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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는 방금까지 로라스가 앉아있던 자리에 고요히 시선을 얹었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저는 언제나 중간 다리일 뿐. 지금도 중요한 것은 드렉슬러가 무엇을 원하느냐, 그것 뿐이었다. 리처드는 이번 만큼은 드렉슬러가 제 앞길을 정하도록 내버려둘 심산이었다. 그는 늙었고 지쳐있었다. 사랑하여 미워했던 제 동생은 죽었다. 너무 오랫동안 누군가를 미워했고 너무 오랫동안 이 곳을 떠나지 못했다. 저는 말하자면 망령인 셈이다.


목숨 값을 저울질하러 일전의 남자가 찾아왔다. 덕분에 이제는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았다.


노인은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




로라스는 섣불리 문을 두드리지 못했다. 어두운 밤길을 달리는 동안 유난히 자동차가 돌바닥 위를 구르는 느낌이 선명했던 탓이고, 제가 오늘 따라 정신이 맑고 예민한 탓이고, 어쩌면 오늘이 마지막인 탓이다. 녀석이 무언가 부탁을 하던가. 노인은 그렇게 물었다.


그렇게 앞을 몇 분 쯤 서성거리자 기척 없이 문이 열렸다.


눈 안에 남자가 가득 찬 것도 잠시 드렉슬러는 미련 없이 뒤를 돌아 늘 앉던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유향을 태운 냄새가 방 안에서 약하게 났다.


방은 예전처럼 다시 어두워져 있었다. 테이블 앞에 낮게 달린 가스등만이 희미하게 방을 비췄고 늘 제가 눕던 곳은 어둡기만 했다. 마치 빛이 닿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걸음이 쉬이 떨어지지 않아 로라스는 방문만을 겨우 닫고 문앞에 덩그러니 섰다. 눈썹이고 머리카락이고 제멋대로 자라있는데도 옆모습이 단정하다. 눈만이 여닫히다 입술이 열렸다.


오늘이 마지막이네.”


흐르는 소리에 로라스는 화들짝 놀랐다. 몸만을 비틀어 드렉슬러는 로라스를 올려다 보았다. 한 손은 제 다리 위에 한 손은 가죽책 위에 얹은 채다. 로라스는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드렉슬러는 별 일 아닌양 서랍장 속에서 검은 벨벳주머니를 꺼내 쥐었다. 단단히 굳은 로라스의 얼굴이 우스울 따름이었다.


놀랐어?”


드렉슬러는 슬며시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언제부터 알았나.”


물음에 웃음이 진해졌다. 답안지를 같이 들고 오지 말았어야지. 그는 속으로만 생각했다.


요새 꿈은 꿔?”


둘 사이의 거리는 이제 두 뼘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등 뒤의 불빛으로 로라스의 얼굴에 그림자가 지자 드렉슬러는 웃기를 멈췄다.


사실은 걱정했어. 오늘 네가 혹시라도 늦게 올까봐서.”


만지작거리는 주머니 속에서 달그닥달그닥 돌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오늘은 재워줄 수가 없었거든.”


드렉슬러는 손을 뻗어 로라스의 손을 끌어당겼다. 펼쳐진 손바닥 위에 주머니를 쥐어주고 짙은 음영으로 푸른기가 사라진 눈을 바라보았다. 기억 속 검은 바다가 다시금 일렁거렸다.



"네가 필요한 건 거기 다 들어있어. 전부."


드렉슬러는 더이상 로라스의 눈을 마주보지 못했다.


"불을 붙일 부싯돌과 밑받침까지. 커튼을 치고 방문을 닫아. 회색 연기가 자욱해지겠지만 겁먹지말고."


어거지로 또박또박 뱉어내어졌다. . 타죽는다. 단어들이 우물거리려는 것에 드렉슬러는 입술에 힘을 주었다. 순간 커다란 손이 주머니와 함께 쥐어졌다. 굳은 살로 다져진 손끝은 다정하게 그 위를 쓸었다.


-. 알베르토.


드렉슬러는 로라스의 품 속으로 뛰어들었다.


좋은 꿈 꿔라.”


끌어안기자 참을 수 없어져 힘껏 마주 안았다. 뺨이 제 귓가에 스치고 고집이 찬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로라스는 드렉슬러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손 끝에 감기는 차가운 가죽느낌이 불편했다.


