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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히 좀 해.”

쇠꼬챙이에 찔린 손은 아직 열감이 있었다. 무언가를 만들면서 열중하다 보면 흔하게 생기는 상처를 다리오 드렉슬러는 이곳저곳에 이미 무수히 가지고 있었다. 데이고 찢어지고 가끔은 뚫리기도 한다. 상처가 흉 지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그런 손을 알베르토 로라스는 기어코 끌어다 소독을 하고 얼음을 대어 주물덕거리며 심각한 얼굴을 한다.

“자네는 좀 더 제 몸을 아낄 줄 알아야해.”

“잔소리쟁이.”

“그렇다면 자네를 끔찍하게 사랑하는 잔소리쟁이겠지.”

 잔뜩 찌푸려진 미간의 골은 사라질 기미가 보이질 않아 드렉슬러는 늘상 다음에는 더 조심하겠다는 둥의 이야기를 했다. 대신 조금 느리게 한 발 양보한다. 화를 내는 로라스는 섹시하다. 그리고 드렉슬러는 그것을 로라스가 몰랐으면 했다. 그는 이미 너무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있었고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는 자신이 그 얼굴에 끌려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이 고독한 남자를 사랑하게 되는 이유에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좀 더 고상한 이유가 필요했다. 아름다움 외에도 이렇게 다정하고 강직한 사람을 어떤 이유로 사랑하면 좋은 걸까. 드렉슬러는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


손 안쪽 상처의 열감이 차가운 얼음주머니에 식으며 묘한 쾌감이 들었다. 대장간의 습기가 주머니 겉에 맺혀 팔목을 타고 주르륵 흘렀다. 드렉슬러는 그제야 제 몸에 열이 가득 차있다는 것을 알았다. 제 손을 식히기에 여념이 없는 남자의 정수리를 가만히 보다가 그 위에 입을 맞췄다.
 
“네가 내 사람이라는 게 믿기지가 않아.”
 
이에 로라스는 고개를 들어 답하듯 가볍게 입을 맞췄다.
 
“믿어주지 않으면 이젠 더는 방법이 없네.”

“내가 믿을 수 없다면?”

“그래도 사랑하겠지.”
 
달콤한 말을 하면서도 표정변화 하나가 없다. 둘의 사이는 오래되었다. 일상이 소곤거리고 이불깃이 사부작대는 나른한 날도, 피비린내 가득히 제 목숨을 걸고 쇳덩이가 부딪히는 전장에서 다시금의 약속 하나로 견뎌온 날도, 세는 일이 의미가 없을만큼 많이 지났다.
 
등 뒤에서 로라스를 급습한 적을 무리하게 랜스로 벽에 처박아 넣고 드렉슬러는 그대로 의식을 잃으며 뒤로 무너졌다. 무너진 돔의 아래에 누워있던 드렉슬러의 손을 기억한다. 부서진 갑옷과 푸른 새벽의 공기가 드렉슬러의 차가운 몸 위를 덮어 로라스는 흐트러진 옷매무새로 망가지듯 무릎을 꿇고 그의 배에 머리를 기대었다. 오래된 수로를 따라 번진 이끼 위에 가만히 누워 피투성이의 손을 끌어당겼다. 넓은 홀에 갑옷 절그덕거리는 소리가 울렸고 헤진 가죽강갑을 가만히 쓸어 제 뺨에 대었다.
 
“기다리겠다고 했었지.”
 
“무릎을 빌려주겠다고도 했어.”

“얼마나 무서웠는지 몰라. 내 삶에서 가장 길고 먹먹한 길이었지. 자네에게 가는 내내 왜 자네를 저택에 가둬놓고 멋대로 사랑하지 않았는지 후회하기도 했어.”
 
하지만 오르락내리락하는 드렉슬러의 배에 가만히 누워 로라스는 제 반지로 그를 구속하지 않은 것을 다행스럽게 여겼다. 그것이 자랑스러웠다. 드렉슬러는 강했고 그것은 그의 육체적인 것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는 제 보호 없이도, 홀로도 괜찮았다. 하지만 여지를 주었다. 그 부드러운 곳에, 그의 연약한 부분에 자신을 들여놓아도 좋다고 넌지시 준 암시가 있었다.
 
“사실, 도망갔을지도 몰라.”
 
“응, 알고 있네.”
 
“난 누군가 날 가둬놓는 건 지긋지긋 했거든.”
 
손의 상처는 조금만 손바닥을 펼치려해도 욱신거렸다.

“하지만 난 할 수 있다면 자네를 부드러운 천으로 묶어놓고 싶었어. 언제나 내 곁에 있도록 말이야.”
 
“넌 가끔 소름 돋는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더라.”
 
“농담 같은 게 아니니 말일세.”
 
“알고 있어.”
 
로라스는 드렉슬러의 다친 왼손에 연고를 마저 바르고 붕대를 감아 입을 맞췄다. 드렉슬러는 질린 얼굴을 했다.
 
“정말 징그러운 짓을 잘도 한단 말이야.”
 
“자네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기 때문이지.”
 
장난스럽게 맞춰오는 곧은 눈에 드렉슬러는 시선을 피해 왼손을 가만히 쥐었다.
 
“한동안 물 닿는 작업은 힘들겠네.”
 
중얼거리는 드렉슬러를 두고 로라스는 척척 걸어나가 의기양양하게 책상의 서랍들을 열었다.
 
“자! 다행이 여기 밀린 서류작업이 있네. 그러니 자네가 심심할 일은 없을 거야.”
 
서프라이즈 파티처럼 활짝 열린 책상의 서랍 속에는 터무니없이 많은 종잇장이 있었다. 로라스는 개운한 얼굴로 한켠에 쌓인 종이박스를 책상 근처로 나르기 시작했다.
 
“클랜 업무는 집에 가지고 오지 않기로 했잖아!”
 
사색이 되어 뒷걸음질치는 드렉슬러의 허리를 감아 로라스는 얼굴을 마주하고 방긋 웃었다.
 
“업무가 너무 많아 발명할 시간이 턱없이 부족한 다리오 드렉슬러가 삼일간 사라지는 것도 사실 예정된 일은 아니었지. 나는 자네가 회사 업무에 가담한 이후 책임감을 가지고 함께 일을 하고 있는 동료이기도 하네.”

로라스는 짐짓 엄한 얼굴을 했다. 드렉슬러는 그 얼굴이 우스워 견딜 수가 없는 나머지 속에서 울화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회사 말을 안 듣는 건 사실 네가 제일이잖아. 이제 와서 회사의 충직한 직원 흉내라도 낼 셈이야?”
 
“나는 언제 어디서든 나의 믿음에 걸맞게 행동하려고 노력할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걸 자네도 사실은 잘 알겠지.”
 
“알 게 뭐야! 집에서 잔업하기 생겼는데!”

“잔업이란 말은 사실 맞지않네. 이건 자네의 무단결근이 가져온 사단이니 쉬는 날이 바뀌었다고 생각하는 게 옳겠지.”

더 이상의 말싸움은 시간낭비일 뿐이라는 것을 같이 지내온 시간으로 드렉슬러는 잘 알고 있었다. 정론의 남자. 드렉슬러는 로라스를 만나기 전까지는 고집으로 누군가에게 져본 일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자신의 언변은 훌륭했고, 머리는 뛰어났으며, 원하는 마음은 강렬했다. 그래서 로라스와 언쟁을 할 때면 속이 뜨겁게 타는 듯 했다. 갑갑하고 답답한 외곬수의 남자는 설득이나 협상 같은 단어는 모르는 것 같이 굴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의 의견이 대부분 옳게 보이는 탓에 자신의 말들은 모두 변명이나 하잘것 없는 반항정도로 보이는 것이다.

“사실 어린애 같이 구는 건 넌데 말이야.”

드렉슬러는 한숨을 쉬었다.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군. 같이 하면 금방은 아니겠지만 끝은 낼 수 있을걸세. 자네가 얼마나 집중력이 좋은 사람인지는 내가 가장 잘 알지. 다행이도 다친 손 역시 왼손이 아닌가? 펜을 잡는데 불편함이 없으니 업무 속도에는 지장을 주지 않을걸세. 나는 작업이 끝날 때까지 곁에서 기껍게 도와주도록 하지.”

