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tumblr : http://bincannote.tumblr.com twitter : @bincannote Bincan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65)
Faith&Spear (65)
그림 (4)
단편 (24)
그 곳, 벼랑 언저리 즈음 (2)
Novio (8)
짝사랑 (2)
Midnight Blue (23)
D.D (1)
Acto de jura de band.. (0)
미완 (1)
Total
Today
Yesterday

달력

« » 2024.9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최근에 올라온 글

아직 새벽이었다. 해가 들지 않은 푸른 새벽. 낮게 뜬 빛은 어둠을 완전히 물리지못하고 지하까지 스며들지 않았다. 검고 끈적거리는 길을 로라스는 말없이 걸었다. 매끈한 구두 밑창이 질퍽거릴 정도로 덩어리가 찢어져 새어나온 액체들이 고요히 고여있는 요새는 레드카펫처럼 그를 그 끝으로 인도했다.

신선한 비릿내와 차가운 겨울의 공기가 뒤섞여 피부에 도독도독 닭살이 올랐으나 손과 발에 땀이 차고 있었다. 처참한 미술작품을 보듯 로라스는 그가 늘어놓은 것들을 하나하나 스쳐지나갔다. 화려하게 꾸며놓은 지하 돔의 아래는 죽음보다는 삶의 전시에 가까웠으므로 로라스는 그것들을 자세히 쳐다볼 엄두가 나지않았다. 그가 꿈꾸었던 마지막의 온점을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모든 것은 상상에 지나지않았으므로 그것은 그에게 무례한 짓이기도 했다. 드렉슬러는 자신을 기다리겠다고 했다. 그는.

그는 사지를 뻗어 무너진 돔의 그림자 아래 편안하게 누워있었다. 문과는 가장 멀고 하늘의 경계와는 가장 가까운 자리에 누워 별빛을 덮은 듯 꼼짝을 않고 눈을 감았다. 잔뜩 찌그러진 갑주가 어둠속에서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과거를 흉내내는 듯한 우스꽝스러운 몰골로 그는 만족스럽게도 누워있었다. 로라스는 그의 머리 맡에 무릎을 꿇고 그의 헤드기어를 벗겨내었다. 감히 머리를 쓰다듬어 내릴 수 없었다. 늦었군. 낯익은 목소리가 들리는듯해 울컥 울음이 밀려왔다. 나를 기다렸을까. 그는 나를 보내면서 과연 나를 기다렸을까.

“다 끝났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로라스는 서서히 몸을 일으키며 권총을 쥐었다.

“로이드.”

저를 부르는 소리에 로이드는 슬쩍 웃었다.

“그는 죽었나?”

‘탕’

총소리와 함께 로이드가 거꾸러졌다. 왼쪽 허벅지의 중앙에 총알이 꽂히며 대퇴부의 뼈와 부딪혀 그 안의 납이 산산조각났다. 살이 찢어지는 고통에 로이드는 비명을 질렀다. 으악.

“제길, 로라스! 이게 무슨 짓이야!”

피가 솟아오르는 다리를 움켜쥐고 로이드는 절규했다.

“심판이다, 로이드 대령.”

로라스는 그의 이름을 부르며 울 것만 같아 이를 악물어야했다. 그에게 쏟아붓고 싶은 말이 뱃속에서 심장에서 들끓었으나 그는 그럴 가치도 없었으므로 이 고통 역시 로라스 자신이 참아내야했다.

“하! 결국 그를 사랑했나?”

애먼 로이드는 살아남아야했다. 한쪽다리는 이미 늦었다는 직감이 있었다. 하지만 죽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쪽은 완전히 못쓰게 되었으니 잘라내어 버리자. 대신 다른 쪽을 살리면 된다. 로라스는 자신의 복수를 위해서 남을 죽이는 인물이 아니다. 그에게는 평생을 바쳐 지켜온 대의명분이 있으니 사사롭게 자신을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계산이 있었다.

로라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할 수 없었다. 부대원들의 복수도, 드렉슬러의 죽음도 다 제가 책임을 질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므로 해서는 안되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자신에게 화가 났다. 다만 한가지 옳은 일을 하자면 눈 앞의 인물에게 벌을 주어야했다. 비열하고 악랄한 버러지. 제 것이 아닌 목숨으로 저울질을 하여 득을 취한 악독한 인간. 같은 공간에서 숨을 쉰다는 것이 고통이자 저주였다. 그의 목숨을 빼앗을 수 없다는 것이 벌로 느껴질 정도로 로라스는 그를 저주하고 있었다.

로라스는 총을 든 손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마음이 비어 공허해지고 있었다. 사랑으로 부풀어있던 가슴이 가라앉는다. 숨을 다한 새처럼 그는 심장이 고요해짐을 느끼며 문득 궁금해지는 것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에 로이드는 동요했다.

“왜 내가 당신을 죽이지않을거라고 확신하지?”

그러니까, 그는 로이드에게 그런 것을 물어서는 안되었다. 왜 그를 죽였느냐, 왜 이런짓을 했느냐. 그는 좀더 목적성이 뚜렷한 질문을 해야했다. 당황한 나머지 로이드는 더듬더듬 가장 먼저 생각나는 말을 내뱉고 말았다. 아주 어릴 때 그가 배웠던 한가지는 모든 질문은 세번은 뇌를 거쳐야한다는 것이었다.

“너는 그런 인간이니까.”

스스로가 당긴 총구가 불을 뿜었다.

“네게는 아무 것도 없어. 신념도, 명예도, 긍지도!”

‘탕’
‘탕’
‘탕’

모든 탄알이 왼쪽다리의 정중앙에 박혀 다리를 작살내었다. 밀려드는 고통으로 로이드는 결국엔 정신을 잃으며 쓰러졌다. 그 때 로라스의 등 뒤에서 은빛의 칼날이 번쩍였다.

살기도 기척도 없었다. 깊게 베인 오른쪽 팔에서 피가 나고 있었다. 총을 떨어뜨렸고 예리한 고통에 비틀거렸다. 빠르게 자리를 벗어나며 뒤로 물러서자 완전히 뭉개진 얼굴의 사내가 칼을 휘적거리며 흔들리고 있었다. 힘없는 나무인형이 줄에 묶여 춤추듯이 너울거리던 사내는 쓰고있던 헌팅캡을 떨어뜨렸다. 죽은 제임스였다.

로라스는 제임스의 얼굴을 몰랐다. 이 상황도, 남자도 모든 것이 생소하기만 해서 자신이 잠에서 덜 깬 것은 아닌지. 드렉슬러가 말했던 악몽이 이것이 아닌지 생각해야만했다.

남자는 몇 걸음 힘겹게 걷다가 쏟아지듯 자신의 품으로 달려들어왔다. 피가 흐르고 겨우 총을 집어들어 남은 총알을 전부 맞췄을 때 남자는 잠시 멈추는 듯 하다 고개를 꺾고 로라스를 향해 마지막 질주를 하듯 칼을 뻗었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났다. 방 벽을 장식하던 랜스가 죽은 제임스를 꿰뚫으며 벽에 처박혔다.

“뒷통수 조심하는 게 좋을껄.”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Faith&Spear > Midnight Blue'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라드렉/G] Midnight Blue 22  (0) 2018.06.30
[로라드렉/G] Midnight Blue 21  (0) 2018.05.12
[로라드렉/G] Midnight Blue 20  (0) 2018.04.26
[로라드렉/G] Midnight Blue 19  (0) 2016.09.12
[로라드렉/G] Midnight Blue 18  (0) 2016.09.11
Posted by Bincan
, |

눈을 떴을 땐 여전히 회색의 격자가 희미하고 일렁이는 어둠 뿐으로 로라스는 몽롱한 정신에 힘없는 손가락으로 이불을 고쳐덮어 눈을 도로 감고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겁내지말고.’ 공기 중에는 텁텁하고 단내가 옅게 남아있었다. ‘조금 어지럽겠지만.’

그러자 닥쳐오는 불안이 명치에 걸려 복통이 일었다. 아아. 숨이 막혀 소리를 낼 수 없었다. 가슴이 뛰고 몸이 저려왔다. 손가락 하나하나가, 발가락 하나하나가 움츠러들어 뻑뻑했다. 막상 돌아와 눈을 뜨니 괴롭다. 이곳에는 그저 고통과 괴로움 뿐이었다. 겨우 살아있는 이 시간이. 그래서 단 한가지의 생각만이 맹렬했다. 가야할 곳이 있었다.

이불을 젖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로라스는 단숨에 머리 맡의 커텐을 잡아뜯듯 걷었다. 해가 오르는 새벽. 하얀 빛줄기가 하늘과 땅의 경계에서 비집듯, 찌르듯 솟아오르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빛에 이상을 느낀 시야로 속이 울렁거려 게워내고 싶었다. 토기를 참아내고 그는 돌연 벽난로로 성큼성큼 걸음을 걸었다. 그리고 그 떨리는 손으로 부지깽이를 움켜쥐어 힘껏 치켜올렸다.

소리만큼이나 요란하게 유리파편이 튀었다. 강한 힘에 반발하듯이 유리는 그 탄성으로 튀어들어 산발하듯 쏟아져내렸다. 시야는 돌아오지 않았지만 거친 숨으로 들썩이는 하얀 셔츠 위로 핏방울이 떨어졌다. 살아있었다.

조급한 소란 속에서 하수도를 향해 차를 몰았다. 맑지않은 정신으로 지르는 소리에도 고용인들은 많은 질문을 덧대지않았다. 로라스는 휘청거리는 몸을 가눠 차의 뒷자석에 겨우 올라타면서도 한 손에는 총을 단단히 쥐었다. 드렉슬러에게 약속을 받아냈으니 그는 자신을 기다려줄 것이다. 그러니 자신도 그의 기다림에 보답을 하여야했다. 그것이 설사 그가 원한 일이 아닐지라도.

쉽사리 돌아오지않는 뿌연 시야로 방 안의 공기가 망막에, 콧속 점막에, 귓속에, 피부에 빠짐없이 늘러붙어 쫓아오는 기분이 들었다. 자신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아직도 어둠 속에서 헛발질을 하고 있었다. 새벽의 숨을 막을듯 끈적이는 스모그 속에서, 영국의 두려운 밤의 끝에서, 오롯이 붉게 흐르던 상처의 두근거림만이 선명했다. 바라는 대답없이 묻고 싶은 것은 많았다. 간절한 갈망만이 새롭게 솟아나는 샘처럼 가느다란 물줄기로 바위 위의 길을 내고 있었다. 정처 없이 흐르는 마음은 이유도 모르고 한 곳에 고였다. 우스울 정도로 불편한 옷을 입고 흐트러져 반지를 낀 손에는 총을 들었다. 몸에서 나는 열로 차창에 기댄 이마 근처에 김이 서려 퍼져나가는 것을 가만 보며 말을 골랐다.