파헤치듯 독한 냄새의 가죽자켓의 틈을 젖혀 얼굴을 파뭍고 숨을 들이마셨다. 로라스는 이어 자켓을 벌려 얇은 셔츠 위로 드렉슬러를 조금 더 끌어당겼다.


자네에게서 봄바람에 실린 겨울냄새가 나.”


들어올려진 고개는 눈이 부시게 반짝거려 드렉슬러는 키스하려는 입 위에 손바닥을 씌웠다.


드렉슬러는 자신의 손등 위에 입을 맞췄다. 키스하듯 부드럽게 핥았고 장난치듯이 살짝 깨물기도 했다. 그 부드럽고 장난스런 입맞춤이 손등 위에 내릴 때마다 입술과 맞부딪히는 맨 살갗에 로라스는 숨이 차 헐떡거렸다.


제 숨으로 축축해진 손바닥에 입술을 묻고 로라스는 눈을 감았다. 단전부터 가슴까지 잔떨림이 올랐다.


네가 딩고는 아니잖아.”


그제야 젖은 눈동자가 보였다.


작은 선물을 준비했어.”


드렉슬러는 로라스를 끌어당겨 이마에 키스했다. 그렇게 소근거렸고 조금 웃었다.


메리제인을 조금 넣었어. 좋은 꿈을 꿀 수 있도록 그녀가 도와줄 거야.”


그는 괴로움으로 일그러진 얼굴에 울 것 같아 조금 더 웃었다.


떠나면 안 돼.”


소리는 희미하기만 했다. 로라스는 주먹을 움켜쥐고 같은 말을 몇 번 더 힘을 주어 말했다. 떠나면 안 돼. 떠나지 말게. 떠나면 안 돼. 몇 번을 반복해도 마찬가지로 소리는 힘이 없었다.


시간이 없어. 이제 다 됐어. 가야 해.”


드렉슬러는 로라스를 방문 밖으로 밀어내기 시작했다.


금방 돌아올 걸세. 눈을 뜨자마자 달려올테니까,”


약 때문에 어지럽고 목이 좀 마를 거야. 자기 전에 아무것도 먹지말고.”


조금씩 뒷걸음질 치던 로라스는 드디어 문을 움켜쥐었다.


떠나면 안 되네. 꼭 다시 올테니까.”


오지마. 망설임으로는 할 수 없는 말이 있었다. 소리를 입에 물어 삼켰다. 날카로운 통증으로 찢어질 듯한 곳은 기도였으며 가시가 난 것으로 심장에 공기가 걸리는 듯하여 괴롭기 짝이 없었다.

오지마라. 오지마라.


저를 보고 웃을 로라스의 얼굴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저를 저주하거나, 제 자신을 저주하거나. 오열로 저를 슬프게 할 것이다.


알베르토.”


로라스는 부여잡은 문을 놓지를 못했다. 몇 번을 힘을 주어 되뇌인 문장보다 오히려 제 이름은 무겁고 나지막했다. 이름. 나는 그래. 아직, 자네 이름. 미는 손에 힘없이 가슴이 휘청거렸다. 드렉슬러는 로라스를 밀어내는 것을 그만 두었다.


그래. 네 맘대로 해. 하지만 정말, 정말 시간이 없어.”


이제 어조는 애원에 가까웠다. 드렉슬러는 제 가슴 속에 울먹거리는 것을 애써 삼켜내고 미간을 찌푸렸다. 입가는 일그러졌고 이가 악물렸다. 이 이상은 보는 것이 고통이었다.


일이 뒤틀리면 다시는 네놈 얼굴 같은 건 보지않을거야.”


돌아오면….”


의미없는 다짐 대신으로 로라스는 입을 열었다. 머뭇대는 것에 지친 드렉슬러의 한숨에 입술이 달싹였다.


돌아오면, 다시 한 번 무릎을 빌려주게.”


어색한 미소가 걸린 얼빠진 얼굴에 드렉슬러는 빠르게 눈을 깜박였다.


그래….”


그렇게 하자. 드렉슬러는 제 엄지로 검지를 문질렀다. 그렇게 하자, 알베르토. 눈이 정신없이 깜박였다.


돌아오면, 돌아오면….”


이어지지 못한 말에는 조금의 빈틈도 없었다. 드렉슬러는 마지막으로 로라스를 밀어냈다. 손이 문고리를 놓치고 서서히 문이 닫혔다.


좋은 꿈 꿔라.”


안녕. 말꼬리가 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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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inc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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