드렉슬러는 복잡한 기분이 되었다. 로라스는 드렉슬러를 어르고 달래지않았다. 타고나기를 사근하고 다정함과는 거리가 있었다. 대신에 해야하는 일을 짚어주고 옆에 있어주는 것으로 그 다정함을 대신해온다. 사실 그것이 로라스의 다정함일 것이다.

“응, 나도 사랑해.”

그 말에 로라스는 입술이 간질거렸다. 다리오 드렉슬러는 독립적인 사람이다. 혼자서도 아무런 문제 없이 외로움따위는 타지않고 망망대해를 헤쳐 미지의 대륙에 도달할 그런 부류의 사람이다. 스스로의 일은 스스로가 결정하고 주변의 시선은 신경쓰지않는다. 자신이 옳은지 그른지는 중요하지 않아서 그의 행동은 좀체 예측할 수가 없다. 그래서 세상은 그를 괴짜로 부르고 자신은 그의 독립성에 매료된다. 당당하게 빛나는 나의 별. 그 별이 제게 반짝여줄 때의 먹먹한 가슴을 가끔은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는 기분이 들었다.

“사람 얼굴이 잔뜩 달린 서류는 지긋지긋해.”

볕드는 식당의 테이블로 자리를 옮겨 시작한 작업은 아직 끝이 보이지 않았다. 드렉슬러는 리스트 업이 끝난 서류 뭉치를 머리 높이 들어올려 등 뒤로 집어 던져버렸다. 30페이지정도 되는 종이 뭉치가 팔랑거리며 떨어지는 소리에 스트레스가 조금 풀리는 것도 같았다. 로라스는 작성중이던 서류에서 잠시 시선만을 들어올려 기지개를 펴는 드렉슬러를 힐끗보았다. 3일간의 결근은 사실 의도된 바는 아닐 것이다. 어쩌다보니 화장실 가는 것도 잊은채 책상에서 밤낮이 바뀌는 것도 몰랐겠지.

높고 좁은 영국식 집은, 특히 런던에서는 방음이 제대로 되질 않아 드렉슬러는 창문 하나 없는 지하에 작업장을 만들었다. 같은 능력을 가졌음에도 사실 전장에서는 합이 잘 맞지 않아 외근이 다른 경우가 많다보니 생활패턴이 잡혀있는 로라스가 집에 없는 동안 가끔 그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무언가에 열중하기 쉬웠다.

“클랜 업무가 자네에게 배당 됐을 때 홀든 경의 얼굴은 꽤 우스웠지. 어울리는 일은 아니야. 책상과 자네의 그림이 이상하지는 않지만.”

종류가 다르지. 드렉슬러는 괜히 엄지와 검지를 문질러 펜을 빙글빙글 돌렸다. 펜이 돌아가며 끝에 달린 깃털이 휙휙 돌아갔다. 아, 이렇게 일이 착착 돌아가서 눈 앞의 서류가 전부 증발했으면 좋겠다. 다음 더미의 서류를 또 한뭉치 집었다.

“회사는 이상해. 비효율적이고 비이성적인 업무를 아무렇지도 않게 결정한다니까. 포스터 보고 나는 기절하는 줄 알았어.”

“나는 제법 잘 나온 포스터라고 생각했는데.”

“잘 팔리겠지, 내가 워낙 매력적이니까.”

로라스의 손에서 사각거리던 펜이 뚝 멎었다. 펜이 멎은 자리에 잉크가 천천히 배어나왔다.

“멋대로 광장에 마네킹처럼 세워놓고 말이야. 하루종일 구둣발로 서있다 집에 와서 신발을 벗으면 발냄새가 고약하다고.”

“...일이니까.”

누구에게 하는 지 모를 말이 로라스 입 사이에서 흐르듯 나왔다. 드렉슬러는 의식적으로 눈을 깜박깜박 두 번 감았다. 로라스는 가끔 이렇게 귀여울 때가 있다. 말간 아이가 아닌데도 빤히 속이 보였다. 장난을 조금 칠까. 드렉슬러는 턱을 괴었다.

“기왕하는 거 광대모자라도 씌워서 화끈하게 벗겨놓지, 왜.”

툴툴대듯 미끼를 던졌다. 시시각각 로라스의 얼굴에 그림자가 지는 모습을 보는 것이 즐거웠다. 로라스는 짐짓 아무렇지 않는 척 컵을 들어 물을 마셨다.

“멘트도 좀 더 자극적인걸로 바꾸고. 이런 미남을 데려다 군부대 모집 카피로 교묘하게 가릴게 아니라, 뭐가 좋을까. 섹시 가이 상시 대기?”

드렉슬러는 로라스를 살펴보았다. 아마도, 예측일 뿐이지만 속이 뒤집히는 기분일 것이다. 로라스는 이런 류의 농담을 좋아하지 않았다. 드렉슬러가 이 세상 모든 걸 비꼬고 비아냥거리더라도 눈 하나 꿈쩍하지않고 따박따박 따져 들 사람이지만 그게 드렉슬러에 관한 것이라면 이야기가 조금 달랐다. 바짝 마른 입이 달싹거리고 정리되지 않는 단어가 입 안에 뱅뱅 맴돌았다. 의심할 바 없이 짙은 집착을 입 밖에 내는 것은 로라스에게 껄끄러움을 넘어 두려운 행위였고 강렬하고 거세게 타오르는 욕망이었다. 삼켜진 말이 한숨으로 터졌다.

“저열한 단어 사용은 삼가게.”

한 번의 한 숨으로 로라스는 말끔하게 단정한 모습을 되찾았다. 펜 끝이 빙빙 돌았다. 톡톡, 종이 위에 점을 찍고 드렉슬러는 가만히 고개를 기울였다.

“보고 싶지 않아?”

의문이 담긴 얼굴이 눈 안에 가득 찼다. 드렉슬러는 부러 윗치아를 혀로 살짝 쓸어 가볍기 그지없는 표정을 했다. 로라스는 반쯤 감긴 제 눈 위에 입을 맞추는 걸 좋아했다. 졸음을 못이겨 눈을 끔벅대면 자신을 푸근한 곰인형 마냥 그러 안고 쪽쪽거리고는 했다. 그러니, 아마도, 예상컨데 로라스는 이 얼굴에 굉장히 화가 날 것이다. 그런 자신감이 있었다. 로라스의 입매가 단단히 굳는다.

종종 드렉슬러는 순전히 재미로 자신의 인내심을 시험했다. 호기심 많고 실험하기 좋아하는 사람이니까라고 이해를 하면서도 속이 끓었다. 경험을 통해 배운 것은 이런 경우 말미를 남겨주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의미없는 짓은 그만두게.”

“만날 아무 것도 못하게 하네. 드렉슬러, 이것은 안되네. 저것은 안되네. 그것은 그만두게. 자네는 대체 뭐가 문젠가.”

드렉슬러는 엄한 얼굴을 하고 고장난 로봇같이 움직이며 과장된 목소리를 내었다. 명백한 도발에 로라스는 미간을 문지르며 “다리오.”하고 드렉슬러의 이름을 불렀다.

“서둘러 서류작업 먼저 끝내도록 하지.”

어렵게 돌려놓은 화제에 드렉슬러는 전혀 맞장구쳐줄 의사가 없었다. 서류는 지겨웠고 며칠이나 갇혀있던 집안 공기는 텁텁했다. 이 집안에서 유일하게 생동적이고 재밌는 일이라고는 눈 앞의 남자가 스스로 얼마나 참을 수 있는지 싸움하는 것을 관찰하는 것 뿐이었다.

드렉슬러는 로라스의 참을성에게 조금더 과감한 싸움을 걸기로 했다. 손끝에서 돌아가던 펜을 마법지팡이처럼 가볍게 쥐고 팔을 뻗어 끝의 깃털로 로라스의 입술을 간질였다.

“난 다른 걸 먼저 하고 싶은데.”

혈관이 툭툭 터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로라스는 이를 한 번 꽉 물고 드렉슬러를 원망스럽게 노려보았다.

“자네는 가끔 정말 미워.”

크하하학. 박장대소가 터졌다. 드렉슬러는 책상을 탕탕 내리치더니 눈꼬리에 눈물까지 달아가며 숨이 넘어가게 웃었다.

“서류 작업이 너무 지겨워서 그랬어. 용서해줘.”

