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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오전의 일이다. 드렉슬러가 다녀간 날 이후로 리처드는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음식에 넣는 주류점의 제일 싼 와인부터 아껴놓았던 최고급 양주에 이르기까지 가게 내의 술을 모두 동 낼 기세로 그는 눈을 뜨면 술부터 찾았다.


그만 좀 드세요.”


보다못한 토마스가 한마디 하자 리처드는 눈을 부릅뜨고 술방울 맺힌 콧수염을 덜덜 떨었다. 마셔도 마셔도 술이 부족했다. 그러니까, 잊을 만큼은 아니었다. 저는 아무리 알코올을 들이부어도 정신하나만큼은 멀쩡했다. 아마 이것은 녀석도 그럴 것이다. 아니, 녀석은 스스로가 맨정신이 아니기를 절대 원하지 않을 것이다.


니미.”


리처드는 나무잔을 테이블에 강하게 내리쳤다. 손이 징징 울리는 것이 취기로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몽롱한 기운에 더 화가 치밀었다. 그는 그렇게 몇 번이나 나무잔을 휘두르다가 돌벽에 잔을 집어던졌다. 결국 잔은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결대로 박살이 나 버렸다.


그 소란에 토마스는 잠시 움츠러들었다가 가게 한 켠의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챙겨 바닥을 쓸었다. 리처드는 일주일 전부터 평소대로 물건을 주문하지도, 손님을 받지도, 일을 알선하지도 않고 있었다. 처음 며칠간은 제대로 자질 못하는 것 같더니 삼일 전부터는 음식도 입에 대지 않고 오롯이 술뿐이다. 토마스는 한숨을 쉬었다.


도대체 왜 이러시는데요. 요 전부터 계속 술만 드시잖아요.”


리처드는 그 다정한 어조에 심술맞은 늙은이마냥 콧잔등을 끌어올려 얼굴을 찌푸렸다. 콧방울을 실룩거릴 때마다 붉은 뺨 위로 검버섯과 주름이 꿈틀거렸다. 거친 숨 사이로 술냄새가 지독히도 났다.


노망이 났나보지.”


리처드는 제 풀에 지쳐 구석지의 바 의자에 올라앉았다. 높은 의자로 다리가 덜렁거리자 주먹으로 무릎을 몇 번 내리쳤다. 당연한 듯이 통증이 둔했다.


부서진 파편을 나무상자에 담아넣고 토마스는 리처드의 옆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항상 굳건해보이던 노인은 정말로 노인이 되어 왜소하고 힘 없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이 보였다. 세월을 쥐어온 거친 손이 옹골차게 주먹을 쥐고 무릎 위에서 떨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거죠?”


토마스는 제 허벅지에 가슴팍을 꼭 붙인채 그 사이로 고개를 밀어넣어 몸을 웅크렸다. 피가 머리로 몰렸고 시야가 어둑해졌다.


그 사람, 이상해요.”


머뭇대듯 느릿느릿 흘러나오는 말에 리처드가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그간 안 하던 짓을 해요. 그 남자 때문일까요?”


그간의 피곤으로 눈꺼풀이 느리게 움직였다.


지랄은.”


리처드가 말했다.


그런가요.”


토마스가 말했다.


녀석이 좋으냐.”


리처드의 말에 토마스의 입가에 미소가 잔잔히 떠올랐다.


. 무척요.”


리처드는 토마스를 힘껏 떠밀었다. 외다리 의자가 휘떡거렸고 토마스는 그만 바닥에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미친놈.”


리처드는 말을 씹어뱉었다.


미친놈! 미친놈!”


소리는 경멸이 어려 쩌렁쩌렁 가게 안을 울렸다. 넘어질 때의 큰 진동으로 외등이 좌우로 흔들거려 이 때마다 리처드의 얼굴이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했는데, 이것이 마치 그가 꼭 지옥에서 걸어나온 사자같이 보이게 했다.


녀석은 독이야! 너같이 약한 놈은 단숨에 죽어버리는! 네 놈한테선 풋내가 나. 덜 여물어 나는 비린 냄새 말이다. 이 멍청이. 멍청한 녀석. 너같은 놈이랑 같이 있는데 대체 나보고 어떻게 제정신으로 있으란 말이냐!”


한참을 씩씩거리다 폭발하듯 터져나온 말에 토마스는 그것이 무슨 뜻이냐 묻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일에 어리둥절하여 벗겨진 안경을 겨우 고쳐썼을 뿐이다.


돌연 리처드는 빗자루를 들고 돌아와 토마스를 내려치기 시작했다. 치매! 내가 치매가 왔다! 난감해하며 왜이러시느냐 반복해 묻는 그 억울한 목소리에 리처드는 벌건 눈을 하고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나가라! 나가라!”