애원을 하든 협박을 하든 그 검지에 반지를 우겨넣을거야. 나와 같은 위치에 앉혀 나로써 자네가 존재할 수 있도록. 그리고 반지를 하나 더 준비해야지. 자네가 악세사리를 좋아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아. 그래도 무릎을 꿇어 기어코 반지를 끼워넣을 생각이야. 그리곤 자네를 움켜쥐고 섹스를 할 거야. 내게 선물한 악몽에대해 지독하게 캐물어야지. 나도 자네만큼이나 고집쟁이라는걸, 자네도 안다는 걸 알아. 덕분에 듣고 싶은 말들이 많다는 걸 알았어. 모두다 침대 위에서 들을 생각이야. 끊임없이 달라붙어선 원한다고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뤄주겠노라 약속을 하고, 물론 난 그 모든 걸 남자들이 흔히 하는 베겟머리 거짓말 따위로 만들지 않겠지. 그럼 자네는 물기 젖은 눈으로 미래를 약속받기만 하면 돼. 이미 그 날카롭고 섬세한 시선으로 내 마음을 저당잡았으니 내 심장은 자네 것이고. 그래, 이미 자네 것이고. 자네는 고갯짓 한 번, 손짓 한 번으로 날 천국으로, 지옥으로 보낼 수도 있겠지. 키스 한 번으로 내가 여태껏 쌓아올린 모든 것을 이용할 수도 있을 거야. 선물할 수 있는 것들은 죄다 이런 것 뿐이네. 그래도 자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어. 지켜주겠네. 내가 지켜주지. 약속하겠네. 약속할 거야. 그러니.


더러운 스모그의 밤과 갓 태양이 오르기 전까지의 네댓 시간의 틈 사이에는 어둠 속에서만 꿈틀거리는 시체가 있었다. 드렉슬러는 제 품안으로 뛰어든 짧은 나이프를 옆구리로 밀어내고 제임스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갑주에 찢어진 제임스의 뺨에서 제 눈으로 피가 튀었다. 거친 가죽의 장갑으로 눈을 문질렀지만 앞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하나는 다행이다. 나머지 시체는 모두 돌무더기의 아래에, 또는 벽에 걸려있으니. 드렉슬러는 그렇게 생각했다.

노인은 가느다란 실들을 엮어서 남들이 듣지 못하는 이야기를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죽은 것들의 속을 파먹고 빈 껍질을 제 하수인으로 부리는 재주가 있었다. 한 쪽에서는 그런 노인을 신으로 모셨고 한쪽에서는 그런 재능을 역겨워했다. 두려운 능력이었다. 죽은 자가 너울거리며 움직이는 것은 죽음을 모르는 용맹함, 제 신체의 한계를 넘어선 파괴력을 뜻했다. 다행인 것은 노인이 예전같지 않아 갓 죽은 싱싱한 시체를 움직일만큼의 힘이 없어 제 생명력을 갉아 먹으며 남의 몸을 비워내어야 겨우 두엇의 시체를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는 것.

말라비틀어진 손가락은 지금도 허공에서 꿈틀거리며 시체들의 양분을 빼내어 빈껍데기를 만드느라 분주할테지. 그리고 곧 알게 될 것이다. 이 곳에서 자신이 움직일 수 있는 시체는 없다는 걸. 그리고 아직 살아있는 시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드렉슬러는 두 눈을 깜박이며 더 열심히 피를 닦아내려 노력했다. 왼쪽 옆구리에서는 피가 흐르고 총알이 스친 허벅지 역시 상태가 좋지않았다.

제임스는 다시금 나이프를 쥐고 덤벼들었다. 흐릿한 형체에 의지하여 드렉슬러는 나이프를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크아아아아아아-!”

불타는 연장을 맨 손으로 힘껏 쥔 듯한 격통이 있었다. 칼은 더이상 파고들지 않았지만 고통 역시 끝날 것 같지않았다. 드렉슬러는 숨을 크게 들이마셔 순간적으로 참으며 제임스의 복부를 힘껏 걷어찼다. 넘어가는 제임스의 위로 올라타 온 힘을 다해 주먹질을 했다. 얼굴뼈가 으스러지고 제 손 역시 골절이 간 것이 느껴졌지만 솟아오르는 피로 숨이 멎을 때까진 손을 멈출 수 없었다. 고통으로 제임스는 왼손을 들어 드렉슬러의 오른손목을 힘없이 쥐었다.

“결국, 졌어.”

울컥. 피분수가 터져올랐다. 눈을 감지못한 고개가 툭 떨어지자 가늘고 보잘 것 없던 금발이 흙과 피에 엉켜 달빛 아래에서 진흙탕을 뒹군 볏집처럼 보였다.

드렉슬러는 이 모든 것에 온 몸의 기운이 주욱 빠지는 것을 느꼈다. 이 시체 위에 창을 꽂기까지 아직 끝난 것이 아닌데 더이상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대로 쓰러져 누웠다. 세상이 일렁이고 어지러웠다. 어쩌면 저도 피를 너무 많이 흘렸는지 모른다.


차는 돌바닥에 스크래치를 내며 덜컹, 자리에 멈춰섰다. 평소와 다른 것이 없었는데도 로라스는 그 주위가 유난스럽게 조용하다고 느꼈다. 제 머리 위로 포격이 쏟아지기 전, 그 시간이 멈춘듯한 순간이 떠올랐다. 아니다. 이 고요는 그것과는 종류가 달랐다. 그럼? 오소소 소름이 돋기도 전에 손 안에 차가운 식은 땀이 고였다. 찬 땀으로 피부는 끈적하고 시리고 뻣뻣했다. 그래, 이 고요는 어떤 것이었지?

로라스는 좀비처럼 걸었다. 맹목적으로 전진하면서도 제가 어디로 가는지 확신 할 수 없었다. 어디로 가야할지는 정해져있는데도 끝이 보이질 않았다. 비척비척. 발소리가 복도를 공허하게 울렸다.

그가 자신을 지켜달라고 말했을 때, 무엇으로부터 그를 지켜야하는지 로라스는 몰랐다. 단순히 화이트 칙스의 미움을 받고 있으니 조직의 일원으로 그를 받아들이면 모두 다 끝나는 일이라고, 나라에서 그를 지키지 못한다면 그렇게 하면 된다 믿었다. 하지만 그는 제 반지를 거절하고 자신을 목줄 걸린 개 취급을 했으며 종내에는 자세한 설명도 하지 않은채 로라스를 시험했고 보기좋게 밀어내었다. 사실은 제 능력을 믿고 콧대높게 군다고, 오래 살진 못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동시에 그에게 호감을 느꼈다. 제 거둬진 목숨에는 치욕이 덕지덕지 묻어 중요한게 무엇인지 볼 수가 없었다. 그의 명예. 갈증. 열정. 그 모든것에 끌렸음에도 그가 제게 던지는 메세지 하나를 읽지 못했다.

“그래서야, 내가 어떻게 아느냔 말이야.”

복도에는 그의 목소리만이 울렸다.

'Faith&Spear > Midnight Blue'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라드렉/G] Midnight blue 23  (1) 2019.01.27
[로라드렉/G] Midnight Blue 21  (0) 2018.05.12
[로라드렉/G] Midnight Blue 20  (0) 2018.04.26
[로라드렉/G] Midnight Blue 19  (0) 2016.09.12
[로라드렉/G] Midnight Blue 18  (0) 2016.09.11
Posted by Bincan
, |

제임스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제 앞의 인물에게 쏟아부었던 수없이 많은 저주의 말들이 입을 여는 순간 그를 생각하며 보냈던 나날들로 변해 자신에게 그의 존재감이 얼마나 큰지 증명할 뿐일테다. 긴 세월이 지났고 드렉슬러는 돌아왔으며 여전히 빛이 났다. 흉물스럽고 처연한 감정이 가슴을 묵직하게 눌렀다. 그는 여전히 제게 아름다운 괴물이었다. 그것의 죽음 없이는 스스로 존재할 수 없는 공포스럽고 경이로운 괴물.

“맥그리거씨의 명령이다. 투항하고 귀환하도록 해.”

“여전히 너는 내게 인사조차 안하는구나, 니노 보. 이름을 바꿨다지? 그래서 너는 애새끼라는 거야.”

드렉슬러는 일렁이는 불꽃 아래에서 제임스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잔악하고 교활한 얼굴. 지저분한 금발을 어울리지않는 헌팅캡 아래 숨겼지만 비정한 파란 눈까지는 어쩔 수가 없었다. 여전히 저를 신경쓰면서 의미없는 견제를 하고 긴장하여 단단히 굳은 턱을 보았다. 선이 엷다, 꼭 그의 목숨줄처럼.

바람 한 점 없는 돔은 소리가 웅웅 울렸다. 횃불이 타오르는 소리, 핏방울이 웅덩이로 떨어지는 소리가 괴상할 정도로 크게 들렸다.

얇은 긴장. 맥그리거는 능력자들을 구역질나 했다. 스스로가 자신의 능력으로 그 자리에 앉았음에도, 또는 그렇기 때문에 제 아래에 능력있는 것들을 두지 않았다. 이미 그 둘이 쇠꼬챙이에 꿰여 벽의 장식물이 되었다. 기세 좋게 들어가긴 글렀군. 제임스는 입을 뾰족하게 모았다.

“돌아가지 않겠다는 뜻인가?”

“물론.”

“이래봤자 바뀌는 건 없어, 드렉슬러. 맥그리거씨는 생포를 원하셨지만 우리 둘 다 결말을 알고 있지. 너는 운좋게 이번을 이기더라도 결국 네 무덤으로 걸어들어온거야. 끝은 뻔하지않나?”

말을 이어붙일 때마다 불덩어리를 삼킨 듯이 위가 일렁였다. 토하고 싶다. 끊임없이 다 쏟아내고 싶다. 욕구는 제 가장 깊은 곳에서 끓었다. 끝나지 않는 공포로 사지가 떨렸다. 달려들어서 죽이고 싶다. 제임스는 제 마른 입술을 핥고 싶었다. 드렉슬러가 제 앞에 있었기 때문에 하지 않았다. 입술의 움직임에 맞춰 갈라지고 거칠어진 제 살갗이 느껴졌다. 잠시만이라도 모두 적셔서 잊을 수 있다면.

"끝까지 멍청해."

실망을 지나쳐 낙담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넌 그래서 죽는다."

깡-!