드렉슬러는 작업을 멈추고 책상 위에 얌전히 올려져 있는 로라스의 두 손을 그러쥐었다.

“알고 있어. 그러니 서둘러서 끝내야지.”

로라스는 답하듯 그 위로 이마를 기대었다. 잠시간의 조용한 시간이 평화로웠다.

“그런데 정말 안보고 싶어?”

“자네 정말...!”

찰나의 평화를 깨고 로라스가 벌떡 일어났다. 손깍지를 껴 뒷목을 기대고 올려다보는 파란 눈은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너만 보면 되잖아.”

정말 알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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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은 아무나 키우는 것이 아니다. 근처 숲에서 조그마한 새를 주워왔을 때 아버지는 그런 말을 했다. 지금의 남자는 어딘가 고장나 바닥에서 버둥거리기만 했던 새를 닮았다. 절박하고, 절실하지만 남의 손이 두려운 운명 앞에서 어쩔 줄 모르는 작은 새.

“웃긴다.”

나는 그것이 정말 우스워서 입가를 매만지며 웃음을 갈무리했다. 새라니. 그를 표현할 땐 네 다리로 땅을 박차는 무쇠소나 돌사자 같은 것이 어울린다. 전쟁마나 버팔로 같은 것도 괜찮겠다. 모두들 그가 예의바르고 다정다감하다고 멋대로 착각하지만 내가 아는 그는 야생의 본능이 잘 갈무리 되었을 뿐인 위험천만한 짐승이다.

이제 나는 사역동물이 쓸모를 잃었을 때를 떠올린다. 그는 땅을 갈거나 씨를 뿌리지않았을 뿐 전쟁을 위해 길러졌다. 전쟁이 끝나버리면 그는 어떻게 될까. 팔이나 다리가 부러져 퇴역하는 군인과는 다르다. 목적이 증발해버리는 것이다. 떠맡아버린 자유의 무게. 그것은 행복할까.

“무엇이, 다리오?”

“전쟁이 끝나잖아.”

다정한 말에 나는 짐짓 모른척 시침을 뗐다. 복구 작업, 개발과 이익의 배분으로 다들 몹시 바쁠 와중의 전에서 우리는 차를 마시고 있었다. 남자는 또 차분하고 단정한 표정으로 창 건너를 넘겨보았다. 인부들이 반쯤 부서진 건물의 잔해를 치우고 그 앞에서는 허름한 모자에 배바지를 입은 어린 소년이 과일을 갈아 주스를 팔았다.

“뭘 할거야?”

그 모습에 괜시리 약이 올라서 나는 스푼을 들어 차를 저었다.

“돌아가겠지.”

남자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 얼마간 창 밖을 보다가 내게 말했다.

“자네는 남겠지만.”

사실이 그랬다. 나는 소속이 어정쩡했다. 드라군의 이름으로 파병되었음에도 원한다면 얼마든지 그곳을 떠날 수 있었다. 가문에 묶인 것도, 나라에 묶인 것도 아니라면 내가 할 일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곳에 훨씬 많았다. 운이 좋게도 차고 넘쳤다.

“당연하지.”

그게 내 대답이었다. 당연하게도 당연한 일을 당연하게 했다. 마치 그가 본국으로 귀환하는 것과 같이. 전쟁이 끝나버렸으니까 같이 전장에 서는 일은 없다. 전쟁이 없으면 군인도 없다. 그러니까 전쟁이 끝난 이곳에는 그는 더이상 있을 이유가 없다. 모든 생물이 자신만의 삶의 터전이 있듯이 어린 시절부터 훈련을 받으며 평생을 전쟁터만을 위해 살아온 그는 이곳이 맞지 않는다.

“고국 생각은 나지않는가?”

“글쎄.”

우리는 눈조차 마주치지않았다. 꼬마가 팔리지 않는 주스를 팔기 위해 손나팔을 만들어 아마도 고래고래 외치고 있을 장면을 바라보았다. 뒤의 건물이 바스라지고 서까래가 떨어져도 잠시 놀랄 뿐 아이는 옷에 묻은 먼지를 털고 장사판을 재정비했다.

“두고 온 것은 없고?”

“그러게.”

어린 시절 새가 다시 생각났다. 새는 회색 깃에 하얀배를 가진 붉은 부리의 문조였는데 나는 아버지의 말에 달음박질쳐 집으로 새를 들여왔다. 집 서고에서 새와 관련된 책이란 책은 모조리 읽었다. 생쌀을 씹어서 먹이고 방에서 가장 채광 좋은 곳에 헌 옷으로 둥지를 만들었다. 새는 크게 움직이거나 소리내지않아서 나는 가끔 가만히 귀를 대고 그 작은 고동을 들었다.

“돌아오겠나?”

남자는 가만히 말했다. 그 소리에 나는 새로부터 이 남자로 돌아와 그의 눈을 마주했다. 고개를 가만히 저었다. 이렇게 가끔 이상한 소리를 한다.

“그럼 내가 남지.”

남자는 다시 창밖을 본다. 나는 그 옆모습을 가만히 보았다. 내가 가진 생태학론과 상식과 포기를 위해 되뇌인 그 당연함들을 그는 단순하고 섬세하지 못한 길로 고스란히 걷는다.

“...집에 방이 남아있어.”

다 나아 놓아준 새는 훌쩍 날아갔다가 이따금 내 창가에서 짹짹이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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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새벽이었다. 해가 들지 않은 푸른 새벽. 낮게 뜬 빛은 어둠을 완전히 물리지못하고 지하까지 스며들지 않았다. 검고 끈적거리는 길을 로라스는 말없이 걸었다. 매끈한 구두 밑창이 질퍽거릴 정도로 덩어리가 찢어져 새어나온 액체들이 고요히 고여있는 요새는 레드카펫처럼 그를 그 끝으로 인도했다.

신선한 비릿내와 차가운 겨울의 공기가 뒤섞여 피부에 도독도독 닭살이 올랐으나 손과 발에 땀이 차고 있었다. 처참한 미술작품을 보듯 로라스는 그가 늘어놓은 것들을 하나하나 스쳐지나갔다. 화려하게 꾸며놓은 지하 돔의 아래는 죽음보다는 삶의 전시에 가까웠으므로 로라스는 그것들을 자세히 쳐다볼 엄두가 나지않았다. 그가 꿈꾸었던 마지막의 온점을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모든 것은 상상에 지나지않았으므로 그것은 그에게 무례한 짓이기도 했다. 드렉슬러는 자신을 기다리겠다고 했다. 그는.

그는 사지를 뻗어 무너진 돔의 그림자 아래 편안하게 누워있었다. 문과는 가장 멀고 하늘의 경계와는 가장 가까운 자리에 누워 별빛을 덮은 듯 꼼짝을 않고 눈을 감았다. 잔뜩 찌그러진 갑주가 어둠속에서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과거를 흉내내는 듯한 우스꽝스러운 몰골로 그는 만족스럽게도 누워있었다. 로라스는 그의 머리 맡에 무릎을 꿇고 그의 헤드기어를 벗겨내었다. 감히 머리를 쓰다듬어 내릴 수 없었다. 늦었군. 낯익은 목소리가 들리는듯해 울컥 울음이 밀려왔다. 나를 기다렸을까. 그는 나를 보내면서 과연 나를 기다렸을까.

“다 끝났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로라스는 서서히 몸을 일으키며 권총을 쥐었다.

“로이드.”

저를 부르는 소리에 로이드는 슬쩍 웃었다.

“그는 죽었나?”

‘탕’

총소리와 함께 로이드가 거꾸러졌다. 왼쪽 허벅지의 중앙에 총알이 꽂히며 대퇴부의 뼈와 부딪혀 그 안의 납이 산산조각났다. 살이 찢어지는 고통에 로이드는 비명을 질렀다. 으악.

“제길, 로라스! 이게 무슨 짓이야!”

피가 솟아오르는 다리를 움켜쥐고 로이드는 절규했다.

“심판이다, 로이드 대령.”

로라스는 그의 이름을 부르며 울 것만 같아 이를 악물어야했다. 그에게 쏟아붓고 싶은 말이 뱃속에서 심장에서 들끓었으나 그는 그럴 가치도 없었으므로 이 고통 역시 로라스 자신이 참아내야했다.

