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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히 좀 해.”

쇠꼬챙이에 찔린 손은 아직 열감이 있었다. 무언가를 만들면서 열중하다 보면 흔하게 생기는 상처를 다리오 드렉슬러는 이곳저곳에 이미 무수히 가지고 있었다. 데이고 찢어지고 가끔은 뚫리기도 한다. 상처가 흉 지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그런 손을 알베르토 로라스는 기어코 끌어다 소독을 하고 얼음을 대어 주물덕거리며 심각한 얼굴을 한다.

“자네는 좀 더 제 몸을 아낄 줄 알아야해.”

“잔소리쟁이.”

“그렇다면 자네를 끔찍하게 사랑하는 잔소리쟁이겠지.”

 잔뜩 찌푸려진 미간의 골은 사라질 기미가 보이질 않아 드렉슬러는 늘상 다음에는 더 조심하겠다는 둥의 이야기를 했다. 대신 조금 느리게 한 발 양보한다. 화를 내는 로라스는 섹시하다. 그리고 드렉슬러는 그것을 로라스가 몰랐으면 했다. 그는 이미 너무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있었고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는 자신이 그 얼굴에 끌려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이 고독한 남자를 사랑하게 되는 이유에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좀 더 고상한 이유가 필요했다. 아름다움 외에도 이렇게 다정하고 강직한 사람을 어떤 이유로 사랑하면 좋은 걸까. 드렉슬러는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


손 안쪽 상처의 열감이 차가운 얼음주머니에 식으며 묘한 쾌감이 들었다. 대장간의 습기가 주머니 겉에 맺혀 팔목을 타고 주르륵 흘렀다. 드렉슬러는 그제야 제 몸에 열이 가득 차있다는 것을 알았다. 제 손을 식히기에 여념이 없는 남자의 정수리를 가만히 보다가 그 위에 입을 맞췄다.
 
“네가 내 사람이라는 게 믿기지가 않아.”
 
이에 로라스는 고개를 들어 답하듯 가볍게 입을 맞췄다.
 
“믿어주지 않으면 이젠 더는 방법이 없네.”

“내가 믿을 수 없다면?”

“그래도 사랑하겠지.”
 
달콤한 말을 하면서도 표정변화 하나가 없다. 둘의 사이는 오래되었다. 일상이 소곤거리고 이불깃이 사부작대는 나른한 날도, 피비린내 가득히 제 목숨을 걸고 쇳덩이가 부딪히는 전장에서 다시금의 약속 하나로 견뎌온 날도, 세는 일이 의미가 없을만큼 많이 지났다.
 
등 뒤에서 로라스를 급습한 적을 무리하게 랜스로 벽에 처박아 넣고 드렉슬러는 그대로 의식을 잃으며 뒤로 무너졌다. 무너진 돔의 아래에 누워있던 드렉슬러의 손을 기억한다. 부서진 갑옷과 푸른 새벽의 공기가 드렉슬러의 차가운 몸 위를 덮어 로라스는 흐트러진 옷매무새로 망가지듯 무릎을 꿇고 그의 배에 머리를 기대었다. 오래된 수로를 따라 번진 이끼 위에 가만히 누워 피투성이의 손을 끌어당겼다. 넓은 홀에 갑옷 절그덕거리는 소리가 울렸고 헤진 가죽강갑을 가만히 쓸어 제 뺨에 대었다.
 
“기다리겠다고 했었지.”
 
“무릎을 빌려주겠다고도 했어.”

“얼마나 무서웠는지 몰라. 내 삶에서 가장 길고 먹먹한 길이었지. 자네에게 가는 내내 왜 자네를 저택에 가둬놓고 멋대로 사랑하지 않았는지 후회하기도 했어.”
 
하지만 오르락내리락하는 드렉슬러의 배에 가만히 누워 로라스는 제 반지로 그를 구속하지 않은 것을 다행스럽게 여겼다. 그것이 자랑스러웠다. 드렉슬러는 강했고 그것은 그의 육체적인 것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는 제 보호 없이도, 홀로도 괜찮았다. 하지만 여지를 주었다. 그 부드러운 곳에, 그의 연약한 부분에 자신을 들여놓아도 좋다고 넌지시 준 암시가 있었다.
 
“사실, 도망갔을지도 몰라.”
 
“응, 알고 있네.”
 
“난 누군가 날 가둬놓는 건 지긋지긋 했거든.”
 
손의 상처는 조금만 손바닥을 펼치려해도 욱신거렸다.

“하지만 난 할 수 있다면 자네를 부드러운 천으로 묶어놓고 싶었어. 언제나 내 곁에 있도록 말이야.”
 
“넌 가끔 소름 돋는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더라.”
 
“농담 같은 게 아니니 말일세.”
 
“알고 있어.”
 
로라스는 드렉슬러의 다친 왼손에 연고를 마저 바르고 붕대를 감아 입을 맞췄다. 드렉슬러는 질린 얼굴을 했다.
 
“정말 징그러운 짓을 잘도 한단 말이야.”
 
“자네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기 때문이지.”
 
장난스럽게 맞춰오는 곧은 눈에 드렉슬러는 시선을 피해 왼손을 가만히 쥐었다.
 
“한동안 물 닿는 작업은 힘들겠네.”
 
중얼거리는 드렉슬러를 두고 로라스는 척척 걸어나가 의기양양하게 책상의 서랍들을 열었다.
 
“자! 다행이 여기 밀린 서류작업이 있네. 그러니 자네가 심심할 일은 없을 거야.”
 
서프라이즈 파티처럼 활짝 열린 책상의 서랍 속에는 터무니없이 많은 종잇장이 있었다. 로라스는 개운한 얼굴로 한켠에 쌓인 종이박스를 책상 근처로 나르기 시작했다.
 
“클랜 업무는 집에 가지고 오지 않기로 했잖아!”
 
사색이 되어 뒷걸음질치는 드렉슬러의 허리를 감아 로라스는 얼굴을 마주하고 방긋 웃었다.
 
“업무가 너무 많아 발명할 시간이 턱없이 부족한 다리오 드렉슬러가 삼일간 사라지는 것도 사실 예정된 일은 아니었지. 나는 자네가 회사 업무에 가담한 이후 책임감을 가지고 함께 일을 하고 있는 동료이기도 하네.”

로라스는 짐짓 엄한 얼굴을 했다. 드렉슬러는 그 얼굴이 우스워 견딜 수가 없는 나머지 속에서 울화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회사 말을 안 듣는 건 사실 네가 제일이잖아. 이제 와서 회사의 충직한 직원 흉내라도 낼 셈이야?”
 
“나는 언제 어디서든 나의 믿음에 걸맞게 행동하려고 노력할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걸 자네도 사실은 잘 알겠지.”
 
“알 게 뭐야! 집에서 잔업하기 생겼는데!”

“잔업이란 말은 사실 맞지않네. 이건 자네의 무단결근이 가져온 사단이니 쉬는 날이 바뀌었다고 생각하는 게 옳겠지.”

