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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 뒤에 뿌리 깊은 화상으로 새겨진 상처가 꿈틀거렸다. 원숭이를 집어삼키는 뱀의 괴상한 문양은 저도 전에 본 적이 있다. 등은 키와 함께 커지고 커져 흉터의 자국을 넓혀 경계선을 흐려놓았다. 그러나 그것은 사라지지 못하고 흉하게 자리를 넓혔을 뿐이다. 아물지 못한 성장이란 그런 것이다. 필시 달궈진 쇳덩이가 어린 시절의 여린 살을 뭉개고 익혀 그 연한 조직을 쪼글쪼글하게 만들어 물을 채워넣었을 것이다. 자신이 뭉개고 싶은 것은 아마도 그 어린 시절일테고. 로라스는 드디어 눈을 감고 억눌렸던 스냅샷의 빈 공간에 그 등을 채워넣었다.

 

 푸른 바다가 어둑어둑했다. 일렁거리는 검은 물결은 탁하고 침침하여 매순간 바위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날 줄 알면서도 혀를 널름거리고 저를 향해 아가리를 벌리려들었다. 그것은 더이상 푸르지도 않았다. 온갖것을 불싸질러 잿가루를 만들고 그것을 곱게 빻아 물에 탄다고 해도 이보다 더 무채색일 수는 없었다. 깊은 곳은 모든 색을 빨아들였다. 그리고 곧 저도 집어 삼킬 속셈이었다. 두려움은 어린 드렉슬러의 발에 족쇄를 달아 육지에 그 두발을 묶어놓았다. 결국 제 아비도 무너져가는 나라의 가상사리에서 풀썩이는 모래먼지의 냄새를 맡고 배를 띄운 배신자였으니 이미 허옇게 질린 두 손은 바다에 담글 길 조차 없는 것 아닌가. 그래서 더욱 갑판에 올랐다.

 

 드렉슬러는 무릎을 가슴팍에 끌어안고 물로 가끔씩 목을 축이며 늘 그 곳에 있는 짐상자마냥 자리를 지켰다. 누군가가 저를 알아볼까 두려웠다. 그렇게 저를 번쩍 들어 두 다리를 하늘로 향하게 하고 배 건너로 꼬꾸라트릴 것만 같았다. 물 속에 처박히면 인어가 몰려들어 제 팔이고 다리고 우적우적 씹어먹을 것이다. 뼈는 사라지지 못하고 제 의식에 엉켜 밑으로 밑으로 가라앉을 것이다. 그렇게 붉은 별이 되겠지. 하지만 아무도 붉은 별을 그려넣어주진 않을 테였다. 제 자리는 없었다. 그럼에도 배를 탔다. 배를 탈 때마다 늘 그랬다.

 

 17년을 꼬박 세상구경을 했다. 그 시간동안 늘 드렉슬러는 도망자였다. 수없이 많은 사람 속에서 티끌이 되어버린 자신을 느끼면서도 무언가 제 뒷덜미를 낚아채 바닷속에 처박아넣을 것이라는 공포에서 도저히 자유로워질 수 없었다. 그렇게 저를 쫓고있는 것을 얼음으로 가득찬 산 속에서 보았다. 검은 돌 위에 켜켜히 얼어붙은 얼음에 제 얼굴이 비쳤다.

 

 청산을 위해 돌아왔다. 영국땅을 밟은 것은 아무도 깨어있지 않을 새벽으로, 다행히도 리차드는 그저 늙었을 뿐이었다. 안녕, 영감.

 

 로라스는 차마 침대 위에 앉을 수가 없었다. 앉았다간 괴상한 냄새가 날 것만 같았다. 밝은 방이 불쾌했다. 잘 개어진 제 담요와 베개를 노려보았다. 제 담요와 베개를 노려보았다. 제 것인데.

 

 로라스는 무엇을 향해 화를 내는지를 모르고서는 화를 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무작정 화만 차올랐다. 더이상 참았다가는 짐승마냥 으르렁거릴 것 같았다. 그래서 입을 열어야만했다.

 

 

 "잡무에 비역질도 들어가는 모양이지?"

 

 

 모르는 척하고 싶지 않았다. 적성에 맞지 않았다. 숨길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제 앞에서 드렉슬러는 낱낱히 까발려져야했다. 가슴 속에 엉기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야했다. 그만이 그랬다.

 

 

 "왜 화를 내지?"

 

 

 돌벽에 잔 금이 가있었다. 수리가 필요해보일 정도는 아니었는데 핏발이 서 노려보는 눈에는 그 자잘한 잔 금마저 눈에 거슬렸다.

 

 

 "화를 낸다고?"

 

 

 뒤를 획 돌아 로라스는 드렉슬러와 눈을 맞췄다. 망설임도 없이 단호한 말투로 로라스는 순간 드렉슬러가 애처로워보인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 화 내고 있잖아."

 

 

 드렉슬러는 조금 웃고 있었다.

 

 

 "아니야."

 

 

 "거짓말쟁이."

 

 

 우물거리는 사람은 없었다. 정해진 스크립트처럼, 미리 짜여진 시놉시스처럼 공간에 갇혀 빠져나가지 못하게 드렉슬러는 서서히 로라스의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응? 그렇잖아."

 

 

 가까워지는 거리에 맥박이 뛰었다.

 

 

"아니면, 로라스."

 

 

 숨이 졸렸다.

 

 

"이게 화를 내는 게 아니면."

 

 

 한 발자국.

 

 

 "날 지켜줄거야?"

 

 

 그렇게 다가서는 입술에 주춤, 로라스는 뒤로 물러섰다. 아차.

 

 

 "거 봐."

 

 

 빙그레 웃는 웃음이 또 끝에 걸렸다.

 

 

 "거짓말쟁이."

 

 

 뒷걸음질 친 다리가 침대에 걸려 로라스는 그 자리에 주저 앉고 말았다. 삐그덕, 소리와 함께 방이 침침해진 기분이 들었다. 세상이 들썩였다. 그들은 뛰고 있었다.

 

 

 "앞으론,"

 

 

 입을 가렸다.

 

 

 "이런 짓 하지말게."

Posted by Binc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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