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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떴을 땐 여전히 회색의 격자가 희미하고 일렁이는 어둠 뿐으로 로라스는 몽롱한 정신에 힘없는 손가락으로 이불을 고쳐덮어 눈을 도로 감고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겁내지말고.’ 공기 중에는 텁텁하고 단내가 옅게 남아있었다. ‘조금 어지럽겠지만.’

그러자 닥쳐오는 불안이 명치에 걸려 복통이 일었다. 아아. 숨이 막혀 소리를 낼 수 없었다. 가슴이 뛰고 몸이 저려왔다. 손가락 하나하나가, 발가락 하나하나가 움츠러들어 뻑뻑했다. 막상 돌아와 눈을 뜨니 괴롭다. 이곳에는 그저 고통과 괴로움 뿐이었다. 겨우 살아있는 이 시간이. 그래서 단 한가지의 생각만이 맹렬했다. 가야할 곳이 있었다.

이불을 젖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로라스는 단숨에 머리 맡의 커텐을 잡아뜯듯 걷었다. 해가 오르는 새벽. 하얀 빛줄기가 하늘과 땅의 경계에서 비집듯, 찌르듯 솟아오르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빛에 이상을 느낀 시야로 속이 울렁거려 게워내고 싶었다. 토기를 참아내고 그는 돌연 벽난로로 성큼성큼 걸음을 걸었다. 그리고 그 떨리는 손으로 부지깽이를 움켜쥐어 힘껏 치켜올렸다.

소리만큼이나 요란하게 유리파편이 튀었다. 강한 힘에 반발하듯이 유리는 그 탄성으로 튀어들어 산발하듯 쏟아져내렸다. 시야는 돌아오지 않았지만 거친 숨으로 들썩이는 하얀 셔츠 위로 핏방울이 떨어졌다. 살아있었다.

조급한 소란 속에서 하수도를 향해 차를 몰았다. 맑지않은 정신으로 지르는 소리에도 고용인들은 많은 질문을 덧대지않았다. 로라스는 휘청거리는 몸을 가눠 차의 뒷자석에 겨우 올라타면서도 한 손에는 총을 단단히 쥐었다. 드렉슬러에게 약속을 받아냈으니 그는 자신을 기다려줄 것이다. 그러니 자신도 그의 기다림에 보답을 하여야했다. 그것이 설사 그가 원한 일이 아닐지라도.

쉽사리 돌아오지않는 뿌연 시야로 방 안의 공기가 망막에, 콧속 점막에, 귓속에, 피부에 빠짐없이 늘러붙어 쫓아오는 기분이 들었다. 자신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아직도 어둠 속에서 헛발질을 하고 있었다. 새벽의 숨을 막을듯 끈적이는 스모그 속에서, 영국의 두려운 밤의 끝에서, 오롯이 붉게 흐르던 상처의 두근거림만이 선명했다. 바라는 대답없이 묻고 싶은 것은 많았다. 간절한 갈망만이 새롭게 솟아나는 샘처럼 가느다란 물줄기로 바위 위의 길을 내고 있었다. 정처 없이 흐르는 마음은 이유도 모르고 한 곳에 고였다. 우스울 정도로 불편한 옷을 입고 흐트러져 반지를 낀 손에는 총을 들었다. 몸에서 나는 열로 차창에 기댄 이마 근처에 김이 서려 퍼져나가는 것을 가만 보며 말을 골랐다.

애원을 하든 협박을 하든 그 검지에 반지를 우겨넣을거야. 나와 같은 위치에 앉혀 나로써 자네가 존재할 수 있도록. 그리고 반지를 하나 더 준비해야지. 자네가 악세사리를 좋아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아. 그래도 무릎을 꿇어 기어코 반지를 끼워넣을 생각이야. 그리곤 자네를 움켜쥐고 섹스를 할 거야. 내게 선물한 악몽에대해 지독하게 캐물어야지. 나도 자네만큼이나 고집쟁이라는걸, 자네도 안다는 걸 알아. 덕분에 듣고 싶은 말들이 많다는 걸 알았어. 모두다 침대 위에서 들을 생각이야. 끊임없이 달라붙어선 원한다고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뤄주겠노라 약속을 하고, 물론 난 그 모든 걸 남자들이 흔히 하는 베겟머리 거짓말 따위로 만들지 않겠지. 그럼 자네는 물기 젖은 눈으로 미래를 약속받기만 하면 돼. 이미 그 날카롭고 섬세한 시선으로 내 마음을 저당잡았으니 내 심장은 자네 것이고. 그래, 이미 자네 것이고. 자네는 고갯짓 한 번, 손짓 한 번으로 날 천국으로, 지옥으로 보낼 수도 있겠지. 키스 한 번으로 내가 여태껏 쌓아올린 모든 것을 이용할 수도 있을 거야. 선물할 수 있는 것들은 죄다 이런 것 뿐이네. 그래도 자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어. 지켜주겠네. 내가 지켜주지. 약속하겠네. 약속할 거야. 그러니.