쇳덩이가 돌을 내리치는 소리가 살갗을 할퀴었다. 드렉슬러는 창의 끝을 세워 돌바닥에 불꽃을 일으켰다. 사납고 날카로운 소리.

“이곳에서 말이야.”

제임스는 조직원을 뒤로 물려 다시금 문을 닫았다. 쾅. 쾅. 쾅. 문을 향한 거센 발길질에 경첩이 부숴지고 문짝이 뜯겨져 나갔다. 둘이 문을 들고 정면으로 돌진한다.

“죽음을 두려워말라! 우리는 이미 한 번 죽은 몸, 승리를 위해 충성을 다하라! 화이트 칙스에 영광을!”

선창이 있었다. 드렉슬러를 향한 총알이 빗발쳤다. 거리는 고작 40피트. 돌기둥 뒤로 몸을 숨기며 드렉슬러는 눈을 감고 소리를 들었다. 몇 번이고 그려왔던 그림들이다.

“느려!”

기둥 뒤에서 튀어나온 드렉슬러는 순식간에 창을 던졌다. 총알이 갑옷을 때리며 소란이 일었다. 순수한 물리적 에너지가 쏟아진다. 하나의 의도로 수많은 것들이 밀어닥친다. 몸은 휘청이고 살갗이 떨어져나간다. 그 사이로 바람을 가른 창은 성공적으로 문을 쪼개어 폭발시켰다. 섬세한 끝은 부드럽게 문 위에 그려진 하얀 과녁을 파고들어 정중앙을 후빈다. 그것이 뭉그러지면서 철컥 소리가 났다. 하나 였던 것이 틈이 생겨 갈라진다. 폭발. 서늘하게 날이 선 날카로운 조각들이 산발적으로 흩어져 생살을 찢어놓았다.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죽고 또 쓰러진다. 조금 더 안으로. 드렉슬러는 진영이 다시 갖춰지기 전 홀의 사 분의 삼을 가로 질러 다음의 돌기둥 뒤에 몸을 숨겼다. 마지막 한자루의 창을 고쳐쥐었다. 온 몸에 멍이 들겠군. 가까워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나는 이곳에서 살아나간다. 쌓아올린 죽음들 위에서 희열로 고동치는 머리에, 가슴에선 피가 끓었다. 빠르게 도는 혈액으로 온몸은 단단해져 이미 가벼웠다. 나아갈 것이다. 죽어서도 움직일 것들은 망설임이 없을 것이다. 자신이 마주하는 것들은 늘상 그런 끔찍한 것들이어서 드렉슬러는 날개라도 돋을 것 같은 양 어깨를 으쓱하지않을 수 없었다. 저는 그것들과 다를테니까. 앞으로 두발자국. 하나.

핏대가 오른 목을 하늘을 향해 끝까지 뻗어 들었다. 반동으로 몸을 돌려 한 발을 힘차게 굴러 단단히 딛고 쭉 뻗은 팔은 홀의 천장인 돔의 중앙으로 창을 쏘아보냈다.

“수 많은 별을 봐라!”

우르릉. 하늘에 구멍이 났다. 달빛. 흐리고 무수한 별빛들. 자정의 블루가 쏟아져 내렸다. 비, 돌과 철의 비가. 아직 오지 않은 거대한 하늘을 기다리며 드렉슬러는 미리 웃었다. 바로 그 때였다. 제임스가 칼을 빼어들어 드렉슬러의 품으로 뛰어든 것은.

정적.

문 속에는 날이 밝기 전의 가장 어두운 곳과 그 어둠의 끝과 탄생의 순간을 위한 끔찍한 정적이 있었다. 이곳과 저곳을 갈라놓은 의식의 경계를 로라스는 그렇게 개를 따라 넘었다.

새가 지저귀었다. 낡은 방갈로에 딸린 야트막한 부엌에는 흰색 페인트를 칠한 작은 티 테이블과 작은 편지, 낡은 커버의 책이 있었다. 선반에는 조악한 오르골, 금빛의 훈장, 작은 곰인형, 찻잔이 올려져있고, 전등 대신 입구 벽의 모서리에는 가스등이 걸려 있었다. 그러니 익숙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보고 싶었던 그리운 것들. 로라스는 손을 뻗어 그것들을 하나씩 어루만졌다. 모두 잃었다. 개는 끝도 없이 먹어치웠다. 쉬지못한 두뇌가 피로를 호소해도, 채워지지 않을 배를 개는 모든 기억으로 채우려들었다. "메리제인을 만났어?" 의자에 앉은 드렉슬러가 있었다.
그는 부드럽게 웃었다. 가죽책 위에 손을 얹고 다시 나를 끌어 안겠지. 로라스는 드렉슬러의 맞은 편에 앉아 드렉슬러를 마주보았다.

자신은 제 앞의 이것처럼 사랑을 흉내내고 있었다. 사랑하기 때문에 해내야하는 것을 드렉슬러에게서 얻어내기 위해서. 달콤한 것들을 미끼로 던졌다. 드렉슬러의 외로움을 알기에 그랬다. 완벽하게 자신의 상처를 이겨내기 위해서, 자신은 그저 최선을 다한 것 뿐이니 죄책감은 없었다. 그도 나쁠 것은 없었으니까.

그는 쫓기고 있었고 자신은 힘이 있었다. 수문장의 영감마저 자신을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 것을 로라스는 알고 있었다. 필요로 엮인 관계들에 드렉슬러는 자존심을 지키는 대신 순순히 반지를 건네받아 자신을 지켰어야 한다. 그것이 옳다. 죽음 후에는 아무 것도 없음을 신을 믿는 로라스는 알았다. 그는 무언가 숨기고 있었다. 이겨내야하는 것을 품고 보여주지 않았다. 그는 웃고 화내며 자신을 잔뜩 드러내다가 정작 중요한 것은 감추어두고 내어놓지 않았다.

로라스는 손을 뻗어 책 위의 손에 제 손을 겹쳤다. 나는 당신을 지킬 힘이 있어. 왜 반지를 건네 받지 않았나. 그것으로 당신이 내 것이 되면 좋았을텐데. 그랬다면 나는 당신을 지켜줄 수 있었을텐데. 당신은 사랑없이 나를 시험했어. 내게 정말 당신을 지킬 힘이 있는지. 기억 속의 드렉슬러는 전처럼 슬며시 웃는 대신 시선을 낮추었다. 그제야 마음 속에서 모든 것을 잃어버릴 것 같은 불안이 일었다.

아니다. 감춘 것은 자신이다. 중요한 것을 내놓지않고 사랑받기 원했다. 그는 사랑받아야하고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었으므로 저는 그에게 조금씩 젖어들어 사랑하게 되었을 뿐이다. 그러니 너무 많이 원했던 것은 자신이다.

창 밖이 갑자기 어두워지더니 파랗고 커다란 눈이 창으로 들이닥쳤다. 빛 없이 물기만으로 눈은 번들거린다. 와그작거리는 소리와 함께 집이 뜯어져나갔다. 그 골조를 모조리 집어삼키고 개는 다시금 입을 쩍 벌렸다. 그러니까 개는 드렉슬러를 집어삼키려 하고 있었다.

잊어버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 있다면 더 잔인하게 잊게 된다. 로라스는 그 앞을 막아서고 반항했다. 잊고 싶지 않아! 개는 그 소리마저 먹어치웠다. 그를 잊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그다지 달라질 것은 없을것이다. 강하게 열망하는 것은 그와 함께한 기억이 있기 때문이니 다른 것이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중요한 것이 있다면 지금의 로라스가 그를 잊고 싶어하지않는다는 것이다. 그와 함께 있고 싶다는 단순한 열망. 사랑이었다.

또다시 정적.

먹먹한 어둠에서 개는 저를 바라보았다. 아리고 다정한 무의식이 저를 바라보았다.

"일어나야 해."

소리가 났다. 개는 제가 삼켰던 것들을 울컥울컥 토해내고는 서서히 다가오는 새벽으로 걸어나갔다.

'Faith&Spear > Midnight Blue'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라드렉/G] Midnight blue 23  (1) 2019.01.27
[로라드렉/G] Midnight Blue 22  (0) 2018.06.30
[로라드렉/G] Midnight Blue 20  (0) 2018.04.26
[로라드렉/G] Midnight Blue 19  (0) 2016.09.12
[로라드렉/G] Midnight Blue 18  (0) 2016.09.11
Posted by Bincan
, |

타들어가는 고통에 꿈인 것을 잊었다. 고함과 비명, 귀를 울리는 폭발음이 뇌를 뜨겁게 달궈 피가 말랐다.

굵고 거친 손이 제 팔을 잡아당겨 자신의 뒤로 밀어넣었다. 무지개빛으로 흐려진 세상, 그리고 정적. 기억에 틈이 생겼다.



흙은 바람을 타고 벌어진 입 속으로 밀려들었다. 버석거리고 마르고 비틀어져 입술에선 찝찌름한 피맛이 났고 거친 천이 버석거리며 뺨에 닿았다.

시야는 천천히, 아주 밝게 열렸다. 얇은 눈꺼풀은 사막을 잘도 버텨내어 끈적거리는 것이 속눈썹에 달라붙어 떨어졌다.

몸을 일으켜기 위해 팔을 바닥에 괴자 그제야 이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또 다시 낙하.

빛을 얼핏보았는데. 생각을 쥐고 있을 수 없었다. 모두 잃어버린다. 그저 한 날의 꿈처럼.

잊어버려서는 안되는 것을 자꾸만 잊는다. 나를 나로써 온전히 남기는 사소하고 거대한 것들을 로라스는 잊어버리고 있었다. 끝모를 낙하에서는 제 손조차 볼 수 없어 어디가 바닥이고 어디가 천장인지, 심지어 자신이 정말로 하강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일순 일렁이는 바닥에 발이 닿았다.

빛이 한줄기 떨어졌다. 찰칵. 눈이 부신 스포트라이트의 빛이 비춘다. 그림자 아래에 눈이 부셔 로라스는 눈을 깜박였다. 달칵. 어스름한 푸른 빛이 내려 앉았다. 그곳에 크고 검은 개가 있었다.

개는 로라스을 마주보고 앉아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등을 보였다. 개는 달리기 시작했다. 새벽이라고 부르지도 못할 빛을 가르고 조금더 밝은 곳으로 달음박질쳤다.

문이 있었다. 수 없이 많고 어지러운 문들이 끝을 모를 공간에 덩그러니 세워져있었다.