더 이상의 말싸움은 시간낭비일 뿐이라는 것을 같이 지내온 시간으로 드렉슬러는 잘 알고 있었다. 정론의 남자. 드렉슬러는 로라스를 만나기 전까지는 고집으로 누군가에게 져본 일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자신의 언변은 훌륭했고, 머리는 뛰어났으며, 원하는 마음은 강렬했다. 그래서 로라스와 언쟁을 할 때면 속이 뜨겁게 타는 듯 했다. 갑갑하고 답답한 외곬수의 남자는 설득이나 협상 같은 단어는 모르는 것 같이 굴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의 의견이 대부분 옳게 보이는 탓에 자신의 말들은 모두 변명이나 하잘것 없는 반항정도로 보이는 것이다.

“사실 어린애 같이 구는 건 넌데 말이야.”

드렉슬러는 한숨을 쉬었다.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군. 같이 하면 금방은 아니겠지만 끝은 낼 수 있을걸세. 자네가 얼마나 집중력이 좋은 사람인지는 내가 가장 잘 알지. 다행이도 다친 손 역시 왼손이 아닌가? 펜을 잡는데 불편함이 없으니 업무 속도에는 지장을 주지 않을걸세. 나는 작업이 끝날 때까지 곁에서 기껍게 도와주도록 하지.”

드렉슬러는 복잡한 기분이 되었다. 로라스는 드렉슬러를 어르고 달래지않았다. 타고나기를 사근하고 다정함과는 거리가 있었다. 대신에 해야하는 일을 짚어주고 옆에 있어주는 것으로 그 다정함을 대신해온다. 사실 그것이 로라스의 다정함일 것이다.

“응, 나도 사랑해.”

그 말에 로라스는 입술이 간질거렸다. 다리오 드렉슬러는 독립적인 사람이다. 혼자서도 아무런 문제 없이 외로움따위는 타지않고 망망대해를 헤쳐 미지의 대륙에 도달할 그런 부류의 사람이다. 스스로의 일은 스스로가 결정하고 주변의 시선은 신경쓰지않는다. 자신이 옳은지 그른지는 중요하지 않아서 그의 행동은 좀체 예측할 수가 없다. 그래서 세상은 그를 괴짜로 부르고 자신은 그의 독립성에 매료된다. 당당하게 빛나는 나의 별. 그 별이 제게 반짝여줄 때의 먹먹한 가슴을 가끔은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는 기분이 들었다.

“사람 얼굴이 잔뜩 달린 서류는 지긋지긋해.”

볕드는 식당의 테이블로 자리를 옮겨 시작한 작업은 아직 끝이 보이지 않았다. 드렉슬러는 리스트 업이 끝난 서류 뭉치를 머리 높이 들어올려 등 뒤로 집어 던져버렸다. 30페이지정도 되는 종이 뭉치가 팔랑거리며 떨어지는 소리에 스트레스가 조금 풀리는 것도 같았다. 로라스는 작성중이던 서류에서 잠시 시선만을 들어올려 기지개를 펴는 드렉슬러를 힐끗보았다. 3일간의 결근은 사실 의도된 바는 아닐 것이다. 어쩌다보니 화장실 가는 것도 잊은채 책상에서 밤낮이 바뀌는 것도 몰랐겠지.

높고 좁은 영국식 집은, 특히 런던에서는 방음이 제대로 되질 않아 드렉슬러는 창문 하나 없는 지하에 작업장을 만들었다. 같은 능력을 가졌음에도 사실 전장에서는 합이 잘 맞지 않아 외근이 다른 경우가 많다보니 생활패턴이 잡혀있는 로라스가 집에 없는 동안 가끔 그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무언가에 열중하기 쉬웠다.

“클랜 업무가 자네에게 배당 됐을 때 홀든 경의 얼굴은 꽤 우스웠지. 어울리는 일은 아니야. 책상과 자네의 그림이 이상하지는 않지만.”

종류가 다르지. 드렉슬러는 괜히 엄지와 검지를 문질러 펜을 빙글빙글 돌렸다. 펜이 돌아가며 끝에 달린 깃털이 휙휙 돌아갔다. 아, 이렇게 일이 착착 돌아가서 눈 앞의 서류가 전부 증발했으면 좋겠다. 다음 더미의 서류를 또 한뭉치 집었다.

“회사는 이상해. 비효율적이고 비이성적인 업무를 아무렇지도 않게 결정한다니까. 포스터 보고 나는 기절하는 줄 알았어.”

“나는 제법 잘 나온 포스터라고 생각했는데.”

“잘 팔리겠지, 내가 워낙 매력적이니까.”

로라스의 손에서 사각거리던 펜이 뚝 멎었다. 펜이 멎은 자리에 잉크가 천천히 배어나왔다.

“멋대로 광장에 마네킹처럼 세워놓고 말이야. 하루종일 구둣발로 서있다 집에 와서 신발을 벗으면 발냄새가 고약하다고.”

“...일이니까.”

누구에게 하는 지 모를 말이 로라스 입 사이에서 흐르듯 나왔다. 드렉슬러는 의식적으로 눈을 깜박깜박 두 번 감았다. 로라스는 가끔 이렇게 귀여울 때가 있다. 말간 아이가 아닌데도 빤히 속이 보였다. 장난을 조금 칠까. 드렉슬러는 턱을 괴었다.

“기왕하는 거 광대모자라도 씌워서 화끈하게 벗겨놓지, 왜.”

툴툴대듯 미끼를 던졌다. 시시각각 로라스의 얼굴에 그림자가 지는 모습을 보는 것이 즐거웠다. 로라스는 짐짓 아무렇지 않는 척 컵을 들어 물을 마셨다.

“멘트도 좀 더 자극적인걸로 바꾸고. 이런 미남을 데려다 군부대 모집 카피로 교묘하게 가릴게 아니라, 뭐가 좋을까. 섹시 가이 상시 대기?”

드렉슬러는 로라스를 살펴보았다. 아마도, 예측일 뿐이지만 속이 뒤집히는 기분일 것이다. 로라스는 이런 류의 농담을 좋아하지 않았다. 드렉슬러가 이 세상 모든 걸 비꼬고 비아냥거리더라도 눈 하나 꿈쩍하지않고 따박따박 따져 들 사람이지만 그게 드렉슬러에 관한 것이라면 이야기가 조금 달랐다. 바짝 마른 입이 달싹거리고 정리되지 않는 단어가 입 안에 뱅뱅 맴돌았다. 의심할 바 없이 짙은 집착을 입 밖에 내는 것은 로라스에게 껄끄러움을 넘어 두려운 행위였고 강렬하고 거세게 타오르는 욕망이었다. 삼켜진 말이 한숨으로 터졌다.

“저열한 단어 사용은 삼가게.”

한 번의 한 숨으로 로라스는 말끔하게 단정한 모습을 되찾았다. 펜 끝이 빙빙 돌았다. 톡톡, 종이 위에 점을 찍고 드렉슬러는 가만히 고개를 기울였다.

“보고 싶지 않아?”