더러운 스모그의 밤과 갓 태양이 오르기 전까지의 네댓 시간의 틈 사이에는 어둠 속에서만 꿈틀거리는 시체가 있었다. 드렉슬러는 제 품안으로 뛰어든 짧은 나이프를 옆구리로 밀어내고 제임스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갑주에 찢어진 제임스의 뺨에서 제 눈으로 피가 튀었다. 거친 가죽의 장갑으로 눈을 문질렀지만 앞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하나는 다행이다. 나머지 시체는 모두 돌무더기의 아래에, 또는 벽에 걸려있으니. 드렉슬러는 그렇게 생각했다.

노인은 가느다란 실들을 엮어서 남들이 듣지 못하는 이야기를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죽은 것들의 속을 파먹고 빈 껍질을 제 하수인으로 부리는 재주가 있었다. 한 쪽에서는 그런 노인을 신으로 모셨고 한쪽에서는 그런 재능을 역겨워했다. 두려운 능력이었다. 죽은 자가 너울거리며 움직이는 것은 죽음을 모르는 용맹함, 제 신체의 한계를 넘어선 파괴력을 뜻했다. 다행인 것은 노인이 예전같지 않아 갓 죽은 싱싱한 시체를 움직일만큼의 힘이 없어 제 생명력을 갉아 먹으며 남의 몸을 비워내어야 겨우 두엇의 시체를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는 것.

말라비틀어진 손가락은 지금도 허공에서 꿈틀거리며 시체들의 양분을 빼내어 빈껍데기를 만드느라 분주할테지. 그리고 곧 알게 될 것이다. 이 곳에서 자신이 움직일 수 있는 시체는 없다는 걸. 그리고 아직 살아있는 시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드렉슬러는 두 눈을 깜박이며 더 열심히 피를 닦아내려 노력했다. 왼쪽 옆구리에서는 피가 흐르고 총알이 스친 허벅지 역시 상태가 좋지않았다.

제임스는 다시금 나이프를 쥐고 덤벼들었다. 흐릿한 형체에 의지하여 드렉슬러는 나이프를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크아아아아아아-!”

불타는 연장을 맨 손으로 힘껏 쥔 듯한 격통이 있었다. 칼은 더이상 파고들지 않았지만 고통 역시 끝날 것 같지않았다. 드렉슬러는 숨을 크게 들이마셔 순간적으로 참으며 제임스의 복부를 힘껏 걷어찼다. 넘어가는 제임스의 위로 올라타 온 힘을 다해 주먹질을 했다. 얼굴뼈가 으스러지고 제 손 역시 골절이 간 것이 느껴졌지만 솟아오르는 피로 숨이 멎을 때까진 손을 멈출 수 없었다. 고통으로 제임스는 왼손을 들어 드렉슬러의 오른손목을 힘없이 쥐었다.

“결국, 졌어.”

울컥. 피분수가 터져올랐다. 눈을 감지못한 고개가 툭 떨어지자 가늘고 보잘 것 없던 금발이 흙과 피에 엉켜 달빛 아래에서 진흙탕을 뒹군 볏집처럼 보였다.

드렉슬러는 이 모든 것에 온 몸의 기운이 주욱 빠지는 것을 느꼈다. 이 시체 위에 창을 꽂기까지 아직 끝난 것이 아닌데 더이상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대로 쓰러져 누웠다. 세상이 일렁이고 어지러웠다. 어쩌면 저도 피를 너무 많이 흘렸는지 모른다.


차는 돌바닥에 스크래치를 내며 덜컹, 자리에 멈춰섰다. 평소와 다른 것이 없었는데도 로라스는 그 주위가 유난스럽게 조용하다고 느꼈다. 제 머리 위로 포격이 쏟아지기 전, 그 시간이 멈춘듯한 순간이 떠올랐다. 아니다. 이 고요는 그것과는 종류가 달랐다. 그럼? 오소소 소름이 돋기도 전에 손 안에 차가운 식은 땀이 고였다. 찬 땀으로 피부는 끈적하고 시리고 뻣뻣했다. 그래, 이 고요는 어떤 것이었지?

로라스는 좀비처럼 걸었다. 맹목적으로 전진하면서도 제가 어디로 가는지 확신 할 수 없었다. 어디로 가야할지는 정해져있는데도 끝이 보이질 않았다. 비척비척. 발소리가 복도를 공허하게 울렸다.

그가 자신을 지켜달라고 말했을 때, 무엇으로부터 그를 지켜야하는지 로라스는 몰랐다. 단순히 화이트 칙스의 미움을 받고 있으니 조직의 일원으로 그를 받아들이면 모두 다 끝나는 일이라고, 나라에서 그를 지키지 못한다면 그렇게 하면 된다 믿었다. 하지만 그는 제 반지를 거절하고 자신을 목줄 걸린 개 취급을 했으며 종내에는 자세한 설명도 하지 않은채 로라스를 시험했고 보기좋게 밀어내었다. 사실은 제 능력을 믿고 콧대높게 군다고, 오래 살진 못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동시에 그에게 호감을 느꼈다. 제 거둬진 목숨에는 치욕이 덕지덕지 묻어 중요한게 무엇인지 볼 수가 없었다. 그의 명예. 갈증. 열정. 그 모든것에 끌렸음에도 그가 제게 던지는 메세지 하나를 읽지 못했다.

“그래서야, 내가 어떻게 아느냔 말이야.”

복도에는 그의 목소리만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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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inc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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