“하! 결국 그를 사랑했나?”

애먼 로이드는 살아남아야했다. 한쪽다리는 이미 늦었다는 직감이 있었다. 하지만 죽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쪽은 완전히 못쓰게 되었으니 잘라내어 버리자. 대신 다른 쪽을 살리면 된다. 로라스는 자신의 복수를 위해서 남을 죽이는 인물이 아니다. 그에게는 평생을 바쳐 지켜온 대의명분이 있으니 사사롭게 자신을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계산이 있었다.

로라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할 수 없었다. 부대원들의 복수도, 드렉슬러의 죽음도 다 제가 책임을 질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므로 해서는 안되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자신에게 화가 났다. 다만 한가지 옳은 일을 하자면 눈 앞의 인물에게 벌을 주어야했다. 비열하고 악랄한 버러지. 제 것이 아닌 목숨으로 저울질을 하여 득을 취한 악독한 인간. 같은 공간에서 숨을 쉰다는 것이 고통이자 저주였다. 그의 목숨을 빼앗을 수 없다는 것이 벌로 느껴질 정도로 로라스는 그를 저주하고 있었다.

로라스는 총을 든 손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마음이 비어 공허해지고 있었다. 사랑으로 부풀어있던 가슴이 가라앉는다. 숨을 다한 새처럼 그는 심장이 고요해짐을 느끼며 문득 궁금해지는 것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에 로이드는 동요했다.

“왜 내가 당신을 죽이지않을거라고 확신하지?”

그러니까, 그는 로이드에게 그런 것을 물어서는 안되었다. 왜 그를 죽였느냐, 왜 이런짓을 했느냐. 그는 좀더 목적성이 뚜렷한 질문을 해야했다. 당황한 나머지 로이드는 더듬더듬 가장 먼저 생각나는 말을 내뱉고 말았다. 아주 어릴 때 그가 배웠던 한가지는 모든 질문은 세번은 뇌를 거쳐야한다는 것이었다.

“너는 그런 인간이니까.”

스스로가 당긴 총구가 불을 뿜었다.

“네게는 아무 것도 없어. 신념도, 명예도, 긍지도!”

‘탕’
‘탕’
‘탕’

모든 탄알이 왼쪽다리의 정중앙에 박혀 다리를 작살내었다. 밀려드는 고통으로 로이드는 결국엔 정신을 잃으며 쓰러졌다. 그 때 로라스의 등 뒤에서 은빛의 칼날이 번쩍였다.

살기도 기척도 없었다. 깊게 베인 오른쪽 팔에서 피가 나고 있었다. 총을 떨어뜨렸고 예리한 고통에 비틀거렸다. 빠르게 자리를 벗어나며 뒤로 물러서자 완전히 뭉개진 얼굴의 사내가 칼을 휘적거리며 흔들리고 있었다. 힘없는 나무인형이 줄에 묶여 춤추듯이 너울거리던 사내는 쓰고있던 헌팅캡을 떨어뜨렸다. 죽은 제임스였다.

로라스는 제임스의 얼굴을 몰랐다. 이 상황도, 남자도 모든 것이 생소하기만 해서 자신이 잠에서 덜 깬 것은 아닌지. 드렉슬러가 말했던 악몽이 이것이 아닌지 생각해야만했다.

남자는 몇 걸음 힘겹게 걷다가 쏟아지듯 자신의 품으로 달려들어왔다. 피가 흐르고 겨우 총을 집어들어 남은 총알을 전부 맞췄을 때 남자는 잠시 멈추는 듯 하다 고개를 꺾고 로라스를 향해 마지막 질주를 하듯 칼을 뻗었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났다. 방 벽을 장식하던 랜스가 죽은 제임스를 꿰뚫으며 벽에 처박혔다.

“뒷통수 조심하는 게 좋을껄.”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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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떴을 땐 여전히 회색의 격자가 희미하고 일렁이는 어둠 뿐으로 로라스는 몽롱한 정신에 힘없는 손가락으로 이불을 고쳐덮어 눈을 도로 감고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겁내지말고.’ 공기 중에는 텁텁하고 단내가 옅게 남아있었다. ‘조금 어지럽겠지만.’

그러자 닥쳐오는 불안이 명치에 걸려 복통이 일었다. 아아. 숨이 막혀 소리를 낼 수 없었다. 가슴이 뛰고 몸이 저려왔다. 손가락 하나하나가, 발가락 하나하나가 움츠러들어 뻑뻑했다. 막상 돌아와 눈을 뜨니 괴롭다. 이곳에는 그저 고통과 괴로움 뿐이었다. 겨우 살아있는 이 시간이. 그래서 단 한가지의 생각만이 맹렬했다. 가야할 곳이 있었다.

이불을 젖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로라스는 단숨에 머리 맡의 커텐을 잡아뜯듯 걷었다. 해가 오르는 새벽. 하얀 빛줄기가 하늘과 땅의 경계에서 비집듯, 찌르듯 솟아오르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빛에 이상을 느낀 시야로 속이 울렁거려 게워내고 싶었다. 토기를 참아내고 그는 돌연 벽난로로 성큼성큼 걸음을 걸었다. 그리고 그 떨리는 손으로 부지깽이를 움켜쥐어 힘껏 치켜올렸다.

소리만큼이나 요란하게 유리파편이 튀었다. 강한 힘에 반발하듯이 유리는 그 탄성으로 튀어들어 산발하듯 쏟아져내렸다. 시야는 돌아오지 않았지만 거친 숨으로 들썩이는 하얀 셔츠 위로 핏방울이 떨어졌다. 살아있었다.

조급한 소란 속에서 하수도를 향해 차를 몰았다. 맑지않은 정신으로 지르는 소리에도 고용인들은 많은 질문을 덧대지않았다. 로라스는 휘청거리는 몸을 가눠 차의 뒷자석에 겨우 올라타면서도 한 손에는 총을 단단히 쥐었다. 드렉슬러에게 약속을 받아냈으니 그는 자신을 기다려줄 것이다. 그러니 자신도 그의 기다림에 보답을 하여야했다. 그것이 설사 그가 원한 일이 아닐지라도.

쉽사리 돌아오지않는 뿌연 시야로 방 안의 공기가 망막에, 콧속 점막에, 귓속에, 피부에 빠짐없이 늘러붙어 쫓아오는 기분이 들었다. 자신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아직도 어둠 속에서 헛발질을 하고 있었다. 새벽의 숨을 막을듯 끈적이는 스모그 속에서, 영국의 두려운 밤의 끝에서, 오롯이 붉게 흐르던 상처의 두근거림만이 선명했다. 바라는 대답없이 묻고 싶은 것은 많았다. 간절한 갈망만이 새롭게 솟아나는 샘처럼 가느다란 물줄기로 바위 위의 길을 내고 있었다. 정처 없이 흐르는 마음은 이유도 모르고 한 곳에 고였다. 우스울 정도로 불편한 옷을 입고 흐트러져 반지를 낀 손에는 총을 들었다. 몸에서 나는 열로 차창에 기댄 이마 근처에 김이 서려 퍼져나가는 것을 가만 보며 말을 골랐다.

애원을 하든 협박을 하든 그 검지에 반지를 우겨넣을거야. 나와 같은 위치에 앉혀 나로써 자네가 존재할 수 있도록. 그리고 반지를 하나 더 준비해야지. 자네가 악세사리를 좋아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아. 그래도 무릎을 꿇어 기어코 반지를 끼워넣을 생각이야. 그리곤 자네를 움켜쥐고 섹스를 할 거야. 내게 선물한 악몽에대해 지독하게 캐물어야지. 나도 자네만큼이나 고집쟁이라는걸, 자네도 안다는 걸 알아. 덕분에 듣고 싶은 말들이 많다는 걸 알았어. 모두다 침대 위에서 들을 생각이야. 끊임없이 달라붙어선 원한다고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뤄주겠노라 약속을 하고, 물론 난 그 모든 걸 남자들이 흔히 하는 베겟머리 거짓말 따위로 만들지 않겠지. 그럼 자네는 물기 젖은 눈으로 미래를 약속받기만 하면 돼. 이미 그 날카롭고 섬세한 시선으로 내 마음을 저당잡았으니 내 심장은 자네 것이고. 그래, 이미 자네 것이고. 자네는 고갯짓 한 번, 손짓 한 번으로 날 천국으로, 지옥으로 보낼 수도 있겠지. 키스 한 번으로 내가 여태껏 쌓아올린 모든 것을 이용할 수도 있을 거야. 선물할 수 있는 것들은 죄다 이런 것 뿐이네. 그래도 자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어. 지켜주겠네. 내가 지켜주지. 약속하겠네. 약속할 거야. 그러니.


