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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목의 약국은 늦게까지 문을 열었다. 부지런한 주인은 새벽 같이 일어나 가게 앞을 쓸고 물을 부어 무언가를 쓸어내는데 익숙했다. 밤 늦은 시간의 손님과 실과 바늘, 소독약의 알싸한 냄새는 마치 친구 같았고 비명소리, 탄 냄새, 부서진 뼈를 움직이지않게 고정시키는 것은 너무 익숙한 나머지 다음 날이 되면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러나 한 발 이상의 총성은 오랜만의 것이었다. 드문 드문 이어지는 고요는 뱃속의 이질감으로 고여 묵직하게 남았다.

 날이 저물고 날벌레가 타닥타닥 타들어갈 무렵, 바닥에 무거운 것이 질질 끌리는 소리가 났다. 잔돌이 섬유에 박혀 바닥의 커다란 벽돌을 득득 긁는 무거운 소리. 그러나 발소리는 들리지않았다. 약사는 서랍을 열어 권총을 꺼내 책상 아래로 단단히 쥐었다.

 끌리는 소리가 약국의 문 앞 계단에서 멎었다. 곧이어 실낱 같은 소리가 오래 된 나무문의 틈 사이를 비집었다. 소리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약사는 침을 삼켰다.

 "…누구시오."

 또 한 번 작은 소리가 기어들었다. 약사는 총을 그대로 들어 잠금장치를 풀고 문 바로 옆의 벽에 몸을 숨겼다.

 "누구냐니까!"

 질러 낸 고함으로 귀가 울렸다. 타닥타닥. 날벌레 타는 소리가 이어지고 침묵이 가라앉았다. 조금 더 큰소리가 물에 잔뜩 젖어 울렸다.

 "…선, 생님."

 터지는 탁성에 약사는 힘껏 문을 열어젖혔다. 그러자 오물이 잔뜩 묻은 익숙한 남자가 가장 아래의 돌계단 하나에 걸쳐져 누워있었다.

 "오, 토마스…! 이게…이게 대체…!"

 약사는 총을 선반에 내려놓고 단숨에 계단을 뛰어내렸다.

 피투성이의 토마스는 계단에 기대어 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다리도 팔도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금발의 남자는 도망치는 제 팔뚝에 한 발, 옆구리에 한 발을 박아넣었다. 타들어가는 듯한 뜨거움에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숨이 막힐 때까지 골목을 달리다 하수도의 흙탕물과 오물더미에 몸을 숨기고 이곳까지 기어 도망쳤다. 겨우, 목숨만을 건졌다.

 "선생님…리처드가, 리처드가 죽었어요…"

 울먹임에 무언가가 잔뜩 섞인 침이 튀었다. 토마스는 힘 없이 늘어져 약국 안으로 옮겨지면서도 꺽꺽대며 필사적으로 말을 이었다.

 "듣고 있, 어요? 내가, 내가 봤어요. 벽에…기대어 있었어요…."

 약사는 수도를 틀어 오물을 씻어내기 시작했다. 물소리에 묻혀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얼마나 상처가 깊은지도, 감염 여부도, 심지어 오물로 인해 상처의 위치도 모르는 시각을 다투는 상황에서 토마스가 떠들어대는 소리는 저에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시체는 치료할 수 없으니 이런 이야기는 지금 들어봤자 의미가 없지않은가. 약사는 곧 팔의 출혈을 발견하고 옷을 벗겨 붕대로 상처 위의 팔뚝을 단단히 묶었다. 소독약을 붓자 끔찍한 비명이 터졌다.

 "토마스, 나 여깄네. 여긴 약국이야. 정신을 잃지 않게 집중해. 지금 오물 때문에 상처가 정확히 어딘지 알 수가 없,"
 
 "리…처드가 죽었어요, 선생, 님…! 화이…화이트 칙슷….다 그 놈,들 짓이에요…"

 토마스는 가슴 위를 세워 이제 거의 고함을 지르듯이 핏대를 세웠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에 눈이 터져나올 듯이 붉어지자 약사는 침착함을 잃고 결국 언성을 높혔다.

 "감염이 돼 썩어들어가면 죽을 수도 있어! 다친 곳이나 말해!"

 토마스는 얼이 나간듯 보였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 눈물조차 말라버린 멍청한 눈으로 아무 말도,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제게 화난 얼굴이 두 눈 가득 들어차자 지금까지의 발악은 온데간데 없이 온 몸의 힘이 풀렸다. 토마스는 바로 누워 허망한 얼굴로 웃다가 "네, 선생님. 왼쪽 팔, 오른,쪽 옆구리를 맞았어요." 라고 답했다. 약사는 재게 움직였고 이어 토마스는 시체처럼 늘어져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문양이,"

 "그 더럽고 거대한, 문양이요. 리처드의 이마에 새겨진, 그 죄인의 낙인이요…."

 토마스는 울고 있었다.

 "그, 사람은요. 이제, 그 사람은요."



-


 지하도는 습하고 비린내가 났다. 공기는 탁하고 더러워 숨을 쉴 때마다 매캐한 연기를 들이마시는 듯한 착각이 들었고, 바닥은 이끼로 미끄러워 정장구두 밑창이 자꾸만 미끄러져 불쾌했다. 로이드는 발끝만을 내밀어 이끼 낀 돌바닥을 한 번 문질러보고는 다시 그것을 맨땅에 문질러 닦았다.

 "로이드. 결국 여기까지 왔군."