문들은 제멋대로 열렸다 닫혔다. 개는 그 사이로 부드럽게 뛰어다녔다. 로라스는 그 뒤를 쫓았다. 문이 열릴 때마다 그 건너에는 밝거나 어둡거나 흐리거나 선명한 기억들이 있었다. 개는 그 곳으로 뛰쳐들어가거나 열리는 문을 피해 도망을 쳤다. 그 어지러운 술래잡기 속에서 로라스는 일순 깨달았다. 개를 놓쳤다.

다시 어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어디로 가야하지.’

‘어디에 길이 있을까.’

‘앞으로 걷자.’

‘무언가를 찾자.’

‘그런데 나는 누구지.’

‘여기서 나가야해.’

‘나가야해.’

그런데 내가 왜 나가야하지.

그 때 희미한 연기 냄새가 났다. 향을 태우는 단내. 그 매케하고 안심이 되는 냄새. 눈 앞에 문이 있었다.



문을 열었다.

낯선 것이 서있었다. 그것이 서있는 컴컴한 넓은 돔 안에는 투기장의 기운이 횃불과 함께 일렁이고 있었다. 잠들어 있던 용. 지금 자신의 뒤에는 열 댓명의 조직원이 있었다. 모두는 잘 훈련된 병사들이자 충실한 하인으로 제 목숨을 아까움없이 명령 하나에 바칠 이들이다. 그래서 제임스는 자신이 느끼는 이 압박감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혼자다. 언제나 그랬다.

제임스는 제 바로 뒤의 둘을 집어 내었다. 들어가봐. 턱짓만으로도 지명된 이들은 재게 움직였다. 달려든다.

쒜엑-쾅.

거대한 것이 덤벼들었다. 성공적인 사냥을 자축하는 사슴의 머리. 방금까지 숨을 쉬던 따뜻한 육체가 꼬챙이에 꿰여 벽을 전시했다.

“너는 여전히 멍청하고 비겁한가, 응? 니노.”

남자는 허공에 창을 휘둘러 예를 보였다. 희끗이는 새치가 불타오르듯 반짝이고 번들거리는 두 눈에는 광채가 어렸다. 잊을 수 없었다. 드렉슬러였다.

'Faith&Spear > Midnight Blue'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라드렉/G] Midnight Blue 22  (0) 2018.06.30
[로라드렉/G] Midnight Blue 21  (0) 2018.05.12
[로라드렉/G] Midnight Blue 19  (0) 2016.09.12
[로라드렉/G] Midnight Blue 18  (0) 2016.09.11
[로라드렉/G] Midnight Blue 17  (0) 2016.03.14
Posted by Bincan
, |
 골목의 약국은 늦게까지 문을 열었다. 부지런한 주인은 새벽 같이 일어나 가게 앞을 쓸고 물을 부어 무언가를 쓸어내는데 익숙했다. 밤 늦은 시간의 손님과 실과 바늘, 소독약의 알싸한 냄새는 마치 친구 같았고 비명소리, 탄 냄새, 부서진 뼈를 움직이지않게 고정시키는 것은 너무 익숙한 나머지 다음 날이 되면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러나 한 발 이상의 총성은 오랜만의 것이었다. 드문 드문 이어지는 고요는 뱃속의 이질감으로 고여 묵직하게 남았다.

 날이 저물고 날벌레가 타닥타닥 타들어갈 무렵, 바닥에 무거운 것이 질질 끌리는 소리가 났다. 잔돌이 섬유에 박혀 바닥의 커다란 벽돌을 득득 긁는 무거운 소리. 그러나 발소리는 들리지않았다. 약사는 서랍을 열어 권총을 꺼내 책상 아래로 단단히 쥐었다.

 끌리는 소리가 약국의 문 앞 계단에서 멎었다. 곧이어 실낱 같은 소리가 오래 된 나무문의 틈 사이를 비집었다. 소리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약사는 침을 삼켰다.

 "…누구시오."

 또 한 번 작은 소리가 기어들었다. 약사는 총을 그대로 들어 잠금장치를 풀고 문 바로 옆의 벽에 몸을 숨겼다.

 "누구냐니까!"

 질러 낸 고함으로 귀가 울렸다. 타닥타닥. 날벌레 타는 소리가 이어지고 침묵이 가라앉았다. 조금 더 큰소리가 물에 잔뜩 젖어 울렸다.

 "…선, 생님."

 터지는 탁성에 약사는 힘껏 문을 열어젖혔다. 그러자 오물이 잔뜩 묻은 익숙한 남자가 가장 아래의 돌계단 하나에 걸쳐져 누워있었다.

 "오, 토마스…! 이게…이게 대체…!"

 약사는 총을 선반에 내려놓고 단숨에 계단을 뛰어내렸다.

 피투성이의 토마스는 계단에 기대어 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다리도 팔도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금발의 남자는 도망치는 제 팔뚝에 한 발, 옆구리에 한 발을 박아넣었다. 타들어가는 듯한 뜨거움에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숨이 막힐 때까지 골목을 달리다 하수도의 흙탕물과 오물더미에 몸을 숨기고 이곳까지 기어 도망쳤다. 겨우, 목숨만을 건졌다.

 "선생님…리처드가, 리처드가 죽었어요…"

 울먹임에 무언가가 잔뜩 섞인 침이 튀었다. 토마스는 힘 없이 늘어져 약국 안으로 옮겨지면서도 꺽꺽대며 필사적으로 말을 이었다.

 "듣고 있, 어요? 내가, 내가 봤어요. 벽에…기대어 있었어요…."

 약사는 수도를 틀어 오물을 씻어내기 시작했다. 물소리에 묻혀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얼마나 상처가 깊은지도, 감염 여부도, 심지어 오물로 인해 상처의 위치도 모르는 시각을 다투는 상황에서 토마스가 떠들어대는 소리는 저에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시체는 치료할 수 없으니 이런 이야기는 지금 들어봤자 의미가 없지않은가. 약사는 곧 팔의 출혈을 발견하고 옷을 벗겨 붕대로 상처 위의 팔뚝을 단단히 묶었다. 소독약을 붓자 끔찍한 비명이 터졌다.

 "토마스, 나 여깄네. 여긴 약국이야. 정신을 잃지 않게 집중해. 지금 오물 때문에 상처가 정확히 어딘지 알 수가 없,"
 
 "리…처드가 죽었어요, 선생, 님…! 화이…화이트 칙슷….다 그 놈,들 짓이에요…"

 토마스는 가슴 위를 세워 이제 거의 고함을 지르듯이 핏대를 세웠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에 눈이 터져나올 듯이 붉어지자 약사는 침착함을 잃고 결국 언성을 높혔다.

 "감염이 돼 썩어들어가면 죽을 수도 있어! 다친 곳이나 말해!"

 토마스는 얼이 나간듯 보였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 눈물조차 말라버린 멍청한 눈으로 아무 말도,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제게 화난 얼굴이 두 눈 가득 들어차자 지금까지의 발악은 온데간데 없이 온 몸의 힘이 풀렸다. 토마스는 바로 누워 허망한 얼굴로 웃다가 "네, 선생님. 왼쪽 팔, 오른,쪽 옆구리를 맞았어요." 라고 답했다. 약사는 재게 움직였고 이어 토마스는 시체처럼 늘어져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문양이,"

 "그 더럽고 거대한, 문양이요. 리처드의 이마에 새겨진, 그 죄인의 낙인이요…."

 토마스는 울고 있었다.

 "그, 사람은요. 이제, 그 사람은요."



-


 지하도는 습하고 비린내가 났다. 공기는 탁하고 더러워 숨을 쉴 때마다 매캐한 연기를 들이마시는 듯한 착각이 들었고, 바닥은 이끼로 미끄러워 정장구두 밑창이 자꾸만 미끄러져 불쾌했다. 로이드는 발끝만을 내밀어 이끼 낀 돌바닥을 한 번 문질러보고는 다시 그것을 맨땅에 문질러 닦았다.

 "로이드. 결국 여기까지 왔군."

 "맥그리거씨가 훈계까지 시키시던가."

 제임스는 입술을 비틀었다. 듣는 이가 있건 없건 작업 도중에는 절대 본명을 부르지 말 것. 언제부터인가 둘은 이 세계의 가장 기본적인 룰조차 따르지 않고 있었다. 부서진 규칙은 의미가 없다. 그 의미 없는 규칙에 세워진 왕국은 힘없이 무너진다. 둘은 사람 좋은 미소를 띄우고 마주 웃었다.

 "곧 차가 도착할 거야. 우리 애들이니 겁먹지 말고 갈 길 가면 돼."

 "걱정이 너무 과한 것 아닌가? 상대는 겨우 한 명인데."

 "조심해서 나쁠 것없지."

 "비겁하군."

 "마치 당신처럼."

 둘은 악수를 나눴다.

 "나는 자네가 고꾸라지는 걸 보고싶어, 로이드. 자넨 성공한 사람치고도 아주 뒤가 구린 사람이잖아."

 "지금이 그런 시대 아닌가. 나야 땅에 떨어진 기회를 주웠을 뿐이야. 그리고 다른 이들은 이런 내 위치를 아주 부러워한다네. 부러워하다못해 시기, 질투를 하지. 자네를 좀 보게!"

 로이드는 가볍게 손뼉을 쳐 양 팔을 벌리고 입꼬리를 더 끌어당기며 덧붙였다.

 "평생 뒷처리 신세라니, 정말 안됐군!"


-


 끝없는 낙하가 계속된다고 생각했다. 바닥이 없었고 잡히는 게 없었으니 그저 떨어지고 있다고. 그러다 어느 순간 로라스는 제가 땅에 발을 딛고 서있다는 걸 깨달았다.

 풍경이 낯이 익었다. 드문드문 흙집이 지어진 넓은 황야에는 모래 섞인 바람이 불고 풀도 나무도 바싹 말라 죽어있었다. 순간. 소름끼치는 소리가 났다. 완전히 바스라지지 않은 나무에 겨우 매달린 그네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익숙하다. 모든 것이 익숙하다.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로라스는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황급히 제 모습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뒤에서 두런두런 익숙한 목소리가 난다. 모든 것이 확실해졌다. 이곳은 과거의 전장이다.

 씻을 수 없는 과오, 치욕스러울 정도로 멍청했던 과거의 자신. 휘두르면 휘두르는대로 움직이는, 성능 좋은 꼭두각시 같았던 제 부대는 결국 최전방으로 밀려나 돌격명령을 받게 되었다. 군인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거는 것. 소중한 것을 지켜내는 것을 숙명으로 받아들여야하는 위험하지만 명예로운 직업. 그리고 이것은 명령이니까. 텅 빈 마을이라고 생각했던 곳에서 적의 폭격을 받았을 때, 로라스는 그제야 제가 얼마나 멍청했는지를 깨달았다. 자신들은 고작해야 체스의 말에 불과한 것을.

