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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자면 그는 일종의 로맨티스트다. 별을 쫓고 늘 끊임없이 상상하며 움직여 현실을 살아가지만 그 자리에 머물러 살아가는, 고인 샘물이다.

 

어느 순간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모든 것이 사로잡히는 때가 있다. 흔하지 않지만 흘러가버릴, 아주 단순하고도 중요한 생각 말이다. 다리오 드렉슬러에게 이것은 별마저 저버린 새벽녘에 제 서재의 파일철 위에 나란히 새겨진 듯 적힌 제 이름을 본 순간 떠올랐다.

 

일종의 나열에 그는 순식간에 질려버리고 말았다. 정말로 깨달아버리고 만 것이다. 지겨워서 죽어버릴지도 몰라. 이것은 전쟁의 시작 전에 습관처럼 중얼거리던 말이다. 그는 고개를 들어 제 주변을 둘러보았다. 변하지 않는 일상, 변하지 않을 제 자리, 변하지 않는 세상, 변하지 않을 제 생각.

 

1934. 34. 달력은 제 나이를 떠올리게 했다. 몇 번이나 이런 순간이 찾아왔었지? 그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시계는 계속 움직였다. 어린 시절보다 빠르게. 또 의미 없이. 끊임없이 떠오르는 아이디어들. 생각들. 의욕. 성취. 갈망. 욕구. 저를 살아나가게 했던 것들이 몸을 불렸다.

 

뻔뻔하기 그지없이 당연스럽게도 그런 것들에 의지해 저는 살고 있었다. 수없이 많은 이들이 죽고 죽어나가는 상황 속에서 몇 번인가 시체를 밟고 전진한 적이 있다. 얇은 천과 그보다 두꺼운 철판, 다시 철판, 천조각, 그 아래의 살덩이. 그 감촉을 기억하느냐 묻는다면, 아니. 3의 눈을 통할 때는 비참하고 괴로웠던 일들이 정작 바로 제 발 아래에서는 하나의 과정이 되었다. 그 좋은 머리로, 그 비상한 두뇌로 기억해내는 것은 효율을 위해 걸러진 필요한 데이터들뿐으로, 저는 정말 삶을 살고 있는 것인가. 나는 운명을 살아간 것이 아닌가. 최악이었다.

 

그는 자존심이 강했다. 모든지 스스로 결정하지 않으면 안됐고 그래서 가문에서 퇴출당했으며 그래서 그것이 아무렇지도 않았다. 새벽의 생각은 참으로 무서운 것이었다. 그래서, 무언가가 내 삶을 살고 있다면. 사로잡힌 생각은 털어내기도 전에 스며들었다.

 

상냥한 목소리가 등 뒤로부터 굳어버린 어깨를 감쌌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제 이름이다.

 

다리오 드렉슬러는 알베르토 로라스가 좋았다. 명백하게 로라스는 드렉슬러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는 제 욕망을 참아는 냈지만 숨길 줄을 몰랐다. 그리고 그것에 눈이 어두워져 제 앞을 잘 보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드렉슬러가 제 마음을 숨겨놓고 꺼내지 않는다는 것을 몰랐다. 참아내지 않아도 좋을 관계가 되어서도 그것만큼은 몰랐다.

 

날 사랑해?”

 

멀뚱히 저를 쳐다보는 시선에 당혹스러워하던 로라스의 얼굴에 온화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것은 정말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는 눈가를 휘고 입꼬리를 끌어당겨 환하게 웃었다.

 

그래. 사랑하네.”

 

로라스는 제가 그 말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쁘다는 듯이 굴었다. 드렉슬러는 그의 감정들이 시간에 따라 옮겨 다니는 것을 자세히 보았다.

 

사랑하네. 말을 마치고도 사랑이라는 단어는 입안을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로라스는 드렉슬러가 몹시 좋았다. 그의 첫인상은 처음에는 그저 그랬다. 늘 변덕스럽고 제멋대로에 이기적으로 보였으니까. 하지만 그곳에는 맥락이 있었다. 그는 그저 자기자신을 확신하는 사람이었고 스스로를 믿었으며 그만큼 사랑할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당위성을 따지자면 그렇다는 것이고 사랑에 빠진 것은 그저 저항할 수 없는 욕망에 의한 것이었다. 한 번은 왜 저를 사랑하게 됐느냐는 물음을 받은 적이 있었다. 로라스는 그 질문에 대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것은 그저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 로라스는 아무 경험도 없는 신출내기 기사도 아니었고, 여자를 모르는 갓 입학한 아카데미생도 아니었다. 그는 매력적이었고 신사적이었으며 또 언제든지 그를 원하는 여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기사도에 관해 고루하게 적혀 내려진 삼류 연애소설처럼 사랑을 나눌 기회가 충분히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사랑의 종류 중 하나였음에도 만족스럽게 뜨겁지 않았다. 그 끝에서 그는 늘 제대로 된 사랑이 찾아오리라고 믿었다.

 

이로써 로라스 역시 로맨티스트인 셈이다. 물론 드렉슬러와 조금은 다른 종류의. 로라스는 제가 그에게 제 사랑을 고백하던 날을 떠올렸다. 드렉슬러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어떻게 제게 사랑을 고백할 수 있느냐 물었다. 그 질문에 로라스는 드렉슬러의 사회적 위치, 성별, 또 세상의 편견에 관해 자신의 굳은 다짐을 설명했다. 드렉슬러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음을 털어내듯 웃고는 다시 말했다. 고백으로 잃어버릴 우리의 관계에 대한 두려움을 어떻게 이겨냈느냐. 그것이 그의 물음이었다. 로라스는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고는 오른손을 왼 가슴 위에 얹어 답했다. 내 온 마음으로.