 "맥그리거씨가 훈계까지 시키시던가."

 제임스는 입술을 비틀었다. 듣는 이가 있건 없건 작업 도중에는 절대 본명을 부르지 말 것. 언제부터인가 둘은 이 세계의 가장 기본적인 룰조차 따르지 않고 있었다. 부서진 규칙은 의미가 없다. 그 의미 없는 규칙에 세워진 왕국은 힘없이 무너진다. 둘은 사람 좋은 미소를 띄우고 마주 웃었다.

 "곧 차가 도착할 거야. 우리 애들이니 겁먹지 말고 갈 길 가면 돼."

 "걱정이 너무 과한 것 아닌가? 상대는 겨우 한 명인데."

 "조심해서 나쁠 것없지."

 "비겁하군."

 "마치 당신처럼."

 둘은 악수를 나눴다.

 "나는 자네가 고꾸라지는 걸 보고싶어, 로이드. 자넨 성공한 사람치고도 아주 뒤가 구린 사람이잖아."

 "지금이 그런 시대 아닌가. 나야 땅에 떨어진 기회를 주웠을 뿐이야. 그리고 다른 이들은 이런 내 위치를 아주 부러워한다네. 부러워하다못해 시기, 질투를 하지. 자네를 좀 보게!"

 로이드는 가볍게 손뼉을 쳐 양 팔을 벌리고 입꼬리를 더 끌어당기며 덧붙였다.

 "평생 뒷처리 신세라니, 정말 안됐군!"


-


 끝없는 낙하가 계속된다고 생각했다. 바닥이 없었고 잡히는 게 없었으니 그저 떨어지고 있다고. 그러다 어느 순간 로라스는 제가 땅에 발을 딛고 서있다는 걸 깨달았다.

 풍경이 낯이 익었다. 드문드문 흙집이 지어진 넓은 황야에는 모래 섞인 바람이 불고 풀도 나무도 바싹 말라 죽어있었다. 순간. 소름끼치는 소리가 났다. 완전히 바스라지지 않은 나무에 겨우 매달린 그네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익숙하다. 모든 것이 익숙하다.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로라스는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황급히 제 모습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뒤에서 두런두런 익숙한 목소리가 난다. 모든 것이 확실해졌다. 이곳은 과거의 전장이다.

 씻을 수 없는 과오, 치욕스러울 정도로 멍청했던 과거의 자신. 휘두르면 휘두르는대로 움직이는, 성능 좋은 꼭두각시 같았던 제 부대는 결국 최전방으로 밀려나 돌격명령을 받게 되었다. 군인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거는 것. 소중한 것을 지켜내는 것을 숙명으로 받아들여야하는 위험하지만 명예로운 직업. 그리고 이것은 명령이니까. 텅 빈 마을이라고 생각했던 곳에서 적의 폭격을 받았을 때, 로라스는 그제야 제가 얼마나 멍청했는지를 깨달았다. 자신들은 고작해야 체스의 말에 불과한 것을.

 로라스는 혼자 살아남았다. 능력자로 구성된 제 부대의 부대원이 자신의 목숨을 마지막으로 건 대상이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은 무엇을 했나. 침상에서 일어나 공로훈장을 받고 진급하여 그 길로 군인을 그만두고 다시 아버지의 뒤를 이었다.

 다시는 이런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자신은 또 한 번 그 지옥으로 걸어들어가고 있었다. 로라스는 모든 것에 한 가운데에 있으면서도 멀리서 모든 것을 지켜보는듯한 기분 역시 동시에 느꼈다. 일이 어떻게 될지 알기 때문에 일은 또 한 번 그렇게 되고 있었다. 그는 이 상황의 주체이면서 또 동시에 관람객이기도 했다. 그렇게 단 세걸음만에 깨달은 것은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절망적인 사실이었다.

 다만 기시감이 들었다. 이 곳은 한 때는 제가 무언가 바꿀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죄책감으로 고개조차 들지 못했던, 그렇게 몇 번이나 보아왔던 광경이다. 정말이지 그간에도 수차례 꾸었던 악몽인데, 몇 번이나 도망쳤던 전장인데. 이상했다. 모든 상황이 익숙하면서도 낯설고 그렇게 될 일이면서도 부자연스러웠다. '제 발로 미끼가 되려 걸어가는 것을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다니.' 로라스는 탄식했다.

 미끼.

 그렇다면 무엇을 위한 미끼였나. 우리는 적군의 모습을 드러내기 위한 미끼였다. 아니, 아니. 좀 더 근본적인 것. 우리는 무엇을 위해 미끼가 되었나. 전쟁의 승리? 대를 위한 소의 희생? 이것은 그렇게 거창하고 위대한 작전이 아니었다. 오히려 천대받는 이들을 미끼로 쓰고자 한 아주 비열하고 더러운 부류의 것이었다. 그래서 누가 가장 큰 이익을 얻었지? 누가 우리를 내몰았는가?

 '수고했네. 고생이 많았어.'

 훈장은 하나가 아니었다. 파란 제복. 악수. 부드럽게 웃는 얇은 입술. 떠오르는 이름이 있었다.

 뜨겁게 타오르는 머리로 이가 악물리고 얼굴 근육이 경련했다. 퍼런 핏줄 속 붉은 피가 두근거려 눈물이 터져나왔다. 떨리는 입술, 흔들리는 시선과는 상관없이 쿵, 큰 소리와 지진이 났다. 붉은 불덩어리가 머리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폭격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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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inc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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