

 

 "땅 지도가 아니야."

 

 "그럼?"

 

 "알아서 뭐하게."

 

 로라스는 엄지로 검지의 반지를 문질렀다.

 

 "그냥."

 

 "일 없다."

 

 흘끔. 시선이 손 끝에 닿았다. 머리속은 더 복잡해지고 있었다. 한숨을 쉬었다.

 

 "하늘 지도야. 별 지도. 붉은 색 표시는 내가 한 게 아니야. 영감이 한거지."

 

 "리처드?"

 

 "아니, 조셉."

 

 주춤대는 어깨는 방금의 이름이 입에서 저도 모르게 흐른 것임이 분명했다. 낯익은 이름인데도 얼굴이 바로 떠오르질 않았다. 그건 또 누군가. 묻기에는 둘 사이가 그렇게 가까운 것도 아니었다. 책꽂이에 등을 기대고 저를 내려다보는 거만한 얼굴에선 숨기려해도 사람냄새가 났다. 무릎 위의 손가락이 톡톡 바닥을 두드리자 드렉슬러는 짜증스런 손길로 제 머리를 헤집었다.

 

 "그거 하지마."

 

 "뭘 말인가."

 

 "그거, 그 손가락, 두드리는 거 하지 말라고. 정신사나우니까."

 

 "아, 거슬릴 줄은 몰랐군."

 

 "그런 게 아니야."

 

 바로 지어오는 의아한 표정에 드렉슬러는 제가 쪽지를 받은 이래로 쪽잠조차 전혀 자지 못하고 있으며 그의 방문으로부터 아흐레인 지금까지 기껏해야 예일곱시간정도의 조각잠만을 잤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쳤다. 피로로 찌들어 있을 얼굴을 한 손으로 쓸어내리다 잠시간 멈추어 코 아래에 걸어놓았다. 이러면 보이지 않겠지. 멍청한 생각이 들었다. 잠시간 빛을 본 조셉의 이름이 입 안에서 머무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 벌어진 틈새로 비집고 나오려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그냥 초조해져서 그래."

 

 "일이 잘 풀리지 않는가?"

 

 "아니, 아니, 무슨 소리야. 솔직히 말하자면 너무 쉬워서 이상할 정도지. 이건 마치,"

 

 이미 치료약이 있는 병처럼 보일 정도거든. 마저 말을 뱉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평소라면 뒷말의 시작은 하지도 않았을 것인데. 피곤한 것이 분명했다. 로라스는 제 손목의 시계를 흘끔보았다. 10시 45분.

 

 "시간이 아직 많이 남았군. 오늘은 읽을 것을 가져오지 않았는데."

 

 이리 일찍 올 것을 왜 가져오지 않았느냐고 묻고 싶지도 않았다. 침입자. 명쾌했다.

 

 "영감, 눈이 완전히 멀었군."

 

 "리처드?"

 

 "오오냐."

 

 본인도 별 감추려는 생각이 보이질 않았다. 태생적으로 거짓말을 못하는 자를 보내는 머저리가 누굴까. 연기일까. 이득은? 취할 것은? 목적은? 제 가설이 의심스러워질 정도로 투명한 사내가 여전히 읽을 거리를 요구하며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꽂았던 책을 도로 뽑아 던졌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중에 네 수준에 맞는 건 그런 것 밖에 없어."

 

 로라스는 드렉슬러가 자신이 그 책을 펴보길 기대하고 있다는 묘한 느낌을 받았다. 별의 항해일지라고 적혀있는 책은 낡아빠진 가죽책으로 그것조차도 헤진 겉껍질에 새로 만들어 덧댄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속지는 누렇게 변색되어있었다. 첫장에는 유려한 필체로 '내 아들에게.'라고 적혀있었고 드렉슬러가 별지도라고 부른 것은 20년쯤 전의 해도였다. 모년 모월 모일. 날씨 맑음. 잔잔한 바다.

 

 "별에 관한 책이 아닌데."

 

 "별 지도 맞아. 붉은 색 별이야."

 

 드렉슬러는 갑작스레 발작하듯이 깔깔댔다. 우스갯소리라도 한 듯이 명랑했지만 경멸스러운 웃음은 감출 수 없이 차가웠으며 웃음 특유의 따스함이라고는 한 조각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Prestigio. 명예라는 글자를 뱃머리 앞에 달고 배는 출항했다. 어린 아들을 품에 안고 바다의 비린 소금내가 나는 털북숭이 사내는 키를 잡았다. 도중 필체가 바뀌었다. 일기였던 것은 소설처럼 다른 이의 눈으로 적혀내려갔다. 내용도, 방식도 모든 것이 달라졌다. 펜을 쥐는 자가 바뀌자 무역을 하던 배는 해적을 만났고 약탈당했다. 배에 싣고 있던 노비, 향유, 짐승, 술과 음식, 돈이 되는 모든 것들이 낯선 땅에 얹어지기 전까지의 기록이 꽤나 즐거운 어투로 유쾌하게 적혀있었다.

 

 "불쾌한 책이군."

 

 씹어뱉는 듯한 어투에 드렉슬러는 빙그레 미소지었다.

'Faith&Spear > Midnight Blue'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라드렉/G] Midnight Blue 9  (0) 2015.06.18
[로라드렉/G] Midnight Blue 8  (0) 2015.06.09
[로라드렉/G] Midnight blue 6  (0) 2015.05.27
[로라드렉/G] Midnight blue 5  (0) 2015.05.27
[로라드렉/G] Midnight blue 4  (0) 2015.05.27
Posted by Bincan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