 로라스는 혼자 살아남았다. 능력자로 구성된 제 부대의 부대원이 자신의 목숨을 마지막으로 건 대상이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은 무엇을 했나. 침상에서 일어나 공로훈장을 받고 진급하여 그 길로 군인을 그만두고 다시 아버지의 뒤를 이었다.

 다시는 이런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자신은 또 한 번 그 지옥으로 걸어들어가고 있었다. 로라스는 모든 것에 한 가운데에 있으면서도 멀리서 모든 것을 지켜보는듯한 기분 역시 동시에 느꼈다. 일이 어떻게 될지 알기 때문에 일은 또 한 번 그렇게 되고 있었다. 그는 이 상황의 주체이면서 또 동시에 관람객이기도 했다. 그렇게 단 세걸음만에 깨달은 것은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절망적인 사실이었다.

 다만 기시감이 들었다. 이 곳은 한 때는 제가 무언가 바꿀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죄책감으로 고개조차 들지 못했던, 그렇게 몇 번이나 보아왔던 광경이다. 정말이지 그간에도 수차례 꾸었던 악몽인데, 몇 번이나 도망쳤던 전장인데. 이상했다. 모든 상황이 익숙하면서도 낯설고 그렇게 될 일이면서도 부자연스러웠다. '제 발로 미끼가 되려 걸어가는 것을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다니.' 로라스는 탄식했다.

 미끼.

 그렇다면 무엇을 위한 미끼였나. 우리는 적군의 모습을 드러내기 위한 미끼였다. 아니, 아니. 좀 더 근본적인 것. 우리는 무엇을 위해 미끼가 되었나. 전쟁의 승리? 대를 위한 소의 희생? 이것은 그렇게 거창하고 위대한 작전이 아니었다. 오히려 천대받는 이들을 미끼로 쓰고자 한 아주 비열하고 더러운 부류의 것이었다. 그래서 누가 가장 큰 이익을 얻었지? 누가 우리를 내몰았는가?

 '수고했네. 고생이 많았어.'

 훈장은 하나가 아니었다. 파란 제복. 악수. 부드럽게 웃는 얇은 입술. 떠오르는 이름이 있었다.

 뜨겁게 타오르는 머리로 이가 악물리고 얼굴 근육이 경련했다. 퍼런 핏줄 속 붉은 피가 두근거려 눈물이 터져나왔다. 떨리는 입술, 흔들리는 시선과는 상관없이 쿵, 큰 소리와 지진이 났다. 붉은 불덩어리가 머리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폭격이 시작되었다.


'Faith&Spear > Midnight Blue'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라드렉/G] Midnight Blue 21  (0) 2018.05.12
[로라드렉/G] Midnight Blue 20  (0) 2018.04.26
[로라드렉/G] Midnight Blue 18  (0) 2016.09.11
[로라드렉/G] Midnight Blue 17  (0) 2016.03.14
[로라드렉/G] Midnight Blue 16  (0) 2016.01.11
Posted by Bincan
, |
오후의 총성으로 거리의 시간이 멎었다. 바람 한 점 없이 총구가 흔들렸고, 시작된 저녁의 찬 공기에도 이마를 타고 식은 땀이 흘러내렸다.







 땀은 리볼버를 움켜쥔 손 안에도 가득 차 미끌거렸다. 단 한 번 총을 쐈을 뿐이다. 술에 취한 늙은 몸은 이 반동조차 힘에 겨워 했다. 온 몸이 크게 흔들려 근육이 뻣뻣해지면서 살이 아리고 저렸다. 충격을 버티느라 딱딱해진 양 팔과 두 다리는 그렇게 리처드를 땅바닥에 주저앉혔다.



 잔경련은 성가셨다. 그 커다란 떨림이 잘게, 더 잘게 쪼개져 온 몸으로 질병처럼 퍼지고 휘어도는 감각 속에서 인중과 입술, 눈 아래에 하얗고 통통한 구더기가 기어다니는 느낌이 몽롱하게 퍼졌다. 리처드는 리볼버의 총구를 애써 고쳐쥐고 도드라진 손바닥의 살만으로 콧수염을 문질렀다. 콧수염이 땀으로 축축해졌다.







 태양을 등진 금발의 남자는 낯이 익었다. 서글픈 인상의 순한 얼굴. 살기 그득한 눈동자와 얇고 희미한 입술선. 그간 보지 못했으나 잊을 수 없는 인상과 그 어린 아이의 잔혹함이 성인이 되며 굳어진 얼굴선과 건장한 골격 속에 고스란히 살아있었다. 이 녀석도 과거의 망령이로구나. 리처드는 허탈한 숨을 내쉬었다.







"니노, 이 멍청한 새끼."







리처드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오랜만이야, 리처드."







제임스는 그가 자신을 기억한다는 사실이 우스운양 짐짓 입술을 비틀어 웃으며 덧붙였다.




"지독하게 똑같은 얼굴이군."





 똑같은. 그 말이 우스웠다. 리처드는 잠시 뻣뻣하게 굳었다가 목젖까지 내보이며 껄껄 웃었다. 뱉어내는 웃음으로 침이 흘러내리고 시야가 흐려지며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남말을 하는구나."


리처드가 총을 향해 얼굴을 내밀어 소맷부리로 침을 닦으며 말했다.


"이제 그만 하지. 숨겨주는 일도, 또 도망치는 것도."


 제임스는 입을 다물며 총을 꺼내 리처드를 겨눴다. 석양의 붉은 빛이 서서히 들어올려진 은색의 매끈한 쇳덩이를 비추고, 순간 그 번쩍임에 눈이 부셔 리처드는 눈쌀을 찌푸렸다.


 "나는 아무것도 몰라. 마치 너처럼. 하기야, 너야 항상 그랬지. 네 부모에게도,"


 리처드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무언가 떠오른 듯이 덧붙였다.


 "또 내 동생에게도."


 익숙한 미소 끝에 경련이 일었다. 과거는 파도처럼 급작스럽게 밀려들었다. 제임스는 제 손안에, 또 등 뒤에 솟아난 땀방울을 느낄 수 있었다.


"난 더이상 어린애가 아니야."


 다부지지 못한 목소리가 튀어올랐다. 소리는 처음도 끝도 흐리기만 했다. 자신은 어린아이가 아닌가. 더이상, 정말로?



탕-!



흔들리는 총구는 또 한 번 제임스의 근처도 향하지 못했다. 총에 맞은 흙벽에서 먼지가 날려 리차드의 얼굴로 그늘이 졌다.



"젠장."



제임스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난 늙었어. 이렇게 네 녀석이 코앞에 있는데도 맞추지 못할 만큼. 세월은 누구에게나 흐르지. 그래서, 넌. 얼마나 자랐나, 니노."



 더이상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리처드는 온화한 미소를 띄운 채 총 머리판을 제 불룩 나온 배에 걸쳐 놓았다.


 제임스는 제 다리가 땅에 붙어버렸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빛이 바란 나머지 멈춰버렸다고 느꼈다. 제 앞의 총구는 간신히 정면을 보고 있을 뿐이었고 다 늙고 지쳐 술에 찌든 노인이 가누지 못하는 팔로 제대로 쓰지도 못하는 총을 움켜쥐고 있을 뿐이었다. 늙은이. 오래된 늙은이. 그러나 끝을 낼 수 없었다. 노인의 눈 그늘 아래엔 여전히 빛이 번쩍였다. 밝은 곳에서조차 빛 바랜 사기그릇 같을 것이 분명한 눈이, 그 뱁새처럼 조그맣고 멍청할 눈이 마지막까지 빛나고 있었다. 그것이 저를 놓아주지않았다.




 방아쇠를 당겼다.

'Faith&Spear > Midnight Blue'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라드렉/G] Midnight Blue 20  (0) 2018.04.26
[로라드렉/G] Midnight Blue 19  (0) 2016.09.12
[로라드렉/G] Midnight Blue 17  (0) 2016.03.14
[로라드렉/G] Midnight Blue 16  (0) 2016.01.11
[로라드렉/G] Midnight Blue 15  (0) 2015.12.14
Posted by Bincan
, |
만약 지옥이 있다면 그 곳은 아마 제가 있는 곳일 것이다. 제임스는 늘 그런 생각을 했다. 저는 악의 화신이요, 불운의 상징이니 욕심으로 모든 걸 그르치고 제 인생의 고삐마저 쥐지 못한 헬리오스의 아들 파에톤처럼 업화의 불꽃에 타죽을 것이다. 아니, 저는 신의 아들은 커녕 가장 저열하고 천박한 자의 다리 사이에서 빛을 보아 그의 아들처럼 피부가 불에 그을려 탈새도 없이 녹아사라질테지.





제임스는 손을 꾹 쥐었다 다시 폈다. 아무것도 없었다. 늘 욕심을 내도 정작 원하는 것은 가질 수가 없었다.





언제나 제 뒤는 실이 쫓아다녔다. 신뢰, 기대 같은 것들을 노인은 절대 사람에게 거는 법이 없었다. 그는 사람을 세상에서 가장 구역질나고 지저분한 생명체로 분류했다. 손은 깡말라 살가죽 아래로 뼈가 고스란히 도드라졌다. 미라처럼 바싹 마른 손가락 사이 사이, 실은 얼기설기 엉켜 복잡한 그물 모양을 만들었다. 그는 마치 사람보다는 거미나 지네 같았다. 곤충도 아닌 벌레. 그 자체로 조금은 거부감이 드는 것들. 침대 위에서 탁해진 눈으로 노인은 세상을 잘도 보았다. 그는 그 위에서 여전히 사람을 죽였고 체스를 두듯 말을 움직였으며 원하는 것이라면 언제나 제 손아귀에 잡아두려했다. 욕심 많은 늙은이. 지는 노을 아래서 제임스는 괜시리 구둣발을 땅에 비볐다. 갈 시간이 되었다.





커튼을 치는 소리가 둔탁하여 거슬렸다. 가스등이 희미하게 빛을 냈고 이것을 끄면 어둠이다. 로라스는 침대에 걸터 앉아 부싯돌을 쥐었다. 옷도 갈아입지 못한 채다. 그러나 부싯돌은 한참을 향 위에서 헛돌고 있었다. 무언가 잊어버린듯 제 머릿속 또는 마음 한 구석이 비어서, 또는 그 빈 공간이 공허한만큼 향 끄트머리의 공간엔 공기가 없는 것도 같았다.





