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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렉슬러를 처음 만난 날, 염치는 없지만 그보다 더 절박했던 나는 내 마음을 그녀에게 모두 고백했다. 어린 시절의 망설임과 감각이 무뎌져가던 과거를 거치자 오히려 내가 외면해왔던 모든 감정은 명백해졌고 그로인해 해야만 하는 일은 뚜렷하다 못해 눈이 부셨다. 그렇기에 이미 나와 함께 너무 먼 길을 돌아온 그녀에게 이 고백은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이자 사과가 되었다.


 망설임은 없었지만 무거운 죄책감에 어깨가 짓눌렸다. 대가는 어떤 것이든지 좋았다. 아드리네를 상처입히지 않는 방법도, 말을 꾸밀줄도 몰랐던 나는 그저 담담히 그녀에게 모든 걸 설명해나갔다. 하지만 아드리네는 모든 것을 다 듣고도 나에게 화를 내기는커녕 호박색의 그 커다란 두 눈을 호기심으로 반짝이며 그를 만나고 싶다고 끊임없이 나를 졸라댔다. 나에게 화가 나지 않았냐고 묻는 조심스런 물음에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면서.


 결국 어린아이 같은 투정과 협박이 섞인 아드리네의 부탁에 나는 백기를 들었다. 우리 셋은 가끔 만나 티타임을 갖게 됐으며 걱정과는 달리 교양 있는 그녀와의 대화를 드렉슬러는 제법 즐기는 듯 보였다.

 

 새벽.


 드렉슬러는 처음부터 언제라도 나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날 밤, 어쩌면 그 전부터. 끔찍하게도 그것이 사실이었다. 단지 그와 함께 있고 싶었을 뿐인 나는 그 이후로 그와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도 그가 가장 멀리하는 사람이 되었다.


 담배를 깊이 들이마시고 내뱉으면서 그는 멍한 얼굴로 천장을 응시했다. 매캐한 연기를 피해 그를 더욱 깊이 끌어안으며 아랫배 속에서부터 자르르 떨리는 여운을 즐겼다. 끊임없이 엉켜들어간 기분이 거슬려왔지만 당장은 그의 뜨거운 체온이 더 중요했다. 다시금 허리를 끌어안고 다리에 다리를 얽으며 나는 그의 가슴팍에 이마를 비볐다.

 

 “좋았어?”

 

 거친 목소리가 열기를 삽시간에 가라앉혔다. 싸한 기류가 돌았다. 웃는 얼굴로 감정이 담기지 않은 목소리를 그는 잘도 냈다.

 

 “종종 이런 것도 나쁘지 않겠지.”

 

 말꼬리가 희미했다. 흘려 넣는 말과 함께 드렉슬러는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그의 등은 나를 향해있었다. 넓고 단단해 보이는 등으로 그는 나를 밀어내고 있었다. 어기적거리는 뒷모습을 멍하니 보다가 퍼뜩 든 정신에 다급히 상체를 일으켜 그의 손목을 붙잡아 당겼다.


 “드렉슬러…?”

 

 침묵.

 

 대꾸 없이 그의 어깨너머로 마주친 시선에 나는 바보처럼 잡은 손목을 놓아주고 말았다.

 

 

 

 “굉장히 차가웠어. 방금 까지 내 품 안에 있었다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아드리네에게 둘의 관계에 대해 설명하게 된 것은 생각보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최대한 미루고자 했지만 그렇게 오랫동안 아드리네를 속일 수는 없었다. 잤지? 그 날 이후로 몇 번의 티타임이 지나고 어느 순간 그녀는 돌연 나에게 그와의 관계를 직접적으로 물었다. 대답대신 바짝 얼어붙은 나를 보고 그녀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나는 더 이상 그녀에게 상황을 숨길 수 없음을 깨닫고 처음부터 지금까지의 상황을 사실대로 고해바쳤다. 저녁식사와 포도주, 커피, 별과 덧창, 강압과 체념, 엉킬대로 엉켜버린 실타래. 모두 그녀 없이는 해결할 수 없는 일들 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 일을 그녀에게 설명하면서 문득, 어쩌면 나에겐 그저 하소연할 상대가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면. 몰려오는 두통에 느릿하니 마른 세수를 했다.


 처음에 그녀는 이 상황이 즐거워 보였다. 동의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이자 드디어 갈 데까지 간 거냐고 음흉한 얼굴을 지었다가 이제 자신과 헤어질 수 있겠다고 목젖이 보일 정도로 크게 웃으며 잘됐다는 축하의 말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얘기가 길어질수록 그녀의 얼굴은 굳어만 갔고 이야기가 끝날 때쯤엔 잿빛이 되었다.

 

 

 “이건, 좋지 않은데.”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알고 있다. 이보다 더 나빠질 수도 없을 것이다. 게다가 드렉슬러는 스스로를 계속해서 내몰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나와의 관계를 한없이 가볍게 만들다 결국 또 사라지고 말 테지. 가라앉는 기분과 함께 서서히 고개가 떨어졌다.

 

 “내-에 생각엔 말이지…오히려 잘 될 수도 있겠어.”

