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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라스에게 객관적 사실이란 이렇다. 이 세상 모든 매혹적인 일이 눈 앞에 벌어진다고 해도 결국 제가 하는 일이라고는 그 아름다운 것들을 배를 채우듯이 게걸스럽게 집어삼켜 제 아귀같은 욕망을 잠시 진정시키는 정도이고 불행하게도 그 후의 욕심은 더욱더 커지기만 하리라는 것.


 제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잡아먹었다. 둘 사이에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그 광경을 보고도 어떤 불쌍한 여자와 결혼을 하여 저를 낳았다. 집은 엄격했고, 고상했으며, 또 품위있었다. 그는 이런 집에서 태어났고 이제는 그 빛을 잃어버린 귀족이란 이름으로 장식한 명예의 껍데기를 뒤집어 쓴 채 스스로의 규격에 맞는 인간다움으로 제 정돈을 마감하여 곧은 허리, 아름다운 걸음을 시간에 맞춰 옮겼다.


 격세 유전이라는 것은 굉장히 새롭고도 놀라운 발견이었다. 고결한 피와 더러운 피로 나누어지던 세계가 조금더 세분화되어 그 뿌리 자체도 찾기 힘들어졌으니 누군가 혼란으로 제 마음 깊은 곳의 지저분하고 역겨운 원죄를 덮어버리려했다면 그것은 굉장히, 또 천재적으로 성공한 셈이다. 이것은 드렉슬러의 객관적 사실이다.


 드렉슬러는 질병대책연구소의 수석연구원이다. 그의 업무는 새로운 발견에 대한 조언과 새로운 발견을 위한 연구, 또 제 불평을 쏟아놓는 것이다. 다행히도 일련의 일들에 맥락을 부여하는 것은 다른 이가 한다.


 며칠 전 드렉슬러는 파혼당했다. 양가의 부모와 약혼녀와 그녀의 사촌이 함께한 자리였는데 그의 직업에대한 관심으로 그녀의 사촌이 합석을 원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드렉슬러는 뭔가 아주 작고 못된 마음이 제 두뇌를 두드리는 것을 느꼈다.


 사실 결혼에대한 끝없는 불신과 제 선택과 인생에 대한 회의로, 일에는 전혀 도움 되지 않는 여러가지 생각들에게 시달리던 참이었으므로 그는 잠시간 시간을 두고 빙그레 웃었다. 준비한 짧은 브리핑은 너무나도 성공적이어서 약혼녀측의 어머니는 제가 앓던 지병으로 인한 가벼운 쇼크로 기절해버렸고 자신은 며칠 뒤 가문에서 제명되기에 이르렀다. 그 후, 제 물건이 든 네댓개의 상자들을 작은 하숙집으로 옮기면서 드렉슬러가 한 반응이라고는 또다시 빙그레 웃으며 어깨를 들썩인 것 뿐이다.


 "이게 내 일인걸."


 업무에 시달리던 비서가 또 그만두었다. 기왕이면 제대로 된, 조금더 일처리가 빠른, 아무것도 묻지 않지만, 그래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 지 정도는 알아듣는. 그간도 온갖 불평의 연속이었지만 이번엔 소장이 뛰어내려왔다. "한 명만 더 관뒀다가는 자네를 내 옆자리에 앉혀놓고 일을 시키겠어!" 소장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소리를 질러댔다. '네, 알겠습니다. 라고 하면 되겠지.' "하얗고 붉고 분홍빛의 기름이 진 게 굉장히 돼지 같이 생겼군." 침묵이 흘렀다.


 새로운 비서가 채용됐고, 또다시 보조연구원이라는 타이틀로 책상에 명패가 달렸다. 드렉슬러는 제 책상 맞은 편 밤색 나무탁자 위, 흰종이에 타이핑되어 투명한 플라스틱 판에 보잘 것 없이 끼워져있는 그 명패를 스쳐지나가다가 마치 춤을 추듯 부드럽게 미끄러져 뒷걸음질쳤다.


 "알베르토 로라스입니다."


 사촌이었다.  


 "지원했다고."


 "사실입니다."


 드렉슬러는 로라스의 곧고 푸른 눈이 몹시 서늘하고 차갑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것은 깨질 듯한 살얼음보다는 너무 투명하게 바닥이 들여다보여 깊이를 알 수 없는 호수를 연상시켰는데 순간 찰박-하고 호수의 물이 튀는 장면이 떠오르자 드렉슬러는 로라스의 두 눈이 정말로 차가운 것은 아닌지 두 손에 쥐어 확인해보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내가 허락을 할 것 같나?"


 "사정을 들었습니다."


 소식은 일종의 기회였다. 언젠간 발현될 제 유전병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일하는 것. 적과의 동침. 제 사촌 여동생의 결혼 소식은 그저 그런 의미였다.


 로라스는 몸단장을 했다. 흠 하나 없이 마음에 들어야했다. 이것은 지금껏 제가 만났던 기회중의 가장이다. 불청객의 입장으로 종잡을 수 없이 까탈스럽다는 그에게 밉보여서는 안되었다. 그래서 그저 그런 마음이었다.


 시체, 해부학 자료, 흑백으로 쏟아지는 내장들, 사실은 뇌조각인 것과 그 위에 꽂혀있는 고정핀, 세포조각의 상호작용들을 그는 굉장히 짧고 명료하게 집어냈다. 오분. 아마도 정확히 오분. 빠짐없이 치밀하게 짜여져 제 아버지의 만류를 배경음악으로 그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로라스에게 이 날은 굉장히 강렬한 경험으로, 그 오분 동안 그는 순간적으로 눈 앞이 시뻘개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붉은 색은 선명하고 아름다운 빛으로, 선연한 두려움과 치솟는 기쁨이 서로 얽혀들어 가득 차올랐다 순식간에 사라졌다. 로라스는 드렉슬러에게서 어떤 이미지를 받아냈다.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의 선택은 최악이었던 셈이다.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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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inc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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