앞으로 10분. 혹은 9분 17초. 혹은 8분 그리고 45초. 째깍째깍, 커튼까지 꽁꽁 싸맨 방은 시계소리와 제가 부딪히는 부싯돌 소리로 가득 찼다. 제대로 되지 않는 것은 제 두려움 때문인가, 아니면 그렇게 될 일이기 때문인가. 로라스는 잠시 부싯돌을 내려놓고 땀이 가득찬 손을 쥐었다 펴보았다.성공하면 살고 실패하면 죽는다. 그러나 그것이 마음에 걸리는 것은 아니었다. 도박으로 대령으로부터 15일의 연장을 거부한 만큼, 약은 분명 성공할 것이다. 겨우 보름전에 만난 남자를 로라스는 무한히 신뢰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조차 제 신뢰가 어디서 온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대령으로부터 전해들은 그의 과거 때문인지, 스스로를 몰아붙여 결국엔 제 코끝에 몰약 냄새를 남겼기 때문인지.





드렉슬러는 늘 긴장을 하고 있었다. 피곤한 몰골로 이성이 제 머리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 탓에 몇마디 말이 나오면, 그는 늘 후회하듯 입을 꾹 물었다. 거의 자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 때는 분명 옅게나마 잠들어있었어. 그 때의 바지천 아래로 느껴졌던 허벅지의 온기와 그 단단함, 저를 감싸고 있던 손, 코 끝을 맴돌다 드디어 들이쉬게 된 그 따뜻한 겨울의 냄새. 부싯돌이 부딪히고 향에 불이 붙었다.





-





날이 저문다. 붉은 해의 꼬리가 길고 저는 이미 삶에 미련이 없었다. Padre. Padre. 리처드는 그 날의 일들을 이 단어와 함께 주워 섬겼다. 마지막 태양 아래에서의 웃음을 기억한다. 떠나는 뒷모습을 보지 못했는데도 제 곁으로 날아든 새에게 안락한 새장은 의미가 없었다. 그렇게 믿었다. 리처드는 결국 반지의 알을 돌렸다.





-







로라스는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회색의 뿌연 연기에서는 지하에서의 냄새가 고스란히 났다.







-



아무래도 리처드가 이상했다. 토마스는 제 방에 우두커니 앉아 내내 그 생각을 했다. 리차드는 언제나 침착하고 냉정한 사람이다. 그가 이상해질 때면 그곳엔 언제나 드렉슬러가 있었다. 이번의 그는 이상하다기보단 미친 사람처럼 굴었다. 필히 일이 생긴 것이다. 그것은 확실했다.



토마스는 자켓을 다시 걸치고 목도리를 둘러맸다. 약국에서 술이 깨는 약을 사다가 다시 얘기를 시작해볼 참이다. 꼭 드렉슬러 때문이 아니더라도 리처드는 영국에 와서 가장 오래 알고지낸 친구이기도 하다. 이렇게 그를 방치할 수는 없지않은가? 그렇게 알 수가 없는 불길함이 엄습했다. 오늘은 노을이 붉고 기네. 이 때문일지도 몰라. 토마스는 약봉지를 고쳐쥐며 중얼거렸다.



-



연기가 가시질 않고 어느 새인가 어둠 뿐인 공간에서 희미하게 눈 앞이 보였다. 꿈 없이 깊이 잠든 걸까. 그는 성공한 건가. 로라스는 제 손을 쭉 뻗어 손바닥을 이리저리 뒤집어보았다. 무언가 달라진 것은 없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몸을 일으켰고 침대에서 발을 내렸다. 바닥이 없었다.



낙하.



비정상적인 근육의 움직임.



떨어짐.



발 아래의 깊은 어둠은 중력만이 남아 몸을 빨아들였다.



-



"탕-!"



총소리가 났다.

'Faith&Spear > Midnight Blue'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라드렉/G] Midnight Blue 19  (0) 2016.09.12
[로라드렉/G] Midnight Blue 18  (0) 2016.09.11
[로라드렉/G] Midnight Blue 16  (0) 2016.01.11
[로라드렉/G] Midnight Blue 15  (0) 2015.12.14
[로라드렉/G] Midnight Blue 14  (0) 2015.10.19
Posted by Bincan
, |

 

그 날 오전의 일이다. 드렉슬러가 다녀간 날 이후로 리처드는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음식에 넣는 주류점의 제일 싼 와인부터 아껴놓았던 최고급 양주에 이르기까지 가게 내의 술을 모두 동 낼 기세로 그는 눈을 뜨면 술부터 찾았다.


그만 좀 드세요.”


보다못한 토마스가 한마디 하자 리처드는 눈을 부릅뜨고 술방울 맺힌 콧수염을 덜덜 떨었다. 마셔도 마셔도 술이 부족했다. 그러니까, 잊을 만큼은 아니었다. 저는 아무리 알코올을 들이부어도 정신하나만큼은 멀쩡했다. 아마 이것은 녀석도 그럴 것이다. 아니, 녀석은 스스로가 맨정신이 아니기를 절대 원하지 않을 것이다.


니미.”


리처드는 나무잔을 테이블에 강하게 내리쳤다. 손이 징징 울리는 것이 취기로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몽롱한 기운에 더 화가 치밀었다. 그는 그렇게 몇 번이나 나무잔을 휘두르다가 돌벽에 잔을 집어던졌다. 결국 잔은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결대로 박살이 나 버렸다.


그 소란에 토마스는 잠시 움츠러들었다가 가게 한 켠의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챙겨 바닥을 쓸었다. 리처드는 일주일 전부터 평소대로 물건을 주문하지도, 손님을 받지도, 일을 알선하지도 않고 있었다. 처음 며칠간은 제대로 자질 못하는 것 같더니 삼일 전부터는 음식도 입에 대지 않고 오롯이 술뿐이다. 토마스는 한숨을 쉬었다.


도대체 왜 이러시는데요. 요 전부터 계속 술만 드시잖아요.”


리처드는 그 다정한 어조에 심술맞은 늙은이마냥 콧잔등을 끌어올려 얼굴을 찌푸렸다. 콧방울을 실룩거릴 때마다 붉은 뺨 위로 검버섯과 주름이 꿈틀거렸다. 거친 숨 사이로 술냄새가 지독히도 났다.


노망이 났나보지.”


리처드는 제 풀에 지쳐 구석지의 바 의자에 올라앉았다. 높은 의자로 다리가 덜렁거리자 주먹으로 무릎을 몇 번 내리쳤다. 당연한 듯이 통증이 둔했다.


부서진 파편을 나무상자에 담아넣고 토마스는 리처드의 옆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항상 굳건해보이던 노인은 정말로 노인이 되어 왜소하고 힘 없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이 보였다. 세월을 쥐어온 거친 손이 옹골차게 주먹을 쥐고 무릎 위에서 떨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거죠?”


토마스는 제 허벅지에 가슴팍을 꼭 붙인채 그 사이로 고개를 밀어넣어 몸을 웅크렸다. 피가 머리로 몰렸고 시야가 어둑해졌다.


그 사람, 이상해요.”


머뭇대듯 느릿느릿 흘러나오는 말에 리처드가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그간 안 하던 짓을 해요. 그 남자 때문일까요?”


그간의 피곤으로 눈꺼풀이 느리게 움직였다.


지랄은.”


리처드가 말했다.


그런가요.”


토마스가 말했다.


녀석이 좋으냐.”


리처드의 말에 토마스의 입가에 미소가 잔잔히 떠올랐다.


. 무척요.”


리처드는 토마스를 힘껏 떠밀었다. 외다리 의자가 휘떡거렸고 토마스는 그만 바닥에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미친놈.”


리처드는 말을 씹어뱉었다.


미친놈! 미친놈!”


소리는 경멸이 어려 쩌렁쩌렁 가게 안을 울렸다. 넘어질 때의 큰 진동으로 외등이 좌우로 흔들거려 이 때마다 리처드의 얼굴이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했는데, 이것이 마치 그가 꼭 지옥에서 걸어나온 사자같이 보이게 했다.


녀석은 독이야! 너같이 약한 놈은 단숨에 죽어버리는! 네 놈한테선 풋내가 나. 덜 여물어 나는 비린 냄새 말이다. 이 멍청이. 멍청한 녀석. 너같은 놈이랑 같이 있는데 대체 나보고 어떻게 제정신으로 있으란 말이냐!”


한참을 씩씩거리다 폭발하듯 터져나온 말에 토마스는 그것이 무슨 뜻이냐 묻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일에 어리둥절하여 벗겨진 안경을 겨우 고쳐썼을 뿐이다.


돌연 리처드는 빗자루를 들고 돌아와 토마스를 내려치기 시작했다. 치매! 내가 치매가 왔다! 난감해하며 왜이러시느냐 반복해 묻는 그 억울한 목소리에 리처드는 벌건 눈을 하고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나가라! 나가라!”


결국 토마스는 매타작에 쫓겨 문 밖을 나섰다. 눈 앞에서 문이 쾅 닫혔다.


나중에 다시 올게요! 술 그만 드시고요!”


벌게진 팔뚝과 잘못 맞아 피가 나는 이마를 닦으며 토마스는 그렇게 말했다.


이 멍청한 놈아! 다신 오지마!”


대꾸는 고약했다.


리처드는 문틈새로 토마스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마지막까지 머뭇거리다 한참이 지나서야 발을 뗀다. 미련한 녀석. 내일까지는 아마 오지 않을테다. 그럼 그것으로 됐다. 그는 테이블 위의 와인병을 들어 병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


. 불안은 형체가 없었다. 이제는 살을 저미던 찬바람이 누그러들고 호수의 얼음이 더이상 단단하지 않듯이 어쩌면 곧 내일 다시 봄일 것이다. 제 목숨값인 해는 점점 이르게 뜬다. 각오한 죽음으로 그의 곁에서 눈을 감는다면 저는 행복할지도 몰랐다. 사실 로라스는 오늘 그 지하의 방을 제 무덤으로 정했다. 그래서 밀어내는 손길로 무엇이 불안한지도 모른채 그는 초조해했다.


그러니까, 안녕. 마지막 말이 안녕. 제가 그 말에 대꾸를 했는지, 했다면 그의 얼굴을 보며 했는지, 아니면 모든 것이 자신의 착각인지. 로라스는 차 안에서 내내 그 생각을 했다. 울 것 같았던 젖은 파란 눈을 떠올렸다. 깊이 젖어든다. 상상은 쉽게 빨려들었다. 어디까지가 제 상상이고 어디까지가 사실인지에대해 로라스는 스스로가 끔찍할 정도로 계속해서 생각을 이었다.


