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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취한 듯이 편지 장을 손에 쥐고 끊임없이 반복해 읽어 내렸다. 몇 글자의 이름과 몇 가지의 단어와 짤막한 문장. 그 단출한 문장들. 반쯤 벌어진 입술이 달싹였다. 그가 오고 있었다.




드렉슬러의 외근은 그 자체로 낯선 감이 있었다. 하지만 바다 건너 일련의 사건들이 일반적이지 못하여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부분이 거의 없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평소 그런 단어들로 푹 젖어 살아가는 그가 이 원정에 일순위로 배정을 받게 된 것은 사실상 꽤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늘 상황은 괴상할 수록 그에게 일상이라고 부를 만한 일이 되었다. 특히나 이번 사태는 그 예측불가의 특수성으로 드렉슬러 특유의 변덕스러운 성향과 호기심으로 시작되는 기호에 너무나도 철저히 부합되어 맞아 떨어졌던 것이다. 요점으로, 문제는 드렉슬러가 아니었다.



로라스는 책상 위에 놓인 쓸모없는 종이짝을 노려보았다. 변수가 너무 많은 일에 변수를 만들 요소는 최소화하는 편이 좋다. 이번 일에 대한 윗사람들의 태도는 그들의 말을 빌려 조금 고상하게 에두르자면 대충 이런 모양새가 되었다. 그들이 보기에 제 성격은 불씨 앞의 마른 장작 같았고 사소한 정에 휘둘렸으며 고지식하여 대처에 융통이 없었다. 외곬으로 다른 이들과 공동 작업에 적절치 않으며 단독 행동의 위험이 있어 이번 건은 '절대' 허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실 윌라드는 로라스를 직접 불러다가 위쪽의 의사를 전달하며 절대라는 단어를 몇 번이고 사용했다. 어지간히 그 답지 않은 일이다. 로라스는 상심했다.



공식으로 내려온 파견지원서에 대한 답장에는 처참할 정도의 냉엄함이 있었다. 로라스는 몇 번인가 책상 서랍에 지원서를 넣었다 다시 꺼내보았다. 제 생각에도 부질없는 짓으로 부적합이라는 붉은 도장은 밤새 타닥타닥 써 내려갔던 검은 잉크 위에 시간이 갈수록 깊숙히 스며들었다. 그런데 이 남자에게 일상이라는 단어를 써도 좋은 걸까. 그는 잠시 그런 생각을 했다.



바다 건너 남쪽에서 수증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보고를 받은 관계자 모두 숨을 죽였다. 바다 건너의 전쟁이 또 일어날지도 모른다. 공포로 잠식된 침묵 속에서 모두가 시끄럽게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능력광폭, 불안, 억제. 섣불리 접근 할 수 없는 지대를 가장 전통적이고 고전적인 방법으로 접근하기로 결정이 나자 로라스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석 달. 못해도 석 달이 걸릴 거야.



드렉슬러는 별 일 아닌 양 그렇게 중얼거리듯 말을 흘렸다. 그가 묻지않은 말에 친절히 대꾸하는 일은 도무지 익숙하지가 않아서 로라스는 한참을 끔벅끔벅 아직 꼬리가 남은 겨울 햇볕이 조금 따갑게 그를 내리쬐는 것을 구경했다. 펜이 사각거렸다.



회사에서 비품으로 타자기를 배정해주었는데도 그는 꿋꿋하게 잉크펜을 썼다. 그게 어느 날인가. 로라스는 아마도 그것이 제가 재작년에 준비했던 크리스마스 선물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 해를 떠올리며 찬찬히 드렉슬러를 살폈다. 몇 번을 주의깊게 살펴도 펜촉 달린 펜대가 만년필로 바뀌었을 뿐. 남자는 여전히 변한 게 없었다. 고집스러운 것은 둘이 참 닮았다. 나는 그래서 그가 좋은 걸까. 로라스는 그런 생각을 했다. 잠시. 내가 그를 좋아하나. 물음이 바뀌었다.



“혹시 모르니까 가지고 있어. “



마지막 날의 부름으로 로라스는 열쇠를 받았다.



“별 것 아냐.”



열쇠 쥔 주먹을 움켜쥐고 멀뚱히 서있는 로라스를 보며 드렉슬러는 슬쩍 웃었다. 괜찮아. 덧붙여진 말이 속에서 웅웅 울렸다.



날들은 어느 순간이고 어느 시간이고 같았다. 둘은 사무실에서, 갑판에서, 제 것이 아닌 남의 공간에서 시간을 헤아리지 않았다. 하늘이 흐르고 바람이 불었으며 일상이 업무가 되었다. 한 달쯤 되었을 때, 로라스는 이 넓지도 않은 집의 거실이 휑하다는 생각을 했다.