 

 “어떤…?”

 

 기대도 못한 희망적인 이야기에 반사적으로 눈이 번쩍 뜨였다. 얘기를 잠시간 정리하는 지 심각한 얼굴이던 아드리네는 곧 턱을 쓸며 시선을 멀리 두었다.

 

 “아드리네…!”

 

 재촉에 깜짝 놀란 듯 동그랗게 눈을 뜬 그녀는 조그맣게 숨을 터트리며 작게 웃었다.

 

 “그는 서툴러. 오빠도 마찬가지고. 하지만 자리만 만들어지면 나는 다리오경이 제자리를 찾아올 거라고 봐. 물론 시간이나 공은 좀 들겠지만.”

 

 우리들의 해피엔딩을 위해서라면 그쯤이야. 그녀는 개구지게 웃으며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자신만만한 태도에 비해 계획은 말도 안되게 유치한 것이었다. 자세한 갈래를 생략하면 아드리네가 이 상황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드렉슬러에게 함구하고 서로 사이가 식어가던 중 옆을 지켜주던 드렉슬러가 나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다는 내용의. 것보기엔 제법 그럴싸해 보였지만-

 

 “요새 이런 내용은 마담들을 위한 주간 소설에도 쓰지 않을걸.”

 

 “더 좋은 생각이라도 있어?”

 

 그런 게 있을 리 없던 나는 입을 다물었다. 아드리네는 그것 보란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생각해봐. 우리가 갑자기 헤어져? 뒷감당은? 그런다고 다리오경이 오빠를 받아줄까? 아니잖아. 이거야말로 그가 책임을 느끼지 않고, 주변의

눈총을 피할 수도 있으면서 결국 셋 다 행복한 결말인걸. 우리가 필요한 건 약간의 시간과 연기 정도라고.”



 나에게서 더이상의 반박이 나오지 않자 그녀는 장미꽃같이 흥분으로 발그레해진 얼굴을 하곤 몇 가지 지시사항을 내렸다. 하나, 그의 앞에서 조급해하지 말 것. 또 하나, 그를 몰아세우지 말 것. 그 밖의 다른 일은 자신에게 맡기라고 했다.

 

 한동안은 예전처럼 지내기로 했다. 갑자기 상황이 변하면 아무리 그라도 눈치챌지 몰랐다. 몇 번의 만남이 있었고, 우리는 그의 앞에서 정도를 달리해가며 가볍게 싸웠다. 당연하게도 드렉슬러는 이젠 모임을 불편해했다.


 어쩔 수가 없어 나오긴 하지만 그녀와 헤어지고 나서 드렉슬러는 항상 언짢아 있었다. 그런 그를 알기에 기분전환 삼아 교외 나들이를 가자고 제안하려던 찰나,

 

 “우리 그만하지, 이제.”

 

 붙잡힌 손을 거두며 드렉슬러가 입을 열었다.

 

 “그만할 때가 된 것 같다.”

 

 또 뒷모습. 그는 내게서 등을 돌리고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뒷목이 싸늘하게 식었다. 순식간에 심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며 온 몸의 피가 빨려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무엇을…드렉슬러….”

 

 말을 하는 동안에도 입 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얼굴 근육이 굳고 눈가가 파르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가 어떤 표정으로 어떤 말을 할지 모든 것이 두려웠다. 그 두려움은 너무나도 큰 것이었다. 나는 겁에 질렸다. 떨려오는 손에 주먹을 힘껏 쥐었지만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내 물음에 주저하는 기색없이 소리를 내었다. 입으로 뱉는 것인지 가슴으로 뱉는 것인지 얼굴을 볼 수 없어 알 수가 없었지만, 그는 똑똑하고 분명하게 소리를 내었다.


 “아드리네 말이야. 너희 곧 결혼도 해야 할 테고. 그럼 지금부터라도….”

 

 도저히 참지 못하고 기어이 그의 양 손을 거칠게 낚아채 고함을 질렀다.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인가…!! 나는 그녀와 헤어질 참이야. 내가 사랑하는 건….”

 

 내가 사랑하는 건 바로.

 

 아차.

 

 드렉슬러는 한숨을 내쉬고 희미하게 웃었다. 마치 예상한 반응인양 담담하게 구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웃는다. 언제나 내가 그를 사랑

한다고 말하면, 그는 웃는다.

 

 “아니지, 로라스. 너랑 나는, 이건 아니지.”

 

 “자네 대체….”

 

 “나한테 너는 남들보다 조금 특별한 정도야. 같이 자기는 하지만 좋은 친구기도 하고. 그래서 그래. 난 그만하고 싶…”

 

 그를 품 안 깊이 가두고 눈을 질끈 감았다. 제발 날 떠나겠다는 말은 하지 말아, 드렉슬러. 이가 악물렸다. 제발.

 

 “방금 것은 못들은 것으로 하지….”

 



 나는 그 이외의 것들을 하나하나 떠나 보낼 준비에 서둘렀다. 아드리네와의 관계, 아버지, 가문, 주위 사람의 눈. 지금 나에게 드렉슬러보다 중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것을 정리하고 그와 새롭게 시작할 생각에 빠져들면 나머지는 정말 아무래도 좋았다.