더러운 스모그의 밤과 갓 태양이 오르기 전까지의 네댓 시간의 틈 사이에는 어둠 속에서만 꿈틀거리는 시체가 있었다. 드렉슬러는 제 품안으로 뛰어든 짧은 나이프를 옆구리로 밀어내고 제임스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갑주에 찢어진 제임스의 뺨에서 제 눈으로 피가 튀었다. 거친 가죽의 장갑으로 눈을 문질렀지만 앞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하나는 다행이다. 나머지 시체는 모두 돌무더기의 아래에, 또는 벽에 걸려있으니. 드렉슬러는 그렇게 생각했다.

노인은 가느다란 실들을 엮어서 남들이 듣지 못하는 이야기를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죽은 것들의 속을 파먹고 빈 껍질을 제 하수인으로 부리는 재주가 있었다. 한 쪽에서는 그런 노인을 신으로 모셨고 한쪽에서는 그런 재능을 역겨워했다. 두려운 능력이었다. 죽은 자가 너울거리며 움직이는 것은 죽음을 모르는 용맹함, 제 신체의 한계를 넘어선 파괴력을 뜻했다. 다행인 것은 노인이 예전같지 않아 갓 죽은 싱싱한 시체를 움직일만큼의 힘이 없어 제 생명력을 갉아 먹으며 남의 몸을 비워내어야 겨우 두엇의 시체를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는 것.

말라비틀어진 손가락은 지금도 허공에서 꿈틀거리며 시체들의 양분을 빼내어 빈껍데기를 만드느라 분주할테지. 그리고 곧 알게 될 것이다. 이 곳에서 자신이 움직일 수 있는 시체는 없다는 걸. 그리고 아직 살아있는 시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드렉슬러는 두 눈을 깜박이며 더 열심히 피를 닦아내려 노력했다. 왼쪽 옆구리에서는 피가 흐르고 총알이 스친 허벅지 역시 상태가 좋지않았다.

제임스는 다시금 나이프를 쥐고 덤벼들었다. 흐릿한 형체에 의지하여 드렉슬러는 나이프를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크아아아아아아-!”

불타는 연장을 맨 손으로 힘껏 쥔 듯한 격통이 있었다. 칼은 더이상 파고들지 않았지만 고통 역시 끝날 것 같지않았다. 드렉슬러는 숨을 크게 들이마셔 순간적으로 참으며 제임스의 복부를 힘껏 걷어찼다. 넘어가는 제임스의 위로 올라타 온 힘을 다해 주먹질을 했다. 얼굴뼈가 으스러지고 제 손 역시 골절이 간 것이 느껴졌지만 솟아오르는 피로 숨이 멎을 때까진 손을 멈출 수 없었다. 고통으로 제임스는 왼손을 들어 드렉슬러의 오른손목을 힘없이 쥐었다.

“결국, 졌어.”

울컥. 피분수가 터져올랐다. 눈을 감지못한 고개가 툭 떨어지자 가늘고 보잘 것 없던 금발이 흙과 피에 엉켜 달빛 아래에서 진흙탕을 뒹군 볏집처럼 보였다.

드렉슬러는 이 모든 것에 온 몸의 기운이 주욱 빠지는 것을 느꼈다. 이 시체 위에 창을 꽂기까지 아직 끝난 것이 아닌데 더이상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대로 쓰러져 누웠다. 세상이 일렁이고 어지러웠다. 어쩌면 저도 피를 너무 많이 흘렸는지 모른다.


차는 돌바닥에 스크래치를 내며 덜컹, 자리에 멈춰섰다. 평소와 다른 것이 없었는데도 로라스는 그 주위가 유난스럽게 조용하다고 느꼈다. 제 머리 위로 포격이 쏟아지기 전, 그 시간이 멈춘듯한 순간이 떠올랐다. 아니다. 이 고요는 그것과는 종류가 달랐다. 그럼? 오소소 소름이 돋기도 전에 손 안에 차가운 식은 땀이 고였다. 찬 땀으로 피부는 끈적하고 시리고 뻣뻣했다. 그래, 이 고요는 어떤 것이었지?

로라스는 좀비처럼 걸었다. 맹목적으로 전진하면서도 제가 어디로 가는지 확신 할 수 없었다. 어디로 가야할지는 정해져있는데도 끝이 보이질 않았다. 비척비척. 발소리가 복도를 공허하게 울렸다.

그가 자신을 지켜달라고 말했을 때, 무엇으로부터 그를 지켜야하는지 로라스는 몰랐다. 단순히 화이트 칙스의 미움을 받고 있으니 조직의 일원으로 그를 받아들이면 모두 다 끝나는 일이라고, 나라에서 그를 지키지 못한다면 그렇게 하면 된다 믿었다. 하지만 그는 제 반지를 거절하고 자신을 목줄 걸린 개 취급을 했으며 종내에는 자세한 설명도 하지 않은채 로라스를 시험했고 보기좋게 밀어내었다. 사실은 제 능력을 믿고 콧대높게 군다고, 오래 살진 못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동시에 그에게 호감을 느꼈다. 제 거둬진 목숨에는 치욕이 덕지덕지 묻어 중요한게 무엇인지 볼 수가 없었다. 그의 명예. 갈증. 열정. 그 모든것에 끌렸음에도 그가 제게 던지는 메세지 하나를 읽지 못했다.

“그래서야, 내가 어떻게 아느냔 말이야.”

복도에는 그의 목소리만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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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있었다면, 그 때 박살내는 쪽이 좋았다.

알베르토 로라스가 드렉슬러가의 차남을 만난 것은 그가 겨우 제복을 혼자서 단정히 입을 수 있게 되어 나라의 부름을 듣고 한창 목에 힘이 들어갔던 꽤 어린 시절의 일이다.

특별한 능력을 가져 특별히 차출되어 특별한 취급을 받는 어린 아이들이 매일 같이 특별한 훈련을 받으며 특별하지 않은 사상을 주입받는 비밀스럽고 특별한 대대.

처음 만난 드렉슬러가의 차남은 드라군 중에서도 갓 입소한 상대적으로 어린 아이들이 소속된 소대에 있었는데 멘토제로 인해 재수없게 그의 멘티가 된 병아리는 이 때부터 이미 반쯤 울고 있었다.

“특별은 얼어죽을. 그 뿌듯해서 죽을 것 같다는 재수 없는 면상이 날 열받게 하는 거라고. 신병? 지랄이 났지. 니가 뭐라도 되는 것 같아? 여기 있는 놈들은 다 병신들이야. 나라를 위해, 왕가를 위해 목숨을 내놓은 은혜로운 병신들. 그게 뭐 자랑이라고 네, 선배님! 저는 국왕폐하를 위해 어쩌고저쩌고. 안물어봤어. 네 새끼가 전장에서 누굴 위해 뒤지고 싶은지 안궁금하다고. 가르쳐주는 것만 들어. 그외엔 입 열지마, 알았어?”

말이 너무 많아. 천박한 녀석이다. 로라스는 눈쌀을 찌푸렸다. 그 아무도 목소리를 높여 모두를 경멸하고 모욕하는 소년을 저지하지않았다.로라스 그 역시 갓 들어온 신병에 불과했으므로 어디서 시작된 규칙인지 알기 전엔 함부로 나설 수 없었다. 이것이 이곳의 룰인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얼마 걸리지않았다.

시간이 지났고 드렉슬러는 신발 속의 가시같은 사내가 되었다. 첫인상이 그대로 이어져 그는 늘 어디선가 거슬리고 따끔거렸다. 뛰어나고, 뛰어나기 때문에 안타까운 사람은 그의 주위에 있는 사람 뿐인, 어처구니 없는 경우를 그는 잘도 만들어냈다.