빈 공간은 찾아오는 것이다. 깨닫는 순간 낯설어지는 시간이 있었다. 로라스는 소파에 길게 누워 슬리퍼를 벗어던지고 읽던 책을 가지런히 가슴 위에 덮었다. 허하다. 내가 저녁을 먹었던가. 천장 위의 조그만 백열등에서 열이 나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그는 이것이 별 것 아니라고 했다. 괜찮다고.



“괜찮아.”



로라스는 눈을 감고 그 때의 어조를 흉내내보았다. 괜찮아. 그리고 슬쩍 웃는다. 그래서 나는 저녁을 먹었던가. 자꾸만 헛생각이 났다.




평범한 날이었다. 로라스는 우편함 속 드렉슬러의 우편물을 가지고 그가 준 열쇠로 문을 열어 입구의 테이블 위에 평소처럼 열쇠와 물건들을 올려놓은 후 코트를 벗어 옷걸이에 걸어놓았다. 그대로 복도를 걸어나가다 언듯 익숙한 갈색봉투를 본 기분이 들어 왔던 길을 돌아 걸었다. 그리고 알베르토 로라스. 제 이름을 보았다.



우편은 한 장의 편지와 두 장의 보고서로 이루어져있었다. 다른 재질의 편지지에 자꾸만 손가락 끝이 간지러웠다. 로라스는 편지를 제일 나중에 읽기로 결정하고 보고서 맨 뒷장으로 종잇장을 감추었다.



보고서의 한 장은 이번 원정 구성원들의 이름 목록과 그 역할에 대한 사본이었고 나머지 한 장은 서두 가득 그들의 노고에대한 의미없는 꾸밈말로 그 자리를 채우다가 마지막의 몇 줄로 상황을 보고, 종료하는 알림문이었다. 로라스는 내용을 빠르게 훑었다. 서두르는 움직임에 자꾸만 문장들이 겹쳐 읽혔다.



“아-”



1차 원정종료. 귀환 예정일 2.10~16. 전원 무탈.



무탈! 그 단어가 어찌나 기뻤던지. 로라스는 그제야 괜찮아.-하고 제대로 드렉슬러를 흉내낼 수 있게 되었다.



굳은 살로 갈라진 손 끝에 사각사각 종이 소리가 요란스러웠다. 로라스는 보고서를 바닥으로 흘리고 그 묘하게 갈색빛이 나는 종이를 양 손으로 쥐었다.




-친애하는 알베르토



우선 집을 봐줘서 고마워. 사실 내일에야 널 불러다가 열쇠를 맡길 셈이지만 아마 너는 거절하지 않을 테니까 미리 인사한다. 사실 꼭 봐주지 않아도 좋았어. 꽤 긴 여행이지만 사람을 고용하면 됐을 일이니까. 하지만 만약 내일 내가 너에게 그 열쇠를 넘기게 된다면-분명 그럴테지만-나는 그냥 그러고 싶어서 그런 거야.



아마도 넌 두 달하고 스무날쯤 지난 이 시기에 이 편지가 어떻게 보고서와 함께 내가 아닌 네 앞으로 도착했는지가 궁금하겠지. 나는 이 편지를 떠나기 전 '그 상냥한 홀든'에게 부탁했어. 무뚝뚝하지만 꽤 괜찮은 녀석이야. 내 눈이 틀리지 않았다면 녀석은 편지봉투 없이도 이 편지를 읽지 않겠지.



별 다른 일은 아니야. 나는 '이 일'이 내 계산대로 문제없이 끝난다면 우리가 내년 2월 14일 오전 중으로 포츠머스에 도착할 거라고 생각해. 아마 그건 틀림없이 그럴테고 말야. 그래서 만약 별 일 없이 보고서와 편지가 네 앞으로 도착한다면 네가 항구로 내 개인 짐을 실을 수레를 하나 보내주었으면 해. 나는 짐이 꽤 많거든.



나중에 보자, 알.



-다리오 드렉슬러


ps. 선착장으로 직접 전보를 친다면 그렇게 번거로운 일은 아닐 거야.






여관의 침대는 꽤 삐그덕 거렸다. 흰 커튼을 걷어내면 다닥다닥 늘어선 낮은 건물들이 보였다. 파랑과 초록과 노랑과 붉은 벽돌과 페인트, 그 알록달록한 색 건너건너로 바다와 배가 있다. 걸어서, 차를 타고, 요 근 이주간 몇 번이나 되걸었던 길은 이제는 눈을 감고도 선히 떠올릴 수 있게 되었다. 코 끝에 빙글빙글 묘하게 바다와 안개와 새벽 냄새가 난다. 들뜬 탓이다.



로라스는 머리맡 달력에 붉은 선들로 하루하루를 헤아리며 날이 가기를 기다렸다. 그처럼 신발을 벗어던지고 침대 위로 뛰어들듯 누워도 보고 베개를 끌어안아 얼굴을 문질러도 보고 이불 속에 몸을 동그랗게 말기도 했다. 읽히지 않는 문장과 떠도는 생각들과 달력의 나열된 숫자들, 시간들, 그리고 첫 날의 하얀 호텔 시트. 그 새 것의 냄새로.