 하지만 그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는 틈만 나면 이별을 이야기했다. 그가 내가 매여있는 모든 것들을 화제 거리로 만들면 나는 항상 관계없는 일들을 끄집어내어 이야기를 끊어놓는 식의, 그런 괴상한 대화가 계속 되었다.


 그렇게 시간이 갈수록 그가 다시 떠날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사납게 날 몰아세웠고 그럴 때마다 계속되는 두려움과 불안에 나는 깊은 밤 목초지에 홀로 남겨진 양마냥 시퍼렇게 질려 그를 달랬다.

 

 불안할수록 난 더 그의 입술을 찾고 더욱 힘껏 끌어안으며 손에 닿는 대로 끊임없이 더듬거렸다. 키스해줘. 제발 날 사랑한다고 말해줘. 그는 이런 날 밀어내지 않았다. 그저 그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야릇한 미소를 남기면서 다시금 몸을 열고 키스를 받을 뿐이었다.


 식은 땀에 흠뻑 절어 이렇게 불안하게 보내는 하루하루를 더는 견딜 수 없었다.

 

 그 후 시간이 조금 지났다. 자신에게 맡기라며 호언장담을 하던 그녀는 몇 개의 사교모임을 잡고 둘이서 참석해야 하는 행사 중 몇몇을 취소했다. 둘 사이의 관계를 은근히 암시하는 구설수를 띠우고 아랫사람을 시켜 능숙하게 소문을 퍼뜨리면서 계속해서 계획을 진행시켰다. 두말할 것 없이 그녀는 내 든든한 아군이었으며 일은 순조로웠고 이미 모든 것이 끝나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문제는 그 망할 놈의 사진 때문에 드렉슬러가 나와의 연락을 모조리 끊고 집 밖으로 나오지 않으면서 시작됐다. 늦은 저녁이었는데, 파파라치가 그를 주시하고 있었을리 없는데. 아무리 다른 이에게 화살을 돌려도 이번 것은 두말할 것 없이 내 부주의였다. 그래서 더 견딜 수가 없었다. 젠장.


 “젠장…! 젠장, 젠장! 빌어먹을…!”

 

 물건이 부딛히고 박살날 때 나는 괴팍하고 요란스런 소리들이 한껏 날카롭게 공간을 때렸다. 장식장을 발로 차고 식탁 다리를 부쉈다. 현관에서 복도로 응접실에서 식당으로. 발길이 닿은 곳의 가구는 이젠 더이상 멀쩡한 것이 없었다. 눈에 걸린 마지막 의자를 박살내고 문짝마저 날려버리자 그제야 벌벌 떠는 고용인들이 눈에 들어왔다.

 

 “미안…하지만…지금 바로 아드리네를 불러다 줘.”


 숨쉬는 것마저 거슬리고 답답해져 테라스 쪽으로 걸음을 옮기다 발에 종이 다발이 채였다. 헛웃었으나 속은 응어리져 묵직하게 내리눌렸다. 바닥에 널부러진 신문을 힘이 가득 들어간 구둣발로 짓이겨 밟았다. 사진 속에는 현관등 아래, 욕망에 눈이 멀어 그의 입술을 게걸스럽게 집어삼키는 자신이 선명하게 찍혀있었다.


 머지 않아 아드리네가 도착했다.


 


 드렉슬러는 날 만나주지 않았다. 수 없이 많은 메세지를 남기고, 하루에도 몇 번씩 그의 집에 발걸음을 했지만 그를 만나기는커녕 머리카락 한 올 구경할 수 없었다. 매일이 지옥이었다. 모래알 같은 음식을 씹고 그것을 넘기기 위해 억지로 물을 삼켰다. 잠을 못자 뻑뻑한 눈과 쉬지못해 비명을 지르던 몸은 차츰차츰 마취가 덜 깼을 때 처럼 몽롱하고 둔해져갔다.


 일상생활이 될 리가 없었다. 해가 뜨는 것도, 새벽이 오는 것도 그 무엇도 나에겐 새로울 것이 없었다. 분노가 사그라들자 어느 순간부터 모든 것은 그저 고통스럽기만 했다. 오직 멍한 와중에도 발작처럼 떠오르는 그에대한 그리움으로 고통스럽기만 한 그것들을 억지로 견뎌내며 하루를 보냈다. 날이 어떻게 지나가는지 나는 관심도 없었다. 드렉슬러. 드렉슬러. 렉스. 내 소중한 별.


 익숙해진 온기, 그의 체취, 목소리, 내가 그에 대해 기억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나를 괴롭히며 그가 그리워 미치게 했다. 그를 만나고 싶었다. 그를 다시 볼 수만 있다면 직접 가슴을 갈라 심장을 꺼내도 괜찮았다. 이 괴로움보다 그 고통이 차라리 더 나을 것 같았다.


 크루그먼으로부터 연락이 온 것은 기사가 난 뒤 2주가 지난 날이었다.

 

 


 “얼굴이 마치 야차 같습니다, 알베르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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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inc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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