 

관계는 섹스가 키스보다 빨랐다. 육체적 욕망의 뒤를 드렉슬러는 기다린다고 했다. 제 육체가 로라스에게 매력적이었을 것이라 기대하기는 어렵지만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지 않겠느냐, 침대 위에서 드렉슬러는 농담조로 웃었다. 로라스는 그 모습 뒤의 두려움을 읽었다. 그가 겁을 내는 것은 처음 보았다. 두려움의 근원지를 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자체로 묘하게 흥분이 되었다.

 

첫 사정으로 드렉슬러는 처음과는 달리 굉장히 부끄러워했다. 흥분의 열기인지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어서는 지금처럼 또 가만히 저를 올려다 보았다. –둘의 첫 체위는 정상위였다. 로라스는 여전히 이것을 제일 좋아한다.- 드렉슬러는 제가 어떠했느냐고 가만히 물었다. 마치 제가 그를 강간한 기분이 들어 로라스는 순간 죄책감에 빠져들었다. 그것은 순식간에 제 영혼을 물고 흔들어댔는데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 있을만한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투박하지만 긴 손가락이 우아한 그의 양 손이 제 가슴팍을 밀어내려 들었다. 로라스는 당혹으로 그 양손을 베개 위로 내리누르고 정신 없이 그의 얼굴 곳곳에 입을 맞추며 드렉슬러에게 키스를 애원했다.

 

그리고 드렉슬러는 그 애원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로라스의 생각보다 드렉슬러는 그를 먼저 사랑하고 있었다. 그저 숨기는 것이 더 능숙했을 뿐으로, 제 속도 오랜 시간 동안 까맣게 타 들어가고 있었다. 제게 외면은 타고난 것처럼 익숙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과는 늘 맞서 싸워왔기 때문에 저도 몰랐던 일이다.

 

사랑. 드렉슬러는 이 단어가 껄끄럽기 그지없었다. 그 앞에서 저는 저항도 해보지 못한 채 끌려들어가고 만다. 로라스를 사랑하고 있느냐면 그랬다. 너무나 열렬히 사랑하여 제 마음을 뱉어낼 용기조차 내지 못할 만큼 사랑했다. 자신은 용맹했고 똑똑했으며 지적이고 근사했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너무나도 겁쟁이어서 놀랍게도 저는 한 번도 로라스에게 사랑한다 말한 적이 없었다. 그에 반해 로라스는 어떠한가.

 

나는 자살할 거야.”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편히 기대며 드렉슬러는 늘어지듯 말했다. 로라스는 큰 충격으로 떠듬떠듬 입을 열기 위해 입술을 달싹이며 한 발짝 앞으로 나왔다. 개의치 않고 드렉슬러는 말을 이었다.

 

만약 내가 자살한다면,”

 

그만.”

 

낮은 목소리가 떨림을 가득 안고 흘렀다. 평소보다 묵직한 소리는 명령이었고 곧 절망이었다. 다시금 입이 열리자 결국 로라스는 빠르고 힘 있는 걸음으로 드렉슬러에게 뛰어들었다.

 

그만. 그만해.”

 

큰 소리가 났다. 고르지 못한 숨이 쉭쉭거렸고 드렉슬러는 그 소리가 제 심장부근까지 저릿하게 하는 것을 알았다. 밀어내는 손길에 로라스는 생각보다 쉽게 밀려났다. 그는 절망으로 잔뜩 일그러진 눈을 한 주제에 드렉슬러를 안심시키려 억지로 웃고 있었다. 드렉슬러는 이것으로 로라스가 제게 완전히 매여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꼈다. 그래서 더욱 더 말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왜 그런 소리를 해. ? 그만하게.”

 

로라스의 눈 앞의 드렉슬러는 첫날의 침대 위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다만 이번에 드렉슬러는 스스로 로라스의 목에 팔을 감아 그를 다시 힘껏 제 품에 안고 속삭였다.

 

만약 내가 자살한다면 알베르토, 그건 널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야.”

 

드렉슬러는 로라스의 정수리에 몇 번인가 입을 맞췄다. 성스러운 의식처럼, 이러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그것은 그간의 무엇보다도 자연스럽게 일어났다.

 

사랑해, 알베르토. 사랑해.”

 

드렉슬러는 로라스를 사랑했다. 스스로를 사랑하는 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그 새벽 내, 그리고 그 아침, 점심과 저녁까지 그는 그간의 제 결정들에 관해 끊임없이 고민했다. 생각이 갈무리되기 시작하자, 그것이 먼 미래일지 가까운 이래일지는 알 수 없었음에도 그는 이미 이 생의 끝에서 스스로가 자살하고야 말 것임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갈망하는 자유를 얻는, 가장 근사치에 가까운 마지막. 자신은 이제는 이것을 열망할 것이다. 그것은 예견과 같은 종류의 깨달음이었다. 그리고 이 잔인한 계산 속에 로라스가 서있었다. 제 사랑은 그에게는 마지막 배려가 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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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inc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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