의문이 담긴 얼굴이 눈 안에 가득 찼다. 드렉슬러는 부러 윗치아를 혀로 살짝 쓸어 가볍기 그지없는 표정을 했다. 로라스는 반쯤 감긴 제 눈 위에 입을 맞추는 걸 좋아했다. 졸음을 못이겨 눈을 끔벅대면 자신을 푸근한 곰인형 마냥 그러 안고 쪽쪽거리고는 했다. 그러니, 아마도, 예상컨데 로라스는 이 얼굴에 굉장히 화가 날 것이다. 그런 자신감이 있었다. 로라스의 입매가 단단히 굳는다.

종종 드렉슬러는 순전히 재미로 자신의 인내심을 시험했다. 호기심 많고 실험하기 좋아하는 사람이니까라고 이해를 하면서도 속이 끓었다. 경험을 통해 배운 것은 이런 경우 말미를 남겨주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의미없는 짓은 그만두게.”

“만날 아무 것도 못하게 하네. 드렉슬러, 이것은 안되네. 저것은 안되네. 그것은 그만두게. 자네는 대체 뭐가 문젠가.”

드렉슬러는 엄한 얼굴을 하고 고장난 로봇같이 움직이며 과장된 목소리를 내었다. 명백한 도발에 로라스는 미간을 문지르며 “다리오.”하고 드렉슬러의 이름을 불렀다.

“서둘러 서류작업 먼저 끝내도록 하지.”

어렵게 돌려놓은 화제에 드렉슬러는 전혀 맞장구쳐줄 의사가 없었다. 서류는 지겨웠고 며칠이나 갇혀있던 집안 공기는 텁텁했다. 이 집안에서 유일하게 생동적이고 재밌는 일이라고는 눈 앞의 남자가 스스로 얼마나 참을 수 있는지 싸움하는 것을 관찰하는 것 뿐이었다.

드렉슬러는 로라스의 참을성에게 조금더 과감한 싸움을 걸기로 했다. 손끝에서 돌아가던 펜을 마법지팡이처럼 가볍게 쥐고 팔을 뻗어 끝의 깃털로 로라스의 입술을 간질였다.

“난 다른 걸 먼저 하고 싶은데.”

혈관이 툭툭 터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로라스는 이를 한 번 꽉 물고 드렉슬러를 원망스럽게 노려보았다.

“자네는 가끔 정말 미워.”

크하하학. 박장대소가 터졌다. 드렉슬러는 책상을 탕탕 내리치더니 눈꼬리에 눈물까지 달아가며 숨이 넘어가게 웃었다.

“서류 작업이 너무 지겨워서 그랬어. 용서해줘.”

드렉슬러는 작업을 멈추고 책상 위에 얌전히 올려져 있는 로라스의 두 손을 그러쥐었다.

“알고 있어. 그러니 서둘러서 끝내야지.”

로라스는 답하듯 그 위로 이마를 기대었다. 잠시간의 조용한 시간이 평화로웠다.

“그런데 정말 안보고 싶어?”

“자네 정말...!”

찰나의 평화를 깨고 로라스가 벌떡 일어났다. 손깍지를 껴 뒷목을 기대고 올려다보는 파란 눈은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너만 보면 되잖아.”

정말 알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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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은 아무나 키우는 것이 아니다. 근처 숲에서 조그마한 새를 주워왔을 때 아버지는 그런 말을 했다. 지금의 남자는 어딘가 고장나 바닥에서 버둥거리기만 했던 새를 닮았다. 절박하고, 절실하지만 남의 손이 두려운 운명 앞에서 어쩔 줄 모르는 작은 새.

“웃긴다.”

나는 그것이 정말 우스워서 입가를 매만지며 웃음을 갈무리했다. 새라니. 그를 표현할 땐 네 다리로 땅을 박차는 무쇠소나 돌사자 같은 것이 어울린다. 전쟁마나 버팔로 같은 것도 괜찮겠다. 모두들 그가 예의바르고 다정다감하다고 멋대로 착각하지만 내가 아는 그는 야생의 본능이 잘 갈무리 되었을 뿐인 위험천만한 짐승이다.

이제 나는 사역동물이 쓸모를 잃었을 때를 떠올린다. 그는 땅을 갈거나 씨를 뿌리지않았을 뿐 전쟁을 위해 길러졌다. 전쟁이 끝나버리면 그는 어떻게 될까. 팔이나 다리가 부러져 퇴역하는 군인과는 다르다. 목적이 증발해버리는 것이다. 떠맡아버린 자유의 무게. 그것은 행복할까.

“무엇이, 다리오?”

“전쟁이 끝나잖아.”

다정한 말에 나는 짐짓 모른척 시침을 뗐다. 복구 작업, 개발과 이익의 배분으로 다들 몹시 바쁠 와중의 전에서 우리는 차를 마시고 있었다. 남자는 또 차분하고 단정한 표정으로 창 건너를 넘겨보았다. 인부들이 반쯤 부서진 건물의 잔해를 치우고 그 앞에서는 허름한 모자에 배바지를 입은 어린 소년이 과일을 갈아 주스를 팔았다.

“뭘 할거야?”

그 모습에 괜시리 약이 올라서 나는 스푼을 들어 차를 저었다.

“돌아가겠지.”

남자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 얼마간 창 밖을 보다가 내게 말했다.

“자네는 남겠지만.”

사실이 그랬다. 나는 소속이 어정쩡했다. 드라군의 이름으로 파병되었음에도 원한다면 얼마든지 그곳을 떠날 수 있었다. 가문에 묶인 것도, 나라에 묶인 것도 아니라면 내가 할 일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곳에 훨씬 많았다. 운이 좋게도 차고 넘쳤다.

“당연하지.”

그게 내 대답이었다. 당연하게도 당연한 일을 당연하게 했다. 마치 그가 본국으로 귀환하는 것과 같이. 전쟁이 끝나버렸으니까 같이 전장에 서는 일은 없다. 전쟁이 없으면 군인도 없다. 그러니까 전쟁이 끝난 이곳에는 그는 더이상 있을 이유가 없다. 모든 생물이 자신만의 삶의 터전이 있듯이 어린 시절부터 훈련을 받으며 평생을 전쟁터만을 위해 살아온 그는 이곳이 맞지 않는다.

“고국 생각은 나지않는가?”

“글쎄.”

우리는 눈조차 마주치지않았다. 꼬마가 팔리지 않는 주스를 팔기 위해 손나팔을 만들어 아마도 고래고래 외치고 있을 장면을 바라보았다. 뒤의 건물이 바스라지고 서까래가 떨어져도 잠시 놀랄 뿐 아이는 옷에 묻은 먼지를 털고 장사판을 재정비했다.

“두고 온 것은 없고?”

“그러게.”

어린 시절 새가 다시 생각났다. 새는 회색 깃에 하얀배를 가진 붉은 부리의 문조였는데 나는 아버지의 말에 달음박질쳐 집으로 새를 들여왔다. 집 서고에서 새와 관련된 책이란 책은 모조리 읽었다. 생쌀을 씹어서 먹이고 방에서 가장 채광 좋은 곳에 헌 옷으로 둥지를 만들었다. 새는 크게 움직이거나 소리내지않아서 나는 가끔 가만히 귀를 대고 그 작은 고동을 들었다.

“돌아오겠나?”