괴로웠다. 매연을 내뿜으며 차가 달려나갈수록, 늘 잠들던 곳과 멀어질수록, 차 창으로 주홍빛 가로등불이 저를 스쳐지나갈수록, 숨이 메스껍고 두근거리는 두통으로 괴로웠다. 부족한 잠이야말로 지난 보름간 제가 견뎌온 고난이었다. 로라스는 떠오르는 셔츠의 바스락거림으로 양 손을 맞대어 손 끝을 비비고 숨을 들이마시며 방금의 향을 좇았다. .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꿈을 꾸라고 했다. 우선은 잠을 자야했다.


-


또 밤. 몇 번이나 읽어 헤어진 가죽책에 종잇장을 끼워넣었다. 축축한 제 손으로 표지의 색이 변한다. 어쩌면 남자의 우유부단함도 다 제 탓일테다. 확신없이 헤매는 불쌍한 녀석. 결국은 제 짝이 아니었던 것이다. 드렉슬러는 애써 그런 생각을 했다.


그 선실에서의 커다란 그림자에 눌려 저는 그 때부터 전혀 자라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걸어온 모든 길은 그저 욕망에 쫓겨 몰리는 삶에 불과했다. 제 재능과 기술과 힘과 능력. 심지어 충동은 가끔씩 제 눈을 뽑아버리라 부추겼다. 하루가 돌아 다시금 밤이 되면 물 속에 이젠 그만 손을 담그라고 기억 속 바다 밑의 인어가 속삭였다.


그 때는 결국 도망치고 말았다. 방 안에 우두커니 앉아 떠올리는 바다는 밤하늘처럼 멀고 또 가까웠다. 그것은 늘 어딘지 모르게 그리웠고 어딘지 모르게 두려웠다. 드렉슬러는 제 머릿속에서 제가 난 곳을 지나 삶을 겪고 고통을 반복해 살았다. 어느 날, 리처드가 말을 걸었다.


이 곳은 별이 빛나는 쓰레기장이야. 가장 노후해서 이 근방에서 제일 맑은 곳이지.


하늘은 쏟아질 듯 가까웠다. 밤하늘은 빛나고 있었다. 검게, 또 검게. 그는 저를 정말로 싫어했다. 그리고 또 지금 제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을테였다. 그저 어중간한 동정심과 제 능력에 대한 경이 때문에 흔들리는 사람들중 하나일 뿐으로 그가 저에게 특별해진 것은 하나, 이 쏟아질 듯한 하늘 때문이었다. 서녘으로 찬 바람이 불어왔다. 저는 살아있었다. 그것이 중요했다.


조그만 구멍 사이 별빛이 새어들었다. 밤하늘 아래에서 드렉슬러는 문득 서러워졌다.

'Faith&Spear > Midnight Blue'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라드렉/G] Midnight Blue 18  (0) 2016.09.11
[로라드렉/G] Midnight Blue 17  (0) 2016.03.14
[로라드렉/G] Midnight Blue 15  (0) 2015.12.14
[로라드렉/G] Midnight Blue 14  (0) 2015.10.19
[로라드렉/G] Midnight Blue 13  (0) 2015.08.19
Posted by Bincan
, |

리처드는 방금까지 로라스가 앉아있던 자리에 고요히 시선을 얹었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저는 언제나 중간 다리일 뿐. 지금도 중요한 것은 드렉슬러가 무엇을 원하느냐, 그것 뿐이었다. 리처드는 이번 만큼은 드렉슬러가 제 앞길을 정하도록 내버려둘 심산이었다. 그는 늙었고 지쳐있었다. 사랑하여 미워했던 제 동생은 죽었다. 너무 오랫동안 누군가를 미워했고 너무 오랫동안 이 곳을 떠나지 못했다. 저는 말하자면 망령인 셈이다.


목숨 값을 저울질하러 일전의 남자가 찾아왔다. 덕분에 이제는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았다.


노인은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




로라스는 섣불리 문을 두드리지 못했다. 어두운 밤길을 달리는 동안 유난히 자동차가 돌바닥 위를 구르는 느낌이 선명했던 탓이고, 제가 오늘 따라 정신이 맑고 예민한 탓이고, 어쩌면 오늘이 마지막인 탓이다. 녀석이 무언가 부탁을 하던가. 노인은 그렇게 물었다.


그렇게 앞을 몇 분 쯤 서성거리자 기척 없이 문이 열렸다.


눈 안에 남자가 가득 찬 것도 잠시 드렉슬러는 미련 없이 뒤를 돌아 늘 앉던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유향을 태운 냄새가 방 안에서 약하게 났다.


방은 예전처럼 다시 어두워져 있었다. 테이블 앞에 낮게 달린 가스등만이 희미하게 방을 비췄고 늘 제가 눕던 곳은 어둡기만 했다. 마치 빛이 닿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걸음이 쉬이 떨어지지 않아 로라스는 방문만을 겨우 닫고 문앞에 덩그러니 섰다. 눈썹이고 머리카락이고 제멋대로 자라있는데도 옆모습이 단정하다. 눈만이 여닫히다 입술이 열렸다.


오늘이 마지막이네.”


흐르는 소리에 로라스는 화들짝 놀랐다. 몸만을 비틀어 드렉슬러는 로라스를 올려다 보았다. 한 손은 제 다리 위에 한 손은 가죽책 위에 얹은 채다. 로라스는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드렉슬러는 별 일 아닌양 서랍장 속에서 검은 벨벳주머니를 꺼내 쥐었다. 단단히 굳은 로라스의 얼굴이 우스울 따름이었다.


놀랐어?”


드렉슬러는 슬며시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언제부터 알았나.”


물음에 웃음이 진해졌다. 답안지를 같이 들고 오지 말았어야지. 그는 속으로만 생각했다.


요새 꿈은 꿔?”


둘 사이의 거리는 이제 두 뼘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등 뒤의 불빛으로 로라스의 얼굴에 그림자가 지자 드렉슬러는 웃기를 멈췄다.


사실은 걱정했어. 오늘 네가 혹시라도 늦게 올까봐서.”


만지작거리는 주머니 속에서 달그닥달그닥 돌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오늘은 재워줄 수가 없었거든.”


드렉슬러는 손을 뻗어 로라스의 손을 끌어당겼다. 펼쳐진 손바닥 위에 주머니를 쥐어주고 짙은 음영으로 푸른기가 사라진 눈을 바라보았다. 기억 속 검은 바다가 다시금 일렁거렸다.



"네가 필요한 건 거기 다 들어있어. 전부."


드렉슬러는 더이상 로라스의 눈을 마주보지 못했다.


"불을 붙일 부싯돌과 밑받침까지. 커튼을 치고 방문을 닫아. 회색 연기가 자욱해지겠지만 겁먹지말고."


어거지로 또박또박 뱉어내어졌다. . 타죽는다. 단어들이 우물거리려는 것에 드렉슬러는 입술에 힘을 주었다. 순간 커다란 손이 주머니와 함께 쥐어졌다. 굳은 살로 다져진 손끝은 다정하게 그 위를 쓸었다.


-. 알베르토.


드렉슬러는 로라스의 품 속으로 뛰어들었다.


좋은 꿈 꿔라.”


끌어안기자 참을 수 없어져 힘껏 마주 안았다. 뺨이 제 귓가에 스치고 고집이 찬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로라스는 드렉슬러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손 끝에 감기는 차가운 가죽느낌이 불편했다.


파헤치듯 독한 냄새의 가죽자켓의 틈을 젖혀 얼굴을 파뭍고 숨을 들이마셨다. 로라스는 이어 자켓을 벌려 얇은 셔츠 위로 드렉슬러를 조금 더 끌어당겼다.


자네에게서 봄바람에 실린 겨울냄새가 나.”


들어올려진 고개는 눈이 부시게 반짝거려 드렉슬러는 키스하려는 입 위에 손바닥을 씌웠다.


드렉슬러는 자신의 손등 위에 입을 맞췄다. 키스하듯 부드럽게 핥았고 장난치듯이 살짝 깨물기도 했다. 그 부드럽고 장난스런 입맞춤이 손등 위에 내릴 때마다 입술과 맞부딪히는 맨 살갗에 로라스는 숨이 차 헐떡거렸다.


제 숨으로 축축해진 손바닥에 입술을 묻고 로라스는 눈을 감았다. 단전부터 가슴까지 잔떨림이 올랐다.


네가 딩고는 아니잖아.”


그제야 젖은 눈동자가 보였다.


작은 선물을 준비했어.”


드렉슬러는 로라스를 끌어당겨 이마에 키스했다. 그렇게 소근거렸고 조금 웃었다.


메리제인을 조금 넣었어. 좋은 꿈을 꿀 수 있도록 그녀가 도와줄 거야.”


그는 괴로움으로 일그러진 얼굴에 울 것 같아 조금 더 웃었다.


떠나면 안 돼.”


소리는 희미하기만 했다. 로라스는 주먹을 움켜쥐고 같은 말을 몇 번 더 힘을 주어 말했다. 떠나면 안 돼. 떠나지 말게. 떠나면 안 돼. 몇 번을 반복해도 마찬가지로 소리는 힘이 없었다.


시간이 없어. 이제 다 됐어. 가야 해.”


드렉슬러는 로라스를 방문 밖으로 밀어내기 시작했다.


금방 돌아올 걸세. 눈을 뜨자마자 달려올테니까,”


약 때문에 어지럽고 목이 좀 마를 거야. 자기 전에 아무것도 먹지말고.”


조금씩 뒷걸음질 치던 로라스는 드디어 문을 움켜쥐었다.


떠나면 안 되네. 꼭 다시 올테니까.”


오지마. 망설임으로는 할 수 없는 말이 있었다. 소리를 입에 물어 삼켰다. 날카로운 통증으로 찢어질 듯한 곳은 기도였으며 가시가 난 것으로 심장에 공기가 걸리는 듯하여 괴롭기 짝이 없었다.

오지마라. 오지마라.


저를 보고 웃을 로라스의 얼굴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저를 저주하거나, 제 자신을 저주하거나. 오열로 저를 슬프게 할 것이다.


알베르토.”


로라스는 부여잡은 문을 놓지를 못했다. 몇 번을 힘을 주어 되뇌인 문장보다 오히려 제 이름은 무겁고 나지막했다. 이름. 나는 그래. 아직, 자네 이름. 미는 손에 힘없이 가슴이 휘청거렸다. 드렉슬러는 로라스를 밀어내는 것을 그만 두었다.


그래. 네 맘대로 해. 하지만 정말, 정말 시간이 없어.”


이제 어조는 애원에 가까웠다. 드렉슬러는 제 가슴 속에 울먹거리는 것을 애써 삼켜내고 미간을 찌푸렸다. 입가는 일그러졌고 이가 악물렸다. 이 이상은 보는 것이 고통이었다.