그는 성실했다. 투덜거리면서도 맡은 일이나 주어진 일을 허투루 하는 법이 없었고 그가 맡았던 멘티들 역시 그가 괴팍하다는데에는 동의할 지언정 그의 능력에대해선 의심하지않았다. 오히려 근처에 있고 싶지는 않지만 필요하다면 그를 돕겠다는 기묘한 충성심을 보였는데 로라스는 그부분에 있어 늘 의문을 가졌다. 생각해보면 자존심이 상했던 그 날부터 자신 역시 알게 모르게 드렉슬러를 지켜봐왔던 것이다.

소수 정예인 드라군은 그 훈련 상대가 여의치 않아 연무장에서의 대련은 아는 얼굴의 아는 얼굴로 돌아가며 하게 되었는데 로라스와의 대련을 마치고 나서 그는 유난히 뚱하고 탐탁찮은 표정을 지었다.

너는 왜 나한테 진심으로 창을 내려치지않냐, 봐주는 거냐, 엘리트다 이거냐, 내가 우습냐.

되지않는 시비에 로라스는 웃지도 못했다.

너랑 하는 대련은 너무 모욕적이야.

그렇게 드렉슬러가 빈정거릴 때면 로라스는 자신이 입소했던 그 날을 떠올리며 괜히 고수운 생각이 드는 것이다. 모욕적이라. 만족스러운 기분이 이상하게도 들었다.

드렉슬러의 파문은 놀랍지않으면서도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로라스는 제 안에서 근원을 알수 없는 분노가 치솟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찾기도 전에 자신은 이 일에 말을 얹어도 되는 입장이 아니었다. 평소 그와 술이라도 한 잔 기울이는 사이라도 됐다면 이렇게 분하진 않았을텐데.

하지만 귀족이 아니더라도 그는 달라진 것이 없었다. 오히려 가뿐하고 유쾌한 얼굴에 약이 오를 지경이었다. 별 달리 바뀐 것이 없자 로라스는 이 모든 것이 은근히 안심이 되었다. 보라지, 그는 이렇게 강해.

위로의 말 대신 창을 부딪힌다. 대련 후 그는 제 어깨를 가볍게 한 번 툭 쳐주었다. 오늘은 좋았어. 그 말 한마디가 그렇게 쑥스러울 수가 없었다. 돌아서는 드렉슬러의 이름을 불렀다. 오늘 저녁 술한잔 어떤가? 그는 씩 웃고는 저녁 6시, La vie. 하고는 사라졌다. 마시기도 전에 열이 올랐다.

그랬었던 것이다. 둘 사이의 관계는 그 정도는 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인사도 없이 영국 파병을 떠나버리다니. 그 답고도 서운한 일이었다. 아니면 그의 뜻이 아닐 것이다.

로라스는 속이 부글거려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무엇이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지만 견딜 수 없다고 해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에 숨이 막히고 졸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무턱대고 드렉슬러의 이름 앞으로 전보를 쳤다.

긍지고 명예고 뒤지면 다 개소리야. 그는 자신이 조금 무리하는 기색이 보이면 슬쩍 다가와 속닥거렸다. 아마 그는 이번 일에 눈하나 꿈쩍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렇기에 그와 더 멀어진 기분이 들었다. 그의 욕지거리조차 그리울 지경이군. 로라스는 저도 모르게 이가 악물렸다.

영국 행의 이유. 짧은 전보의 답 역시 짧기는 마찬가지로, 지키고 싶은 사람이 생겼어. 불이 붙기에는 충분한 불꽃이었다. 우연하게도 이듬해 로라스는 영국으로 발령을 받았다. 아주 우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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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제 앞의 인물에게 쏟아부었던 수없이 많은 저주의 말들이 입을 여는 순간 그를 생각하며 보냈던 나날들로 변해 자신에게 그의 존재감이 얼마나 큰지 증명할 뿐일테다. 긴 세월이 지났고 드렉슬러는 돌아왔으며 여전히 빛이 났다. 흉물스럽고 처연한 감정이 가슴을 묵직하게 눌렀다. 그는 여전히 제게 아름다운 괴물이었다. 그것의 죽음 없이는 스스로 존재할 수 없는 공포스럽고 경이로운 괴물.

“맥그리거씨의 명령이다. 투항하고 귀환하도록 해.”

“여전히 너는 내게 인사조차 안하는구나, 니노 보. 이름을 바꿨다지? 그래서 너는 애새끼라는 거야.”

드렉슬러는 일렁이는 불꽃 아래에서 제임스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잔악하고 교활한 얼굴. 지저분한 금발을 어울리지않는 헌팅캡 아래 숨겼지만 비정한 파란 눈까지는 어쩔 수가 없었다. 여전히 저를 신경쓰면서 의미없는 견제를 하고 긴장하여 단단히 굳은 턱을 보았다. 선이 엷다, 꼭 그의 목숨줄처럼.

바람 한 점 없는 돔은 소리가 웅웅 울렸다. 횃불이 타오르는 소리, 핏방울이 웅덩이로 떨어지는 소리가 괴상할 정도로 크게 들렸다.

얇은 긴장. 맥그리거는 능력자들을 구역질나 했다. 스스로가 자신의 능력으로 그 자리에 앉았음에도, 또는 그렇기 때문에 제 아래에 능력있는 것들을 두지 않았다. 이미 그 둘이 쇠꼬챙이에 꿰여 벽의 장식물이 되었다. 기세 좋게 들어가긴 글렀군. 제임스는 입을 뾰족하게 모았다.

“돌아가지 않겠다는 뜻인가?”

“물론.”

“이래봤자 바뀌는 건 없어, 드렉슬러. 맥그리거씨는 생포를 원하셨지만 우리 둘 다 결말을 알고 있지. 너는 운좋게 이번을 이기더라도 결국 네 무덤으로 걸어들어온거야. 끝은 뻔하지않나?”

말을 이어붙일 때마다 불덩어리를 삼킨 듯이 위가 일렁였다. 토하고 싶다. 끊임없이 다 쏟아내고 싶다. 욕구는 제 가장 깊은 곳에서 끓었다. 끝나지 않는 공포로 사지가 떨렸다. 달려들어서 죽이고 싶다. 제임스는 제 마른 입술을 핥고 싶었다. 드렉슬러가 제 앞에 있었기 때문에 하지 않았다. 입술의 움직임에 맞춰 갈라지고 거칠어진 제 살갗이 느껴졌다. 잠시만이라도 모두 적셔서 잊을 수 있다면.

"끝까지 멍청해."

실망을 지나쳐 낙담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넌 그래서 죽는다."

깡-!

쇳덩이가 돌을 내리치는 소리가 살갗을 할퀴었다. 드렉슬러는 창의 끝을 세워 돌바닥에 불꽃을 일으켰다. 사납고 날카로운 소리.

“이곳에서 말이야.”

제임스는 조직원을 뒤로 물려 다시금 문을 닫았다. 쾅. 쾅. 쾅. 문을 향한 거센 발길질에 경첩이 부숴지고 문짝이 뜯겨져 나갔다. 둘이 문을 들고 정면으로 돌진한다.

“죽음을 두려워말라! 우리는 이미 한 번 죽은 몸, 승리를 위해 충성을 다하라! 화이트 칙스에 영광을!”

선창이 있었다. 드렉슬러를 향한 총알이 빗발쳤다. 거리는 고작 40피트. 돌기둥 뒤로 몸을 숨기며 드렉슬러는 눈을 감고 소리를 들었다. 몇 번이고 그려왔던 그림들이다.

“느려!”