남자는 가만히 말했다. 그 소리에 나는 새로부터 이 남자로 돌아와 그의 눈을 마주했다. 고개를 가만히 저었다. 이렇게 가끔 이상한 소리를 한다.

“그럼 내가 남지.”

남자는 다시 창밖을 본다. 나는 그 옆모습을 가만히 보았다. 내가 가진 생태학론과 상식과 포기를 위해 되뇌인 그 당연함들을 그는 단순하고 섬세하지 못한 길로 고스란히 걷는다.

“...집에 방이 남아있어.”

다 나아 놓아준 새는 훌쩍 날아갔다가 이따금 내 창가에서 짹짹이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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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있었다면, 그 때 박살내는 쪽이 좋았다.

알베르토 로라스가 드렉슬러가의 차남을 만난 것은 그가 겨우 제복을 혼자서 단정히 입을 수 있게 되어 나라의 부름을 듣고 한창 목에 힘이 들어갔던 꽤 어린 시절의 일이다.

특별한 능력을 가져 특별히 차출되어 특별한 취급을 받는 어린 아이들이 매일 같이 특별한 훈련을 받으며 특별하지 않은 사상을 주입받는 비밀스럽고 특별한 대대.

처음 만난 드렉슬러가의 차남은 드라군 중에서도 갓 입소한 상대적으로 어린 아이들이 소속된 소대에 있었는데 멘토제로 인해 재수없게 그의 멘티가 된 병아리는 이 때부터 이미 반쯤 울고 있었다.

“특별은 얼어죽을. 그 뿌듯해서 죽을 것 같다는 재수 없는 면상이 날 열받게 하는 거라고. 신병? 지랄이 났지. 니가 뭐라도 되는 것 같아? 여기 있는 놈들은 다 병신들이야. 나라를 위해, 왕가를 위해 목숨을 내놓은 은혜로운 병신들. 그게 뭐 자랑이라고 네, 선배님! 저는 국왕폐하를 위해 어쩌고저쩌고. 안물어봤어. 네 새끼가 전장에서 누굴 위해 뒤지고 싶은지 안궁금하다고. 가르쳐주는 것만 들어. 그외엔 입 열지마, 알았어?”

말이 너무 많아. 천박한 녀석이다. 로라스는 눈쌀을 찌푸렸다. 그 아무도 목소리를 높여 모두를 경멸하고 모욕하는 소년을 저지하지않았다.로라스 그 역시 갓 들어온 신병에 불과했으므로 어디서 시작된 규칙인지 알기 전엔 함부로 나설 수 없었다. 이것이 이곳의 룰인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얼마 걸리지않았다.

시간이 지났고 드렉슬러는 신발 속의 가시같은 사내가 되었다. 첫인상이 그대로 이어져 그는 늘 어디선가 거슬리고 따끔거렸다. 뛰어나고, 뛰어나기 때문에 안타까운 사람은 그의 주위에 있는 사람 뿐인, 어처구니 없는 경우를 그는 잘도 만들어냈다.

그는 성실했다. 투덜거리면서도 맡은 일이나 주어진 일을 허투루 하는 법이 없었고 그가 맡았던 멘티들 역시 그가 괴팍하다는데에는 동의할 지언정 그의 능력에대해선 의심하지않았다. 오히려 근처에 있고 싶지는 않지만 필요하다면 그를 돕겠다는 기묘한 충성심을 보였는데 로라스는 그부분에 있어 늘 의문을 가졌다. 생각해보면 자존심이 상했던 그 날부터 자신 역시 알게 모르게 드렉슬러를 지켜봐왔던 것이다.

소수 정예인 드라군은 그 훈련 상대가 여의치 않아 연무장에서의 대련은 아는 얼굴의 아는 얼굴로 돌아가며 하게 되었는데 로라스와의 대련을 마치고 나서 그는 유난히 뚱하고 탐탁찮은 표정을 지었다.

너는 왜 나한테 진심으로 창을 내려치지않냐, 봐주는 거냐, 엘리트다 이거냐, 내가 우습냐.

되지않는 시비에 로라스는 웃지도 못했다.

너랑 하는 대련은 너무 모욕적이야.

그렇게 드렉슬러가 빈정거릴 때면 로라스는 자신이 입소했던 그 날을 떠올리며 괜히 고수운 생각이 드는 것이다. 모욕적이라. 만족스러운 기분이 이상하게도 들었다.

드렉슬러의 파문은 놀랍지않으면서도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로라스는 제 안에서 근원을 알수 없는 분노가 치솟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찾기도 전에 자신은 이 일에 말을 얹어도 되는 입장이 아니었다. 평소 그와 술이라도 한 잔 기울이는 사이라도 됐다면 이렇게 분하진 않았을텐데.

하지만 귀족이 아니더라도 그는 달라진 것이 없었다. 오히려 가뿐하고 유쾌한 얼굴에 약이 오를 지경이었다. 별 달리 바뀐 것이 없자 로라스는 이 모든 것이 은근히 안심이 되었다. 보라지, 그는 이렇게 강해.

위로의 말 대신 창을 부딪힌다. 대련 후 그는 제 어깨를 가볍게 한 번 툭 쳐주었다. 오늘은 좋았어. 그 말 한마디가 그렇게 쑥스러울 수가 없었다. 돌아서는 드렉슬러의 이름을 불렀다. 오늘 저녁 술한잔 어떤가? 그는 씩 웃고는 저녁 6시, La vie. 하고는 사라졌다. 마시기도 전에 열이 올랐다.

그랬었던 것이다. 둘 사이의 관계는 그 정도는 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인사도 없이 영국 파병을 떠나버리다니. 그 답고도 서운한 일이었다. 아니면 그의 뜻이 아닐 것이다.

로라스는 속이 부글거려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무엇이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지만 견딜 수 없다고 해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에 숨이 막히고 졸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무턱대고 드렉슬러의 이름 앞으로 전보를 쳤다.

긍지고 명예고 뒤지면 다 개소리야. 그는 자신이 조금 무리하는 기색이 보이면 슬쩍 다가와 속닥거렸다. 아마 그는 이번 일에 눈하나 꿈쩍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렇기에 그와 더 멀어진 기분이 들었다. 그의 욕지거리조차 그리울 지경이군. 로라스는 저도 모르게 이가 악물렸다.

영국 행의 이유. 짧은 전보의 답 역시 짧기는 마찬가지로, 지키고 싶은 사람이 생겼어. 불이 붙기에는 충분한 불꽃이었다. 우연하게도 이듬해 로라스는 영국으로 발령을 받았다. 아주 우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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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취해 나가떨어진다. 어린 아이가 떼를 쓰다 지쳐 잠이 들듯이.

겨울은 끝이 났고 봄이 온다. 데워진 땅내음이 아직 찬 공기와 섞여 달다. 그런 종류의 꿈을 꾼다. 나는 너와 몇 년간의 사랑을 했다. 몇 번의 만남과 사소한 이별이 쌓여서 나는 이번에도 너와의 재회를 소망하며 일상을 소화해낸다.

