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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라스에게 사교모임이란 어디까지나 사교모임일 뿐이었다. 꽃나무가 만개한 광장, 은은하게 비춰지는 달빛, 타오르는 등불로 호롱에선 그을음이 일었다.


 찬찬히 파티장을 훑다가 정해놓은 순서에 맞춰 춤을 신청했다. 준비된 인사말, 예의 하는 소리, 부드럽게 내민 손과, 몇 번이나 지어냈던 웃음에도 모든 이들은 매우 기뻐하며 기꺼이 내민 손을 붙잡았다.

 

 안정된 피겨로 그녀들을 이끌고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스텝을 밟았다. 그간만 해도 수없이 많이 겪었던 연례행사다. 지겹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 어차피 이 순간 또한 금새 지나갈 텐데 미래의 배우자 리스트에 파묻혀 밉보이지 않는 편이 낫겠거니- 한동안은 그런 생각이었다.

 

드디어 마지막 차례를 마치고 로라스는 한 켠에 가만히 서서 어른거리는 불빛에 의지해 물결처럼 흔들리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수 번의 댄스에도 자신은 지치지 않았다. 설레지도 않았고 기쁘지도 않았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인지. 시선을 허공에 띠워놓고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연무장으로 서서히 의식을 옮겼다.

 

뙤약볕 아래에 어울리지 않는 검은 그림자가 자신에게 걸어오고 있었다. 늘씬한 실루엣은 우아하게도 걸었다. 익숙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또각또각. 유난히 구두 굽 소리가 크게 들렸다. 한 뼘도 채 되지 않는 거리에서 그녀가 테이블에 기대어 잔을 들었을 때야 로라스는 정신이 들었다.

 

 “재미없죠?”

 

 “그렇게 보였습니까?”

 

 “그래요. 춤 잘 추던데.”

 

 일렁이는 주홍물결 속에서 그녀는 묘하게 더 붉게 빛났다.

 

 “나는 싫어요?”

 

 입술에서 살짝 떼어낸 샴페인 잔에 루즈 자욱이 남았다. 나른하게 입 꼬리를 당기며 웃는 입술에 시선이 걸려 떨어지질 않았다. 꿀걱. 울대가 넘어갔다.

 

 “그럴 리가.”

 

 다음 곡을 위해 연주가 멎었다. 새로이 악기를 조율하는 동안의 웅성거림 속에서 둘은 눈조차 마주치지 않았다. 피부를 죄는 긴장감. 톡톡, 여자는 팔짱을 낀 채 손가락만으로 벌써 리듬을 타고 있었다.

 

 부드러운 손길에 로라스는 무도장의 중심으로 이끌려갔다. 아찔하게 스치는 미소, 여자의 걸음걸음 마다 늘어뜨려 굽이치는 갈색 머리카락과 그것에 섞여 빛을 발하는 흰 가닥들이 검붉은 빛의 드레스 위에서 나부꼈다. 미려한 허리라인을 부각시키는 검은 코르사쥬, 불빛을 따라 색이 흐르는 붉은 칵테일 드레스는 그녀로 하여금 부도덕한 악마를 떠올리게 했다.

 

 여자는 가볍게 어깨 뒤로 머리를 쓸어 자리를 잡았다. 당당히 펼쳐진 어깨, 쏘아보듯 도도한 시선, 춤을 추기 위해 태어난 듯 아름다운 자세.

 

 잔잔하게 곡이 시작되자 로라스는 처음에는 습관처럼 그녀를 리드하려 했다. 은근히 잡아당기는 손과 앞서 나가는 스텝. 그녀를 받쳐드는 듯 이끌어 늘 하던 대로. 하지만 여자가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녀는 당기는 손을 놓아버리고 제자리에서 잠시 머무르더니 로라스의 주위를 돌며 스텝을 밟다 다시금 다가와 박자를 맞추는 일을 반복했다.

 

 , , .

 

변덕스러운 박자에 처음 만난 파트너. 하지만 무대의 중앙에서 허둥대거나 당황하기에는 그간의 세월이 길었다. 공격적인 시선을 바로 맞추고 로라스는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중심을 잡았다. 스윙, 또 스윙.

 

 “재미 없는 사람치곤 춤 솜씨는 쓸만하시네요.”

 

 옆으로 몰아치는 빠른 스텝에 엉키려는 다리를 흘려내며 로라스는 거리를 벌렸다.

 

 “능숙하시군요.”

 

 “그런가요?”

 

 “그리고 무례합니다.”

 

 “제가 예의와는 담을 쌓은 지가 조금 돼서요.”

 

 여자는 손끝으로 감겨 들어 기댈 듯 팔 안에 자리를 잡았다.

 

알베르토 로라스라고 합니다. 아직 아가씨의 이름을 듣지 못했습니다만.”

 

 “나는 그게 별로 중요하다고 생각되지 않는데요.”

 

 부드러운 스윙과 함께 유려하게 움직이는 상체와 아름다운 다리의 선을 뽐내며 여자는 다시금 제자리 스텝을 밟곤 로라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 길고 아름다운 팔이 뱀처럼 허리를 감아들었다.

 

 “굳이 이름을 원한다면, 디디 정도가 좋겠네요. 다들 그렇게 부르니까.”

 

 “그래요, 디디.”

 

 노래가 점점 무르익고 있었다. 애절한 여인의 목소리가 힘을 얻자 오히려 동작은 나른해졌으며 시선의 교환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어째서 당신은 춤을 추죠? 흥미도 없는 이런 조그만 자선파티에 나와서 까지요.”

 

 목소리가 담담했던 탓일까 다시금 마주한 시선 속에서 대상이 분명한 적개심이 타오르는 것이 보이자 눈이 시린 기분이 들었다.

 

 “난 열정이 없는 사람에게 모욕을 느껴요. 특히나 마치 그렇지 않은 척 가면을 쓸 땐 더 그렇죠.”

 

 시선을 끊고 돌아서는 걸음을 스텝을 쪼개 다시금 품 안으로 끌어들였다. 허리를 받쳐 디디를 허공에 반쯤 눕히면서 로라스는 최대한 상냥하게 미소 지었다.

 

 “나 역시 단순한 호의가 아닌 접근에는 모욕을 느낀답니다, 디디양.”

 

 . 디디는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어머나, 눈빛이 너무 뜨거워서 타버리지나 않을까 몰라.”

 

 사랑하는 연인마냥 그녀는 로라스의 얼굴을 살며시 쓸어내리다 순식간에 손길을 뿌리치고 거리를 벌려 발을 굴렀다.

 

 “당신이 아무리 모욕을 느꼈다고 해도 그건 그간 당신에게 농락당했던 여성들이나 그 여성들과 춰왔던 춤이 입은 모욕의 십분 지 일도 채 되지 않을걸.”

 

 사랑을 속삭이듯 달콤한 억양과 부드러운 미소로 그녀는 로라스에게 분명한 불만을 전하고 있었다.

 

 “그녀들은 모두 정숙한 여인이었지. 우리는 인사를 나누고 대화를 하며 친구가 되었을 뿐이야. 오히려 그녀들을 모욕하는 것은 당신이 아닌가?”

 

 

 

 여자의 딱딱한 얼굴이 사르르 풀어지자 등허리부터 소름이 올랐다.

 

 

 

 “그게 문제라는 거에요.”

Posted by Binc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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