기둥 뒤에서 튀어나온 드렉슬러는 순식간에 창을 던졌다. 총알이 갑옷을 때리며 소란이 일었다. 순수한 물리적 에너지가 쏟아진다. 하나의 의도로 수많은 것들이 밀어닥친다. 몸은 휘청이고 살갗이 떨어져나간다. 그 사이로 바람을 가른 창은 성공적으로 문을 쪼개어 폭발시켰다. 섬세한 끝은 부드럽게 문 위에 그려진 하얀 과녁을 파고들어 정중앙을 후빈다. 그것이 뭉그러지면서 철컥 소리가 났다. 하나 였던 것이 틈이 생겨 갈라진다. 폭발. 서늘하게 날이 선 날카로운 조각들이 산발적으로 흩어져 생살을 찢어놓았다.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죽고 또 쓰러진다. 조금 더 안으로. 드렉슬러는 진영이 다시 갖춰지기 전 홀의 사 분의 삼을 가로 질러 다음의 돌기둥 뒤에 몸을 숨겼다. 마지막 한자루의 창을 고쳐쥐었다. 온 몸에 멍이 들겠군. 가까워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나는 이곳에서 살아나간다. 쌓아올린 죽음들 위에서 희열로 고동치는 머리에, 가슴에선 피가 끓었다. 빠르게 도는 혈액으로 온몸은 단단해져 이미 가벼웠다. 나아갈 것이다. 죽어서도 움직일 것들은 망설임이 없을 것이다. 자신이 마주하는 것들은 늘상 그런 끔찍한 것들이어서 드렉슬러는 날개라도 돋을 것 같은 양 어깨를 으쓱하지않을 수 없었다. 저는 그것들과 다를테니까. 앞으로 두발자국. 하나.

핏대가 오른 목을 하늘을 향해 끝까지 뻗어 들었다. 반동으로 몸을 돌려 한 발을 힘차게 굴러 단단히 딛고 쭉 뻗은 팔은 홀의 천장인 돔의 중앙으로 창을 쏘아보냈다.

“수 많은 별을 봐라!”

우르릉. 하늘에 구멍이 났다. 달빛. 흐리고 무수한 별빛들. 자정의 블루가 쏟아져 내렸다. 비, 돌과 철의 비가. 아직 오지 않은 거대한 하늘을 기다리며 드렉슬러는 미리 웃었다. 바로 그 때였다. 제임스가 칼을 빼어들어 드렉슬러의 품으로 뛰어든 것은.

정적.

문 속에는 날이 밝기 전의 가장 어두운 곳과 그 어둠의 끝과 탄생의 순간을 위한 끔찍한 정적이 있었다. 이곳과 저곳을 갈라놓은 의식의 경계를 로라스는 그렇게 개를 따라 넘었다.

새가 지저귀었다. 낡은 방갈로에 딸린 야트막한 부엌에는 흰색 페인트를 칠한 작은 티 테이블과 작은 편지, 낡은 커버의 책이 있었다. 선반에는 조악한 오르골, 금빛의 훈장, 작은 곰인형, 찻잔이 올려져있고, 전등 대신 입구 벽의 모서리에는 가스등이 걸려 있었다. 그러니 익숙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보고 싶었던 그리운 것들. 로라스는 손을 뻗어 그것들을 하나씩 어루만졌다. 모두 잃었다. 개는 끝도 없이 먹어치웠다. 쉬지못한 두뇌가 피로를 호소해도, 채워지지 않을 배를 개는 모든 기억으로 채우려들었다. "메리제인을 만났어?" 의자에 앉은 드렉슬러가 있었다.
그는 부드럽게 웃었다. 가죽책 위에 손을 얹고 다시 나를 끌어 안겠지. 로라스는 드렉슬러의 맞은 편에 앉아 드렉슬러를 마주보았다.

자신은 제 앞의 이것처럼 사랑을 흉내내고 있었다. 사랑하기 때문에 해내야하는 것을 드렉슬러에게서 얻어내기 위해서. 달콤한 것들을 미끼로 던졌다. 드렉슬러의 외로움을 알기에 그랬다. 완벽하게 자신의 상처를 이겨내기 위해서, 자신은 그저 최선을 다한 것 뿐이니 죄책감은 없었다. 그도 나쁠 것은 없었으니까.

그는 쫓기고 있었고 자신은 힘이 있었다. 수문장의 영감마저 자신을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 것을 로라스는 알고 있었다. 필요로 엮인 관계들에 드렉슬러는 자존심을 지키는 대신 순순히 반지를 건네받아 자신을 지켰어야 한다. 그것이 옳다. 죽음 후에는 아무 것도 없음을 신을 믿는 로라스는 알았다. 그는 무언가 숨기고 있었다. 이겨내야하는 것을 품고 보여주지 않았다. 그는 웃고 화내며 자신을 잔뜩 드러내다가 정작 중요한 것은 감추어두고 내어놓지 않았다.

로라스는 손을 뻗어 책 위의 손에 제 손을 겹쳤다. 나는 당신을 지킬 힘이 있어. 왜 반지를 건네 받지 않았나. 그것으로 당신이 내 것이 되면 좋았을텐데. 그랬다면 나는 당신을 지켜줄 수 있었을텐데. 당신은 사랑없이 나를 시험했어. 내게 정말 당신을 지킬 힘이 있는지. 기억 속의 드렉슬러는 전처럼 슬며시 웃는 대신 시선을 낮추었다. 그제야 마음 속에서 모든 것을 잃어버릴 것 같은 불안이 일었다.

아니다. 감춘 것은 자신이다. 중요한 것을 내놓지않고 사랑받기 원했다. 그는 사랑받아야하고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었으므로 저는 그에게 조금씩 젖어들어 사랑하게 되었을 뿐이다. 그러니 너무 많이 원했던 것은 자신이다.

창 밖이 갑자기 어두워지더니 파랗고 커다란 눈이 창으로 들이닥쳤다. 빛 없이 물기만으로 눈은 번들거린다. 와그작거리는 소리와 함께 집이 뜯어져나갔다. 그 골조를 모조리 집어삼키고 개는 다시금 입을 쩍 벌렸다. 그러니까 개는 드렉슬러를 집어삼키려 하고 있었다.

잊어버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 있다면 더 잔인하게 잊게 된다. 로라스는 그 앞을 막아서고 반항했다. 잊고 싶지 않아! 개는 그 소리마저 먹어치웠다. 그를 잊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그다지 달라질 것은 없을것이다. 강하게 열망하는 것은 그와 함께한 기억이 있기 때문이니 다른 것이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중요한 것이 있다면 지금의 로라스가 그를 잊고 싶어하지않는다는 것이다. 그와 함께 있고 싶다는 단순한 열망. 사랑이었다.

또다시 정적.

먹먹한 어둠에서 개는 저를 바라보았다. 아리고 다정한 무의식이 저를 바라보았다.

"일어나야 해."

소리가 났다. 개는 제가 삼켰던 것들을 울컥울컥 토해내고는 서서히 다가오는 새벽으로 걸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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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취해 나가떨어진다. 어린 아이가 떼를 쓰다 지쳐 잠이 들듯이.

겨울은 끝이 났고 봄이 온다. 데워진 땅내음이 아직 찬 공기와 섞여 달다. 그런 종류의 꿈을 꾼다. 나는 너와 몇 년간의 사랑을 했다. 몇 번의 만남과 사소한 이별이 쌓여서 나는 이번에도 너와의 재회를 소망하며 일상을 소화해낸다.

우리는 몇 번을 만나 대화를 하고 사랑을 하고 또 싸우기를 반복했다. 네가 사과를 하거나 내가 사과를 하거나 사과없이 마음이 눈녹듯 녹아내리는 것은 겨울이 끝나고 봄이 오는 것과 닮아 나는 구태여 무엇이 지나왔는지 헤어리거나 생각하지않았다. 너는 늘 그곳에 있었다. 다만 이번의 일이 조금 길어져 그것이 불안한 것이다.

사랑을 하느냐면, 명백히 그러했다. 다 늙은 감정이라고 우스갯소리를 하려고 하면 너는 불같이 화를 냈다. 나는 늙은 감정이 편안한 사람이었지만 너는 감정이 늙는다는 표현을 저의 사랑에대한 시험이라고 생각했다. 아마 거기서 나는 화가 났을 것이다. 둘 모두 불길이 붙으면 끝이 없는 사람들이라 이후의 물어뜯음으로 시작이 잘 기억이 나지않을뿐, 분명 그 처음의 처음에는 사랑에대한 헛된 정의들이 부딪혔을 것이다.

나는 네가 너무 보고싶은 나머지 내 정의를 부정하는 짓을 한 나를 비웃었다. 그래도 이것은 아니다. 그랬다면 애초에 불이 붙지않았을 것이다. 지켜나가고 지나가야하는 세월이 나는 더 많이 있을 것이라 믿고 너를 기다린다. 다만 마음 한 구석이 불안한 이유는, 사실은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으로 잘어울리기 때문에.