우리는 몇 번을 만나 대화를 하고 사랑을 하고 또 싸우기를 반복했다. 네가 사과를 하거나 내가 사과를 하거나 사과없이 마음이 눈녹듯 녹아내리는 것은 겨울이 끝나고 봄이 오는 것과 닮아 나는 구태여 무엇이 지나왔는지 헤어리거나 생각하지않았다. 너는 늘 그곳에 있었다. 다만 이번의 일이 조금 길어져 그것이 불안한 것이다.

사랑을 하느냐면, 명백히 그러했다. 다 늙은 감정이라고 우스갯소리를 하려고 하면 너는 불같이 화를 냈다. 나는 늙은 감정이 편안한 사람이었지만 너는 감정이 늙는다는 표현을 저의 사랑에대한 시험이라고 생각했다. 아마 거기서 나는 화가 났을 것이다. 둘 모두 불길이 붙으면 끝이 없는 사람들이라 이후의 물어뜯음으로 시작이 잘 기억이 나지않을뿐, 분명 그 처음의 처음에는 사랑에대한 헛된 정의들이 부딪혔을 것이다.

나는 네가 너무 보고싶은 나머지 내 정의를 부정하는 짓을 한 나를 비웃었다. 그래도 이것은 아니다. 그랬다면 애초에 불이 붙지않았을 것이다. 지켜나가고 지나가야하는 세월이 나는 더 많이 있을 것이라 믿고 너를 기다린다. 다만 마음 한 구석이 불안한 이유는, 사실은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으로 잘어울리기 때문에.

너는 오가며 나를 의식적으로 보지않는다. 나 역시 너와의 마주침을 의식적으로 피하지않는다. 우리는 눈을 마주치고 목례를 하고 일을 한다. 나는 이 모든 것이 익숙해져 일상이 된 것에 일순 두려움을 느꼈다. 원래부터 없었던 것. 내가 그간 바라고 보았던 것들은 어디서 왔을까. 나는 의식의 셔터를 내리고 로라스가 하는 양을 가만히 보았다. 그는, 의식하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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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갖고 싶다. 당신은 나를 사랑하니 결코 먼 미래의 이야기는 아닐테다. 그럴 것이다.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그만하게.” 하고 뱉어내었다. 어조도 뜻도 없이 그 뜨거운 눈길을 감추는데 급급한 당신으로 내 마음이 조급했기 때문이다. 그랬을 것이다. 그 뒤로 나는 입술을 못살게 굴었다.

내가 당신의 연인이 된다면 새벽녘 헤매듯 도르륵 구르는 눈동자 위로 피로를 잊은 눈꺼풀이 깜박깜박 덮을 때 다시금 그 위의 위로 부드러운 입맞춤을 얹을테다.

내가 당신의 연인이 된다면 이러한 망설임 없이 날 향한 당신의 사랑이 미처 곁에 닿기도 전에 사랑을 속삭일테다.

내가 당신의 연인이 된다면.

내가 당신의 연인이 된다면.

뜨거운 것이 복받쳐 올랐다. 사랑하고 있었다. 그 사랑이 너무 뜨거워 주체할 수가 없어 나는 마냥 때를 기다려야했다. 그는 순간순간이 사랑스러워서 가끔은 무서운 생각들로 온 몸이 저릿해졌다. 이미 너무 많은 생각들로 가득한 몸뚱아리는 작은 흔들림에도 터져나갈 듯이 예민했다. 매일을 적었다. 속을 게워내듯 참아내었던 그 더럽고 추접한 욕망들의 바닥까지 긁어 적었다. 내가 손을 뻗을 수 없으니 자네가 날 감싸안아.

두툼한 종이뭉치를 한장씩 읽어 넘겼다. 그것은 그렇다 할지라도 썩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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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이해하려고 수없이 많은 멍청한 짓을 했다. 적어내린다. 사랑을 적어내린다. 나는 네가 내게 했던 말을 미처 끝마치지 못하고 펜을 내려놓았다. 소리는 한참을 귓가에서 떠나지않는다.

“그만하게.”

생각해내려고 애쓴다. 그 어조와 표정과 몸짓과 무엇 하나 내가 잡아내지 못한 것들. 사랑은 사람을 멍청하게 만든다고 늘 가시돋친 말을 했다. 사실로 내가 다치지않도록 울타리를 만들어 내 두려움을 가두어 놓았다. 너는 그것을 알았을까? 마른 손을 비벼 얼굴에 얹었다. 두껍고 젖은 수건처럼 숨을 누른다. 이런게 내가 하는 짓이다. 나는 늘 내 목을 조른다. 좀 더 상냥할 것을 하고 말이 안되는 소리를 조언이랍시고 한다. 나는 상냥하지않다. 이것은 사실이고. 나는 상냥할리 없다. 이것은 추론이다.

내 머릿속에서 너는 사늘했다가 안쓰러웠다가 동정을 했다가 질타를 했다. 그러니까 결국 이것은 믿을 수 없다. 빠르게 놓고 너에게 묻는 것이 옳음을 알면서도 나는 사랑으로 머리가 젖어 네게 물을 수가 없다. 이것은 뜨거운 바람으로 마르진 않을 것이다. 찬 공기를 쐰다. 손발이 뻣뻣하게 굳고 뺨이 아린 그런 바람을 기다린다. 이곳의 공기는 서늘하고 습기를 머금었으면서도 그런 바람은 불지 않는다. 그러니까 결국 나는 말하지못할 것이다. 너 역시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내뱉어지지 않으면 결국 감정뿐인 것처럼. 그 순간 뿐인 것처럼.

나는 덩그러니 쓰이다 만 글 위에 놓여진 펜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것은 그렇다 할지라도 썩진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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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두려운가?"

 행위와 제 마음과 그 후의 모든 것에. 질문에 드렉슬러는 웃었다. 

 "넌 네 두뇌를 얼마나 신뢰하지?"

 긴 손가락이 로라스의 뺨을 두드리며 뛰어놀았다. 로라스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시선을 견디며 입술을 물었다. 손가락은 이제 끝을 세워 귓바퀴를 따라 목덜미로 흘러내렸다. 소름이 끼치자 앓는 소리가 났다.

 "나는 내 기억력을 꽤 믿는 편이야. 제 기능을 넘어서 일종의 축복 수준이지. 하지만 그곳이 출근 길의 도로라면. 글쎄."

 손바닥은 가슴팍을 따라 옷 속으로 기어들어가기 시작했다. 로라스는 드렉슬러의 손목을 낚아채어 당겼다. 숨이 느껴질 정도의 거리에서조차 드렉슬러는 눈을 피하지않았다.

 "엑스터시. 이건 두뇌 내에서 일어나는 화학작용이야. Boom! 그래서 너는 그 순간을 얼마나 객관적으로 기억할 수 있지?"

 드렉슬러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허리를 들어올렸다.

 "절대 자신 없다거나 자신의 능력밖이란 이야기는 안하는군."

 "그게 사실이거든."

 "망설이고있나?"

 "조금은"

 "학자라는 건 좀 더 도발적이고 실험적인줄 알았는데."

 "목숨이 걸려있다면 확신이 있거나, 죽을만큼 궁금하거나."

 "그래서 나는?"

 "선택의 기회."

 "이제 와서 비겁하군."

 "명석한 거지."

 "그래서 당신을 사랑하게 됐나봐."