로라스는 부정하는 것을 그만 두었다. 시간은 기다림이었다. 그는 눈을 뜨면 붓의 결이 생생한 흰 나무 격자창 틈으로 불어드는 푸른 바람이었다가 또 잠시간 지기 전 해처럼 붉게 붉게 타올랐다가 조금 시간이 지나면 꿈에 빠져들 남빛 짙은 천장의 총총히 박힌 별이 되었다가 하며 하루들을 보냈다.



2월 14일. 하필이면. 로라스는 오지 않는 잠에 의자를 끌어 창틀에 팔꿈치를 괴고 손을 맞잡아 입을 기대어 막았다. 우연이라기에는 얄궃고 필연이라기에는 너무나 잘짜여진. 이렇게 자신은 결국엔 기대하게 되고 말지 않는가. 신이 계시어 나를 용서치 않으신다면 나는 기어코 과거 흐린 영광 속 역사에 상처로 남은 성자가 되리다. 중략.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중략. 가로등 불빛을 가벼이 얹고 숱많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결국 로라스는 밤을 새웠다.



해가 뜨기 무섭게 로라스는 택시를 잡아탔다. 오랜시간동안 배를 탔으니 늘 헝크러져있는 머리는 더 제멋대로일 것이라고 마음대로 생각하면서 파란 바다를 뒤로 하고 제게로 걸어오는 그 곧은 걸음걸이를 떠올렸다. 상상은 즐거웠다. 그는 행복해보였고 저를 보며 웃고 있었다. 바라보는 것이 좋다. 바라봐 오는 것이 좋다. 그 밝은 눈으로, 아름다운 웃음으로.



로라스는 웃음이 비죽비죽나오는 것을 참지못했다. 주의 신실한 종으로 기도를 멈추지 못하면서도 그 이에 관해서라면 어울리지않게 엉큼한 상상을 하는가 하면, 또 동시에 만남에대한 순수한 기대로 아이처럼 마냥 들떠올랐다. 가슴 언저리를 배회하는 손에서는 손 끝으로부터 진동이 오르고 있었다. 부디 성 발렌티노의 축복이 우리에게도 함께 하길. 드디어 육지의 끝의 끝으로부터 하얀 파도 위로 고동소리가 섞여 밀려들었다. 그랬다. 그가 오고 있었다.



드렉슬러는 부드러운 천 사이 감추어두었던 날선 면도날 하나를 끄집어내었다. 제 계산대로라면 내일 정오쯤 배는 항구에 도착할 것이고 제 집에가면 어쩌면 로라스를 만날지도 모른다. 이것은 열쇠를 주었을 때부터의 생각이다.



석 달동안 기른 머리는 적당히 넘겨 묶을 수 있는 길이까지 왔지만 거울을 보며 드렉슬러는 그것이 꽤나 꼴사납다고 생각했다. 설상가상으로 어중간한 길이의 수염은 몸의 긴 선과 어울어져 날도둑놈처럼 보인다. 이렇게 만나서는 저도 모르게 삼십육계 줄행랑을 칠테다.



되는데로 움켜쥐어 면도날을 세워 쳐냈다. 적당히 적당히 해야 멋이 난다. 저는 늘 이렇게 다듬었다. 머리는 이쯤. 항상 이쯤. 그리고 우묵한 접시에 면도크림을 개어 뜯어먹은 듯한 수염을 살살 밀어내었다. 사각사각. 억센 털을 깎아내는 철 소리가 피부 위의 진동으로 들린다. 단조로운 일상을 타고 생각들이 차곡차곡 몰려들었다. 2월 14일이라니. 로라스라면, 그라면 오늘이야말로 꽤나 로맨틱한 생각을 하고 있지않을까. 문득 떠오르는 수줍은 이미지 위로 무언가 말하고 싶은 입술이 웃음을 참고 꿈틀거렸다. 바-앙. 머릿속을 가득 채운 생각과 또 그 생각들의 위로 파도소리가 섞이며 배 경적 소리가 울렸다. 그러니까 지금 저는, 그에게 가고 있었다.



입항은 순조로웠다. 실려있던 짐들이 인부들의 손에 분주히 옮겨지는 사이로 가벼운 가죽케이스나 배낭등을 메고 승객들은 차례차례 하선하고 있었다. 드렉슬러는 그들 사이에 가만히 서서 이른 아침 안개의 뒤로 멀리멀리 시선을 두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옅은 태양 아래의 안개 뒤로 묘하게 익숙한 걸음걸이의 남자가 저를 향해 조금은 조급히 걷는 것이 보였다. 흐릿하게. 또 점점 뚜렷하게. 안개는 순식간에 개었다. 2월 14일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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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inc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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