너는 오가며 나를 의식적으로 보지않는다. 나 역시 너와의 마주침을 의식적으로 피하지않는다. 우리는 눈을 마주치고 목례를 하고 일을 한다. 나는 이 모든 것이 익숙해져 일상이 된 것에 일순 두려움을 느꼈다. 원래부터 없었던 것. 내가 그간 바라고 보았던 것들은 어디서 왔을까. 나는 의식의 셔터를 내리고 로라스가 하는 양을 가만히 보았다. 그는, 의식하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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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들어가는 고통에 꿈인 것을 잊었다. 고함과 비명, 귀를 울리는 폭발음이 뇌를 뜨겁게 달궈 피가 말랐다.

굵고 거친 손이 제 팔을 잡아당겨 자신의 뒤로 밀어넣었다. 무지개빛으로 흐려진 세상, 그리고 정적. 기억에 틈이 생겼다.



흙은 바람을 타고 벌어진 입 속으로 밀려들었다. 버석거리고 마르고 비틀어져 입술에선 찝찌름한 피맛이 났고 거친 천이 버석거리며 뺨에 닿았다.

시야는 천천히, 아주 밝게 열렸다. 얇은 눈꺼풀은 사막을 잘도 버텨내어 끈적거리는 것이 속눈썹에 달라붙어 떨어졌다.

몸을 일으켜기 위해 팔을 바닥에 괴자 그제야 이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또 다시 낙하.

빛을 얼핏보았는데. 생각을 쥐고 있을 수 없었다. 모두 잃어버린다. 그저 한 날의 꿈처럼.

잊어버려서는 안되는 것을 자꾸만 잊는다. 나를 나로써 온전히 남기는 사소하고 거대한 것들을 로라스는 잊어버리고 있었다. 끝모를 낙하에서는 제 손조차 볼 수 없어 어디가 바닥이고 어디가 천장인지, 심지어 자신이 정말로 하강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일순 일렁이는 바닥에 발이 닿았다.

빛이 한줄기 떨어졌다. 찰칵. 눈이 부신 스포트라이트의 빛이 비춘다. 그림자 아래에 눈이 부셔 로라스는 눈을 깜박였다. 달칵. 어스름한 푸른 빛이 내려 앉았다. 그곳에 크고 검은 개가 있었다.

개는 로라스을 마주보고 앉아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등을 보였다. 개는 달리기 시작했다. 새벽이라고 부르지도 못할 빛을 가르고 조금더 밝은 곳으로 달음박질쳤다.

문이 있었다. 수 없이 많고 어지러운 문들이 끝을 모를 공간에 덩그러니 세워져있었다.

문들은 제멋대로 열렸다 닫혔다. 개는 그 사이로 부드럽게 뛰어다녔다. 로라스는 그 뒤를 쫓았다. 문이 열릴 때마다 그 건너에는 밝거나 어둡거나 흐리거나 선명한 기억들이 있었다. 개는 그 곳으로 뛰쳐들어가거나 열리는 문을 피해 도망을 쳤다. 그 어지러운 술래잡기 속에서 로라스는 일순 깨달았다. 개를 놓쳤다.

다시 어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어디로 가야하지.’

‘어디에 길이 있을까.’

‘앞으로 걷자.’

‘무언가를 찾자.’

‘그런데 나는 누구지.’

‘여기서 나가야해.’

‘나가야해.’

그런데 내가 왜 나가야하지.

그 때 희미한 연기 냄새가 났다. 향을 태우는 단내. 그 매케하고 안심이 되는 냄새. 눈 앞에 문이 있었다.



문을 열었다.

낯선 것이 서있었다. 그것이 서있는 컴컴한 넓은 돔 안에는 투기장의 기운이 횃불과 함께 일렁이고 있었다. 잠들어 있던 용. 지금 자신의 뒤에는 열 댓명의 조직원이 있었다. 모두는 잘 훈련된 병사들이자 충실한 하인으로 제 목숨을 아까움없이 명령 하나에 바칠 이들이다. 그래서 제임스는 자신이 느끼는 이 압박감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혼자다. 언제나 그랬다.

제임스는 제 바로 뒤의 둘을 집어 내었다. 들어가봐. 턱짓만으로도 지명된 이들은 재게 움직였다. 달려든다.

쒜엑-쾅.

거대한 것이 덤벼들었다. 성공적인 사냥을 자축하는 사슴의 머리. 방금까지 숨을 쉬던 따뜻한 육체가 꼬챙이에 꿰여 벽을 전시했다.

“너는 여전히 멍청하고 비겁한가, 응? 니노.”

남자는 허공에 창을 휘둘러 예를 보였다. 희끗이는 새치가 불타오르듯 반짝이고 번들거리는 두 눈에는 광채가 어렸다. 잊을 수 없었다. 드렉슬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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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갖고 싶다. 당신은 나를 사랑하니 결코 먼 미래의 이야기는 아닐테다. 그럴 것이다.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그만하게.” 하고 뱉어내었다. 어조도 뜻도 없이 그 뜨거운 눈길을 감추는데 급급한 당신으로 내 마음이 조급했기 때문이다. 그랬을 것이다. 그 뒤로 나는 입술을 못살게 굴었다.

내가 당신의 연인이 된다면 새벽녘 헤매듯 도르륵 구르는 눈동자 위로 피로를 잊은 눈꺼풀이 깜박깜박 덮을 때 다시금 그 위의 위로 부드러운 입맞춤을 얹을테다.

내가 당신의 연인이 된다면 이러한 망설임 없이 날 향한 당신의 사랑이 미처 곁에 닿기도 전에 사랑을 속삭일테다.

내가 당신의 연인이 된다면.

내가 당신의 연인이 된다면.

뜨거운 것이 복받쳐 올랐다. 사랑하고 있었다. 그 사랑이 너무 뜨거워 주체할 수가 없어 나는 마냥 때를 기다려야했다. 그는 순간순간이 사랑스러워서 가끔은 무서운 생각들로 온 몸이 저릿해졌다. 이미 너무 많은 생각들로 가득한 몸뚱아리는 작은 흔들림에도 터져나갈 듯이 예민했다. 매일을 적었다. 속을 게워내듯 참아내었던 그 더럽고 추접한 욕망들의 바닥까지 긁어 적었다. 내가 손을 뻗을 수 없으니 자네가 날 감싸안아.

두툼한 종이뭉치를 한장씩 읽어 넘겼다. 그것은 그렇다 할지라도 썩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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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이해하려고 수없이 많은 멍청한 짓을 했다. 적어내린다. 사랑을 적어내린다. 나는 네가 내게 했던 말을 미처 끝마치지 못하고 펜을 내려놓았다. 소리는 한참을 귓가에서 떠나지않는다.

“그만하게.”

생각해내려고 애쓴다. 그 어조와 표정과 몸짓과 무엇 하나 내가 잡아내지 못한 것들. 사랑은 사람을 멍청하게 만든다고 늘 가시돋친 말을 했다. 사실로 내가 다치지않도록 울타리를 만들어 내 두려움을 가두어 놓았다. 너는 그것을 알았을까? 마른 손을 비벼 얼굴에 얹었다. 두껍고 젖은 수건처럼 숨을 누른다. 이런게 내가 하는 짓이다. 나는 늘 내 목을 조른다. 좀 더 상냥할 것을 하고 말이 안되는 소리를 조언이랍시고 한다. 나는 상냥하지않다. 이것은 사실이고. 나는 상냥할리 없다. 이것은 추론이다.

내 머릿속에서 너는 사늘했다가 안쓰러웠다가 동정을 했다가 질타를 했다. 그러니까 결국 이것은 믿을 수 없다. 빠르게 놓고 너에게 묻는 것이 옳음을 알면서도 나는 사랑으로 머리가 젖어 네게 물을 수가 없다. 이것은 뜨거운 바람으로 마르진 않을 것이다. 찬 공기를 쐰다. 손발이 뻣뻣하게 굳고 뺨이 아린 그런 바람을 기다린다. 이곳의 공기는 서늘하고 습기를 머금었으면서도 그런 바람은 불지 않는다. 그러니까 결국 나는 말하지못할 것이다. 너 역시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내뱉어지지 않으면 결국 감정뿐인 것처럼. 그 순간 뿐인 것처럼.

나는 덩그러니 쓰이다 만 글 위에 놓여진 펜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것은 그렇다 할지라도 썩진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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