 드렉슬러는 숨을 크게 들이쉬어 가슴을 부풀렸다. 그는 조금은 다시 로라스와 키스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고 곧 이어질 일련의 일들이 꽤 기대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내뱉는 숨에는 잔떨림이 있었다.


 "오늘, 저녁 식사를 같이 할까? 우린 시간이 없으니까 말이야. 이미 보름이 넘게 지났고 28일 째의 너는 날 어떻게든 식탁 위에 올려놓으려 들겠지. 물론 난 그 전에 널 죽이려고 하겠지만, 그건 너무 아쉽고 소모적인 일이잖아. 안그래?"


 "방금까지 잘도 주절댔던 것 같은데."


 "그래서 싫어?"


 '아무말도 하지마, 제발!'


 사실 드렉슬러는 이 후의 일이 조금은 겁이 났고 대화가 길어질 수록 자신의 목소리가 높아진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은 끔찍할 정도로 쾌락에 약했고 앞으로의 일은 전혀 예상할 수가 없었으니까. 하얀불꽃이 튀기 시작하면 큰 마음을 먹은 것과는 별개로 아무 수확이 없을지도 몰랐다. 레코드의 시간은 1시간 남짓.


 "기억을 도와줄 무언가가 있으면 작업이 좀 더 수월해지겠지. 내 뛰어난 두뇌와 이어진 운명을 믿어보자고."


 "갑자기?"


 "믿고 싶어졌어. 배가 고파졌거든."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가볍게 웃었다.

 저녁은 드렉슬러의 집에서 가벼운 빵과 토마토스튜를 먹었다. 대화는 없었고 식사 후에는 약속이나 한 듯 번갈아가며 샤워를 했다. 로라스가 씻고 나왔을 때 드렉슬러는 레코드판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무드라도 잡을 셈인가?"

 질문에 드렉슬러는 짧게 웃었다.

 "녹음을 할 거야. 너랑 나."

 드렉슬러의 손가락이 번갈아 서로를 가르키자 그 소리가 귓전까지 들릴 것처럼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로라스는 헛기침을 했다.

 "한가지만 물어볼게."

 "그러지."

 드렉슬러는 로라스에게 다가가 그의 뺨을 감싸 제 얼굴에 바싹 당겼다.

 "나한테 다시 반할 수 있겠어?"

 두 눈동자는 로라스의 속을 살피듯 좌우로 번갈아 움직였고 그것이 끝남을 알리며 드렉슬러가 눈을 깜박이자 그제서야 숨이 터지고 침이 넘어갔다.

 "아마도."

 "좋아."

 드렉슬러는 로라스에게 키스했다.




 "몇 번이나 멈추라고 말했잖아. 들리지 않은 거야, 못들은 척 한거야?"

 "전혀 듣지 못했어."

 "언제부터? 마지막 기억이 뭐야?"

 "자네가 내게 키스한 거."

 "하지만 뭔가 말하던 걸."

 "무엇을?"

 "그건 지금부터 들어봐야지."

 "어떻던가?"

 "짐승 같았고 자주 물더라. 목덜미는 쓰릴 지경이야."

 "아니, 자네."

 "응?"

 옷을 꿰어입던 손이 공중에서 멈췄다. 드렉슬러는 한동안 바닥을 바라보다가 눈썹을 들어올리며 침대 위에 누워있던 로라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온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며 여전히 나체인 채였다.

 "아파. 허리고 아래고 멀쩡한 곳이 없어. 네가 옷만 입을 수 있었어도 내가 벗고 누워있었을거야."

 "미안하군."

 "넌 어때?"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만 제외하면 나쁘지 않네."

 "아니, 넌 어떠냐고. 날 여전히 사랑하는 것 같아, 아니면 기운이 빠질 때까지 섹스하고 나니 그럴 기분이 아닌 것 같아?"

 옷을 마저 다 입은 드렉슬러는 침대 위로 다시 올라 전처럼 로라스와 눈을 맞춰 기색을 살피듯 눈동자를 굴렸다.

 "예전 같이 자네를 집어삼키고 싶은 기분은 없네. 손가락 하나하나 먹음직스러워서 잘근잘근 씹어 먹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않아."

 잠시간의 침묵이 있었다. 드렉슬러는 가만히 턱을 긁더니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쉽게 됐군. 그럼 이제 정말 레코드 판 하나에 의지해야하네."

 "그 엄청난 두뇌는 제 기능을 못했나보지?"

 드렉슬러는 슬쩍 웃더니 다시금 로라스와 눈을 맞췄다.

 "어젯밤의 내가 겪은 건 굉장히 폭력적인 섹스였어, 환자양반. 왜인줄 알아?"

  그는 되묻듯 깜빡이는 눈을 깔보듯 비웃었다.

 "네 놈이 내 몸에서 나오는 건 모조리 먹어치우려들더라고. 황홀해서 죽을 뻔했지."

 죽을 뻔했다는 말을 또박또박 씹어뱉는 드렉슬러로부터 로라스는 눈을 피하며 침을 삼켰다. 침묵이 이어지자 남는 것은 어색함 뿐이었다. 뱉은 말로써 드렉슬러는 꽤 괴로웠다.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하는 경우는 수도 없이 많았지만 견뎌내지 못한 것은 꽤 오랜만이다. 그 사이에 로라스는 몸을 일으켜 침대머리에 머리를 괴고 한숨을 내쉬었다.

 "내게 원하는 건 데이터뿐인가?" 

"그렇다면."

 손에 얼굴을 묻고 대답하는 바람에 소리가 뭉개졌다. 로라스는 고개를 들어 드렉슬러의 어깨에 괴었다.

 "나는,"

 "너는?"

 "나는 어쩌면, 한 번 더 자네에게 협조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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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좁은 공간에 둘만이 남는 것은 당연하게도 좋지 않았다. 온갖 서류를 정리하기 위한 캐비넷들에 둘러쌓여 둘의 책상이 고작 8피트 정도의 간격만을 두고 마주 보게 놓였기 때문이다. 드렉슬러는 한없이 분주해보이다가도 무언가 생각에 빠지면 정오부터 해가 질 무렵까지 책상에 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움직이지 않는 피사체로, 상상은 달음박질친다.


 처음. 이가 닿았다. 턱은 자연스럽게 힘이 들어가 마치 기름칠이라도 한 듯이 미끄러졌고 이어 단단하고 섬세한 송곳니의 끝이 부드럽게 눌렸다. 커다란 소리 없이 단단한 마찰. 그 둔한 사각거림. 매끄러운 치아의 표면을 지나 치아 사이사이의 그 굴곡을 혀끝이 더듬었다.


 로라스는 이어 연필을 씹었다. 이제는 눈 끝에 그의 그림자라도 어른거릴라치면 목구멍 너머의 꺼멓고 끝을 모를 구덩이 속 허기가 주머니를 쥐어짜기 시작했다. 목구멍을 태울 듯이 쓴 물이 오를 때면 관절에 쇠못이 박힌 꺼먼 쇠막대들이 물찬 주머니를 터뜨릴 듯이 제 위장을 들썩거리고 있는 위험한 기분 마저 들었다.