결국 토마스는 매타작에 쫓겨 문 밖을 나섰다. 눈 앞에서 문이 쾅 닫혔다.


나중에 다시 올게요! 술 그만 드시고요!”


벌게진 팔뚝과 잘못 맞아 피가 나는 이마를 닦으며 토마스는 그렇게 말했다.


이 멍청한 놈아! 다신 오지마!”


대꾸는 고약했다.


리처드는 문틈새로 토마스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마지막까지 머뭇거리다 한참이 지나서야 발을 뗀다. 미련한 녀석. 내일까지는 아마 오지 않을테다. 그럼 그것으로 됐다. 그는 테이블 위의 와인병을 들어 병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


. 불안은 형체가 없었다. 이제는 살을 저미던 찬바람이 누그러들고 호수의 얼음이 더이상 단단하지 않듯이 어쩌면 곧 내일 다시 봄일 것이다. 제 목숨값인 해는 점점 이르게 뜬다. 각오한 죽음으로 그의 곁에서 눈을 감는다면 저는 행복할지도 몰랐다. 사실 로라스는 오늘 그 지하의 방을 제 무덤으로 정했다. 그래서 밀어내는 손길로 무엇이 불안한지도 모른채 그는 초조해했다.


그러니까, 안녕. 마지막 말이 안녕. 제가 그 말에 대꾸를 했는지, 했다면 그의 얼굴을 보며 했는지, 아니면 모든 것이 자신의 착각인지. 로라스는 차 안에서 내내 그 생각을 했다. 울 것 같았던 젖은 파란 눈을 떠올렸다. 깊이 젖어든다. 상상은 쉽게 빨려들었다. 어디까지가 제 상상이고 어디까지가 사실인지에대해 로라스는 스스로가 끔찍할 정도로 계속해서 생각을 이었다.


괴로웠다. 매연을 내뿜으며 차가 달려나갈수록, 늘 잠들던 곳과 멀어질수록, 차 창으로 주홍빛 가로등불이 저를 스쳐지나갈수록, 숨이 메스껍고 두근거리는 두통으로 괴로웠다. 부족한 잠이야말로 지난 보름간 제가 견뎌온 고난이었다. 로라스는 떠오르는 셔츠의 바스락거림으로 양 손을 맞대어 손 끝을 비비고 숨을 들이마시며 방금의 향을 좇았다. .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꿈을 꾸라고 했다. 우선은 잠을 자야했다.


-


또 밤. 몇 번이나 읽어 헤어진 가죽책에 종잇장을 끼워넣었다. 축축한 제 손으로 표지의 색이 변한다. 어쩌면 남자의 우유부단함도 다 제 탓일테다. 확신없이 헤매는 불쌍한 녀석. 결국은 제 짝이 아니었던 것이다. 드렉슬러는 애써 그런 생각을 했다.


그 선실에서의 커다란 그림자에 눌려 저는 그 때부터 전혀 자라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걸어온 모든 길은 그저 욕망에 쫓겨 몰리는 삶에 불과했다. 제 재능과 기술과 힘과 능력. 심지어 충동은 가끔씩 제 눈을 뽑아버리라 부추겼다. 하루가 돌아 다시금 밤이 되면 물 속에 이젠 그만 손을 담그라고 기억 속 바다 밑의 인어가 속삭였다.


그 때는 결국 도망치고 말았다. 방 안에 우두커니 앉아 떠올리는 바다는 밤하늘처럼 멀고 또 가까웠다. 그것은 늘 어딘지 모르게 그리웠고 어딘지 모르게 두려웠다. 드렉슬러는 제 머릿속에서 제가 난 곳을 지나 삶을 겪고 고통을 반복해 살았다. 어느 날, 리처드가 말을 걸었다.


이 곳은 별이 빛나는 쓰레기장이야. 가장 노후해서 이 근방에서 제일 맑은 곳이지.


하늘은 쏟아질 듯 가까웠다. 밤하늘은 빛나고 있었다. 검게, 또 검게. 그는 저를 정말로 싫어했다. 그리고 또 지금 제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을테였다. 그저 어중간한 동정심과 제 능력에 대한 경이 때문에 흔들리는 사람들중 하나일 뿐으로 그가 저에게 특별해진 것은 하나, 이 쏟아질 듯한 하늘 때문이었다. 서녘으로 찬 바람이 불어왔다. 저는 살아있었다. 그것이 중요했다.


조그만 구멍 사이 별빛이 새어들었다. 밤하늘 아래에서 드렉슬러는 문득 서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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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inc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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