일이 뒤틀리면 다시는 네놈 얼굴 같은 건 보지않을거야.”


돌아오면….”


의미없는 다짐 대신으로 로라스는 입을 열었다. 머뭇대는 것에 지친 드렉슬러의 한숨에 입술이 달싹였다.


돌아오면, 다시 한 번 무릎을 빌려주게.”


어색한 미소가 걸린 얼빠진 얼굴에 드렉슬러는 빠르게 눈을 깜박였다.


그래….”


그렇게 하자. 드렉슬러는 제 엄지로 검지를 문질렀다. 그렇게 하자, 알베르토. 눈이 정신없이 깜박였다.


돌아오면, 돌아오면….”


이어지지 못한 말에는 조금의 빈틈도 없었다. 드렉슬러는 마지막으로 로라스를 밀어냈다. 손이 문고리를 놓치고 서서히 문이 닫혔다.


좋은 꿈 꿔라.”


안녕. 말꼬리가 잘렸다.

'Faith&Spear > Midnight Blue'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라드렉/G] Midnight Blue 17  (0) 2016.03.14
[로라드렉/G] Midnight Blue 16  (0) 2016.01.11
[로라드렉/G] Midnight Blue 14  (0) 2015.10.19
[로라드렉/G] Midnight Blue 13  (0) 2015.08.19
[로라드렉/G] Midnight Blue 12  (0) 2015.07.26
Posted by Bincan
, |

 

애먼 로이드는 새벽 다섯시면 자리에서 눈을 뜬다. 올해 쉰하나인 그는 열여덟에 군대에 자원입대했고 제1차능력자전쟁에 참전했다. 대영제국의 군인이자 비능력자로써 최전선에서 공을 세운 것을 인정받아 훈장과 작위도 가지고 있었다.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생활에 부족함이 없었으나 이것은 넘치지도 않았다. 그는 늘 이것이 불만이었다.


부품 어딘가에 녹이 슬었는지 수도의 밸브를 돌리자 끼릭끼릭 거슬리는 소리가 나며 물이 튀었다. 로이드는 콸콸 쏟아지는 물줄기에 손을 넣어 찬물로 세수를 하고 새수건으로 얼굴을 훔쳤다. 하루하루 제 몸은 삭아간다. 아마도 살아온 날이 앞으로 살아갈 날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그렇게 세면대 위 거울 속에는 별 볼일 없는 오십대의 늙은이가 서있었다.


비능력자로써 그는 뛰어난 것이 없었다. 다만 운을 실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는 제가 가진 것보다 분에 넘치게 끌어들이는 운을 비열하고 저열하게 이용해 이 자리까지 오른이로 굉장한 실력자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우연하게 주워들은 정보를 어떻게 써먹어야할지, 필요한 이야기들을 얻을 수 있는 곳이 어딘지, 그는 기가 막히게 잘 알고 있었다. 스스로도 가끔씩 제 실력에 소름이 돋고는 했다.


소령. 중령. 대령. 직위가 바뀌는 그 순간은 늘 짜릿했다. 권력은 달았다. 그러나 군인은 신이 아니었다. 늘 제 위에는 누군가 있었다. 온갖 더러운 권모술수로 여기까지야 어떻게든 올라왔으나 저는 태생이 더러운 놈이었다. 절대 이길 수 없는 게임에서 그저 앞으로 앞으로 전진하는 기분이 들었다. 공허한 삶을 메꾸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권력이 필요했다. 돈, 그에겐 돈이 그랬다.


RX. 우연은 얄궂은 데가 있어서는 기대하지 않은 선물을 꼭 이렇게 살짝 얹어놓고는 했다. 그는 그 이름을 저울질했다. 어느 쪽이든 팔아치우면 그만이지만.


 제 주요 고객인 화이트 칙스의 매음굴에 찾는 이들의 발걸음이 점차 줄기 시작했다. 회백색의 가루가 팔리지 않고 쌓여갔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잔고를 깎아먹으며 몇 달간의 추적의 끝에 그들은 그들의 약을 중화시키는 해독제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가 의도를 밝히지 않은 채로 이곳저곳에 약을 뿌려대고 있었다.


화이트 칙스는 이 일을 로위드에게 직접 의뢰했다. 저희들은 구역다툼이 있어 다른 지역에는 손을 뻗지 못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로위드는 약쟁이 몇을 잡아 주요 거래처에 들어앉혀놓았다. 못구하는 약도 없도 못만드는 약도 없다. But cash. 리차드를 만나는 일은 비교적 쉬웠다.


리차드는 거래를 받지 않았다. 해독제에 관해서도 모르쇠로 일관했다. 덮수룩한 눈썹 아래 까만 뱁새눈이 섬찟하게 빛났다. 수문장은 녹록치 않았다.


로위드는 도움을 받기로 했다. 적절한 역할의 멍청이로. 명분에 집착하는 그는 이번 역시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굉장한 실력자가 있고 다른 이의 눈을 피해 은둔해있으며 오직 그 노인을 통해서만 거래를 받고 있는데 전쟁으로 흉흉할 때에 다른 국가로 넘어가거나 일정 조직의 손에 들어가서는 큰 일이 날 이라 대영제국의 안녕을 위해 꼭 확보해야할 인물이라고. '나라의 일'. 키워드는 언제나 먹혔으며, '속죄'. 그 양념마저 완벽했다.


-

13일째의 새벽


눈이 번쩍 뜨였다.

 


바스락거리는 입술의 거스러미가 잘 정돈된 살갗을 거칠게 스쳤다. 닿은 것이라고 말하기도 민망한 감촉이 여전히 아리고 저렸고 손끝으로 살짝 살짝 건드릴 때마다 기억 위로 떠오르는 감촉에 온몸이 전율했다. 가슴이 끓었다.


드렉슬러는 제 타임아웃의 끝에 비릿한 미소를 걸어넣고는 제가 어둠 속으로 끌려들어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아아, 익숙한 향기가 분명 제 뺨에 스쳤는데. 뇌속의 혈관이 엉켜 곧 터질 듯이 두근거렸다. 두통이 곧 생각이어서는 로라스는 제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몰랐다.


위험했다. 계획. 희생. 내가 저버린 것들에대한 속죄와 그리고 두근거림. 체념하고 놓아버린 삶에대한 미련, 미련. 종류가 다른. 아아, 위험하다. 그는 위험해. 저는 어둠속으로 스스로 걸어들어간 사람이었다. 뛰어난 이단자를 꾀러 놓아진 미끼였고 모든 것은 청산이었으며 결국엔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기억 속으로 스스로 걸어들어가려했다. 그러나, 미련하게도 두근거림으로 살고자한다. 끓어오르는 것은.


로라스는 당혹스러웠다. 지켜달라니, 무엇을. 어디까지 알고 있는걸까.


떨리는 손은 금방 들킬 것이었다. 로라스는 드렉슬러를 더이상 끌어안지 않았다.


로라스는 리처드를 찾아갔다.

 

-

 침대 위의 노인은 주름지고 앙상한 손가락에 실을 엮어 거미줄을 만들었다. 금발의 남자는 묵묵히 침대맡을 지키며 노인의 시트 끝자락을 노려보았다.

 "제임스."

 거칠고 메마른 음성은 듣기 거슬리는데가 있었다. 남자는 흠칫 떨며 고개를 들었다.

 "여깄습니다, 맥그리거씨."

 "어지간히 내가 원망스럽겠군."

 노인은 이채가 흐르는 푸른 눈을 느릿느릿 깜박였다. 제임스라고 불린 남자는 입을 열지 않았다.

 "나는 탐욕스러워. 예전부터 그랬지. 비밀보따리를 잃어버린 이후에는 한껏 날이 서서는 히스테릭해졌고 말이야. 그게 자네가 몇 살때인지 혹시 기억하나?"

 "...열 살이었을겁니다."

 "제임스. 작은 제임스야. 알겠지만 나는 가정문을 싫어해. 모를 때는 확실히 모른다고 하는 게 좋아."

 "...죄송합니다."

 "아니, 그럴 것 없어."

 노인은 가래가 낀 듯한 목으로 콜록콜록 기침을 했다.

 "고작 예순에 몸이 엉망이야. 겉보기엔 여든은 넘은 노인같지않나? 좋은 것을 먹고 좋은 것을 입고 늘 최고만 누렸는데도 이 모양이야. 하지만 여전히 나는 수장이고. 장기가 멀쩡한 것이 없는데도 그래."

 노인은 차오르는 숨을 고르며 검지의 반지를 문질렀다. 원숭이를 집어삼키는 뱀이 붉은 루비 뒤에 또아리를 틀어 자리를 잡았다.

 "1916년 3월 28일. 꽤 추운 날이었어. 멍청한 자식의 이마에 바람구멍을 내주었는데, 녀석이 잽싸게 도망가버렸지."

 제임스는 노인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점점 힘에 부침을 느꼈다. 울컥거리는 울대를 꿀떡 삼켜냈다.

 "내가 꽤 못살게 굴었거든."

 노인은 즐거운 듯 킬킬 웃었다.

 "등짝에 낙인은 내가 직접 찍었어. 자글자글 살타는 냄새가 내게는 풀코스 요리보다 훨씬 먹음직스러웠고. 그 사그러들지 않는 불꽃이 눈에 비치면 온 몸이 오싹해지곤 했지. 너도 그 아이를 알잖아?"

 추억에 잠긴듯 가늘게 뜨여진 눈은 도로록, 제임스를 향했다. 제임스는 제가 저도 모르게 노인을 노려보고 있었다는 사실에 화들짝 놀랐다.

 "아, 더이상 아이가 아니겠군."

 노인은 능청맞게 시선을 갈무리하며 마른 손을 가볍게 말아 쥐었다.

 "나는 그 녀석의 속이고 겉이고 모조리 가졌어. 늘 갈증이 나고 역겨웠는데도 옆에 꼭 붙이고 있었지. 사실 그 때도, 지금도 한 번도 가진 적이 없었는데 말이야. 녀석은 주먹을 움켜쥔 채 절대 펴지 않았어. 매질도, 폭언도 소용이 없었지. 그 살갗을 갈기갈기 찢어놓을 수는 있었어도 절대 이겨낼 수는 없었다고. 정말이지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도 나는, 멍청하게 녀석의 손가락을 부러뜨려서라도 이 반지를 끼우려고 했어."

 분노에 찬듯이 앙상한 몸이 바르르 떨렸다.

 "반가운 친구의 소식을 들었어."

 노인은 순식간에 평온을 찾았다.

 "오랜만에 가지고 싶은 것도 생겼고."

 제임스는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노인은 빙그레 웃었다.

Posted by Bincan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