 시선을 내리고 눈을 잠시 감는 것도 도움이 되질 않았다. 이미지는 뚜렷하고 생생하여 사실 그 존재가 무척 옅음에도 방 안을 한 가득 채운 그의 체취나 손가락들이 스치는 소리들을 더 예민하게 잡아냈기 때문이다.


 그가 서류를 넘기며 책상을 부드럽게 오가는 손과 그 마디, 힘줄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느 새 제 혀는 그의 피부 위를 노니며 그 짠 맛과 피부의 굴곡을 느끼고 있었다. 그의 손등 대신 제 손등에 입술을 누르며 눈을 감고 그 감각을 음미한다. 끔찍한 기분이 들었다.


 일주일이 지나자 드렉슬러는 시선을 의식했다. 등골이 늘 스산했고 숨이 막혀오는 공기를 모른 척 할 수 없었다. 하늘이 돕는구나. 무언가 제 머리를 스치자 드렉슬러는 이런 생각을 했다.


 그는 벌떡 일어나 로라스를 향해 성큼성큼 걸었다. 날이 서 시퍼런 시선이 제게 따라붙고 있었고 이것으로 확인을 할 필요성은 충분했다. 자신은 노려지고 있었다. 테이블 위를 손으로 밀어 엉덩이를 걸쳐앉았다. 냉기로 쑤셔지는 듯한 눈맞춤에 드렉슬러는 빙글 웃고는 로라스의 뺨을 감싸 엄지손가락으로 눈 아래살을 끌어내렸다.


 "충혈은 아직인가?"


 

 끔찍한 스킨쉽이었다. 로라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제 뺨을 쥔 그의 손을 끌어내려 입 속에 쳐박고 싶었다. 손가락 끝부터 씹어삼킬 것이다. 충동이 들어 고개로 손을 뿌리쳤다.


 드렉슬러는 제 다리 사이에 그를 가두었다. 턱을 끌어올려 다시 제 눈을 맞추고 뺨을 눌러 억지로 입을 벌리게 했다.


 "하지만 입맛은 있는거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로라스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 모든 일을 드렉슬러가 장난처럼 생각하고 있다면 그는 이 일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제가 누르고 있는 충동이 얼마나 위험한지에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로라스의 배려에도 불구하고 드렉슬러는 그의 멱살을 잡아채어 의자에 도로 앉혀놓았다.


 "네가 원한다면 내 가슴을 틀어쥐거나 엉덩이를 쥐어짜도 좋아."


 어리둥절한 얼굴에 드렉슬러는 키스했다. 깊고 들이마시는 키스에 로라스는 심장이 두근거려 위장이 다 끄집어내지고 있다고 느꼈다. 거센 파도같았던 충동이 가라앉고 몸은 의자 위로 녹아내린다.


 "그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야."


 드렉슬러는 다시 웃었다.


 내 연구를 도와줘. 그는 말했다. 신체의 반응, 병세의 기간, 임기응변, 끝내는 치료법까지 나는 모두 필요해.


 "내가 어떤 도움이 될지 나는 모르겠네."


 "내게 언제 반했지?"


 하얗고 네모지기만 한 종이에 드렉슬러는 무언가 사각사각 적어내렸다.

 환자, 병명, 상태, 대처 전, 후, 방법, 연관성.

 '환자 취급이군.' 로라스는 다시 한 번 입맛을 다셨다.


 "처음의 식사 때일세."


 이 후로 드렉슬러는 이것저것을 물었다. 반했을 때의 심경, 신체 변화, 자신이 생각 나는 주기, 자신과 만나기 전에도 자신을 생각하는 마음이 점점 커져갔는지, 아니면 괜찮아졌는지. 로라스는 담담히 답을 읊어 나갔다. 수치스러움보다 의자에 잘못 앉아있는 듯한 낯설음이 더 컸다. 자세하고 정확한 답을 하려 집중해나갈수록 드렉슬러 역시 제게 더 집중해오는 느낌이 들었으므로 어찌되든 좋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내 생각하면서 한 적은 있어?"


 이 전까지는. 무신경한 남자라고 로라스는 생각했다. 헛기침을 했고 이것을 솔직하게 말해도 되는지 잠시 머리를 굴리려하다 진중하고 집중하는 드렉슬러의 얼굴에 입술을 꾹 물었다.


 "있네."


 "언제?"


 "최근은 바로 어제 저녁일세."


 "횟수나 주기는 어떻게 변하고 있어? 혹시 날짜나 시간은 다 기억해?"


 "자네 생각이 나 잠들 수 없을 때쯤이나 퇴근하고 직후, 빈도는 짧아지고 유지기간은 길어지는 느낌이야. 상상 속의 자네가 더 열정적으로 변하거든. 이미지는 점점 더 선명해지고 붉어지네. 색이 짙어지면 소리가 들리고 촉감이 느껴지고 끝으로 후각까지 돌아오지. 자네는 늘 유혹적이고, 나는 시간이 갈 수록 자네에게 손을 댈 필요가 없어져. 자네가 날 원하고 있다는 착각을 하게 되거든."


 드렉슬러는 무언가 말을 하려 입을 벌렸다가 다시 생각에 잠기듯이 침음을 내고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도 증세가 심각해지면 결국 해야하잖아."


 그것이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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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라리 사랑이었다면 좋았을까.


 입버릇으로 말하던, 나의 사랑하는 별, 내 소중한 창.


 나는 그가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애진즉 알고 있었다. 그 부드럽게 넘어가는 혀의 소리와 그 입술 끝에 남은 바람을 나 역시 간지러움에 파묻혀 가득 베어물고는 했으니, 모를 수 없었다.


 언젠가 한 번은 그 간지러움이 괴로워 별과 창이 모두 사라지고 어떤 단어가 그 빈자리를 가득 채웠으면 하는 충동에 사로잡혔던 시절도 있었다.


 그래서 내가 그를 사랑하느냐면, 나는 그를 거절했을 것이다.


 나의 사랑하는 별.

 나의 소중한 창.


 괴로웠어도 그랬을 것이다.


 나는 소중한 것이 많았다. 움켜쥔 것이 많으니 더 쥘 수 없었다. 그것은 욕심이요, 죄악이니 필히 벌을 받으리라. 나를 바라보는 그의 파란 바다에 안겨 안락의자에 몸을 뉘이며 그런 생각을 했다. 그 폭풍과 불꽃과 파도들.


 나는 그의 집 벽난로의 나무 타는 냄새가 좋았다. 나무가 타들어가며 나는 묘하게 매캐하고 온기 어린 냄새는 그에게서 나는 종이와 쇠 냄새에 아주 근사하게 어울렸다. 그러다 어느순간 그가 치수를 재기 위해 내게 다가올 때면, 손끝에 묻은 잉크냄새가 그 따뜻한 것들에 섞여들 때면, 나는 시선을 부드럽게 내리기위해 무던히 애를 써야했다.


 그는 나를 사랑했다. 거품을 거둬내던 손길과 어깨 위에 얹어지던 내 손끝의 그 떨림. 그 놀라움. 그 고통스러운 얼굴. 명백하게 그는 나를 사랑했다.


 나는 신에게 기도했다. 그의 괴로움이 녹아사라지게 해달라고. 그의 통증이 사라지는 동안, 가슴이 뻐근하여, 나는 엎드려 빌었다. 떨리는 손으로 묵주를 쥐고 엎드려 그의 고통이, 사랑이 사라지게 해달라고 빌었다. 무아지경으로 몸부림이 나면 가끔씩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이 입으로 들어오기도 했다. 주여,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게 하소서. 나에게 사랑이 없음으로 그가 괴로워하지 않게 하소서.


 역한, 고약한 불꽃의 냄새가 났다. 붉지도 못해 하얀 불이 다른 것을 껴안아 제 몸을 터뜨렸다. 폭발에 몸이 뜨고 돌벽에 머리를 부딪혔다. 충격으로 잠시 뻗어 누워있으려니 하늘이 맑았다. 연기가 모락모락 오르는데도 눈이 부시게 맑았다. 몸이 멀쩡하구나. 역시 그는 대단해. 몸을 일으켰다.


 단순한 메뉴얼이었다. 모두가 알고 있을, 피해상황에 관한 메뉴얼. 폭탄인지 지뢰인지 능력자의 짓인지보다 먼저 파악해야할 현재의 메뉴얼.


 누가 현재로부터 낙오됐는가.


 입에서 괴상한 소리가 났다. 그도 사람이니 실수가 있겠지. 방금의 충격으로 내게 무언가 문제가 생겼을거야.


 다리가 움직이질 않았다. 숨을 쉴 수가 없어서 투구에 손을 올렸다. 하지만 누군가 힘껏 누르고 있는 것처럼 벗을 수가 없었다.


 나는 비척비척 뛰었다. 갑주에 물이라도 가득찬양 몸이 너무 무거워서 바로 걸을 수가 없었다. 창을 힘껏 움켜쥐고 나는 그래도 뛰었다. 그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 연기가 나는 곳으로 나는 가야했다.


 사랑이었다면 좋았을까. 가만히 두었다면 그가 내게 사랑한다고 언젠가는 말했을까. 나는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힘없이 떨어져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안 돼, 안 돼 하며 고개를 젓는 시늉을 했다. 뭐가 우스운지 입술끝까지 당겨올리며 안 돼, 안 돼. 없는 소리가 무겁게 투구를 눌러 이제는 정말 투구를 벗을 수 없게 되었다.


 눈은 깜박깜박 무슨 생각을 하는지 여닫히기만 했다. 충동이 밀려들었다. 거세고 고약한 감정이 겨우내 얼어붙었던 폭포가 녹아내리듯 쏟아지기 시작했다. 뺨을 쓰다듬고 싶었다. 그와 눈을 맞추고 싶었다. 그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고 그로 인해 내가 살아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나는 긴 시간을 건너 드디어 손을 들어올렸다. 그의 눈이 감겼다.

 그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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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inc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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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처가 따끔거린다. 없는 것이 아프다. 비어있는 곳에 손을 대어보고 휑한 가슴 위에 어색한 동작으로 손을 옮긴다. 팔을 잃었다.

 

 ‘글 쓰는 연습을 하세요.’

 

 의사가 말했다. 의사는 길고 지루한 말을 질척이고 끈적거리게 늘여 귓구멍에 붙여놓고 목숨을 달아 제 말에 무게를 더했다. 익숙하지 않은 동작에 익숙해지지 않으면 당신은 죽어요. 없는 소리가 들린다. 치료 외의 처방을 내리며 그는 자신을 무엇으로 여길까. ? 그렇다면 나는 그 제단을 쌓기 위해 놓여진 한 장의 벽돌인가. 의사의 뒷거울에 비친 비딱한 모습에 나는 빙그레 웃었다. 의사는 그것을 보고 따라 웃는다.

 

 나는 왼팔, 왼손의, 왼쪽검지를 들어 타자기의 버튼을 공들여 하나하나 누른다. …, …, …. 일정한 간격의 늙은 소리가 난다. 이가 악물려 사나운 소리가 나자 전쟁 같은 오케스트라의 하모니가 신경을 긁어 A부터 Z까지의 흔적을 남겼다. 나는 미련 없이 타자기를 치워냈다.

 

 펜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펜촉에 걸려 울어버린 종이를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매끄럽게 늘 미끄러지던 곳에서 발이 걸린 펜은 대체 무슨 생각을. 종이는 제가 견딜 수 없는 날카로운 고통에 몸뚱이를 통째로 내어주었다. 종이가 잔뜩 운 자국 위를 손가락 끝으로 떠듬떠듬 쓸어냈다. 손 끝에 잉크가 묻어 파란 자국이 남았다. 주먹을 움켜쥐었다.

 

 전장은 모든지 순식간에 지나가버린다. 아차. 하는 순간 죽음은 목 뒤까지 다가와 제 낫에 턱을 걸쳐놓는다. 죽지 않았으니 다행이다. 그 말은 밑도 끝도 없이 불쾌하게 다가와 나는 웃는 얼굴로 하하, 그렇네. 정말 다행이네. 하며 어울리지도 않는 접객을 했다. 모두가 떠난 그 때, 주름진 미간과 한껏 다친 시선으로 상처를 더듬는 사람이 있었다.

 

 남자는 홀린 듯이 말을 놓는다.

 

 “자네는 이제 창을 쥘 수가 없어.”

 

 그 말에 나는 헛웃었다. 의도도 이유도 알 수 없는 말에 당황을 웃음으로 무마시키려고 했다.

 

 “자네는

 

 남자는 이를 악물었다.

 

 “이제 창을 쥘 수가 없어.”

 

 나는 울었다.

 

 그는 다 잃어버린 것 같았다. 내가 잃은 것은 팔 하나일 뿐인데 그는 그의 삶을 송두리째 잃은 듯이 굴었다. 나는 빈 공간을 허우적대며 주먹질을 했고 그는 이를 앙다문 채로 그 주먹을 고스란히 받아냈다. 나는 그의 품 속에 무너져 한참을 울었다.

 

 다시 글쓰기를 한다. 섬세한 근육을 단련시키는 좋은 운동이다. 이제 알파벳뿐만 아니라 짧은 글귀들을 베껴낼 수 있게 되었다. 곧 머릿속에 있는 것들도 다시 빛을 볼 것이다. 그렇게 좋은 생각을 한다.

 

 ‘나는 끝나지 않았으니까.’

그저 팔을 하나 잃었으니까.’

 ‘밝은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자네는 신을 믿지 않잖아.”

 

 소리가 머리 위에서 떨어진다. . 떨어진 물방울에 잉크가 번졌다. 눈물이 차는 것은 어째서 언제나 늘 갑작스럽고 당황스러우며 부끄러운 일인지. 펜을 쥔 손 위에 손이 얹어진다. 등이 감싸여 안기고 뜨거운 숨이 귓가에 닿았다.

 

 “다리오.”

 

원망이 아닌 좌절에 관해 글을 쓴다는 것은.

 

 “다리오 드렉슬러.”

 

 일어나기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

 

 네가 나를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없는 것의 통증이 가셨다.

Posted by Binc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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