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tumblr : http://bincannote.tumblr.com twitter : @bincannote Bincan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65)
Faith&Spear (65)
Total
Today
Yesterday

달력

« » 2024.10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최근에 올라온 글

 여유로웠던 얼굴이 단숨에 일그러졌다.

 

 털썩. 삐그덕.

 

 의자 소리가 요란했다.

 

 "젠장"

 

 드렉슬러는 양 손에 얼굴을 묻었다.

 

 원하던 대답을 들었다. 미련은, 남는 것은. 제겐 이젠 정말 시간이 없었다. 날짜는 코 앞으로 다가왔으며 리처드가 준비한 선물은 제게 들어맞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지만. 약한 단어들이 제 나가는 길에 발을 걸었다. 마음의 준비는 다 되었었던 것이 아닌가. 아니다, 준비는 모두 되었다. 방금은 잊혀질 그 조금 서러운 것에 작별인사를 했을 뿐. 그리고 조금, 아주 조금 기대했을 뿐. 꼴이 우스웠다.

 

 파란 눈이 번들거렸다. 개는 낯선 곳이 두려운 듯 밝은 등을 향해 몇번이고 축축한 코를 움찔대고는 다음을 기다리듯 얌전히 드렉슬러를 바라보았다. 드렉슬러는 흐린 초점으로 그 끝에 눈을 맞추어 무릎에 턱을 괴었다.

 

 "멀리 떠날 거야. 네 녀석이 내 기억도 다 먹어치우면 좋을텐데."

 

 소리를 지르기에는 미적지근하고 울음을 터뜨리기에는 차오른 물이 얕았다. 어찌하지 못할 답답함에 드렉슬러는 빙글빙글 웃었다. 개는 두려운 듯 다리 사이로 꼬리를 감추고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드렉슬러는 제 목이 부풀어오른다고 생각했다. 알러지 반응처럼 콧속이 답답해지고 점막이 부풀어 세포 하나하나에서 삐걱삐걱 소리가 날 것 같은 불쾌감을 느꼈다.

 

 "다 씹어먹으라고.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네가 보고 있는 것, 듣고 있는 것 전부 삼켜대고 있는 걸 알아. 녀석은 모르겠지. 아무것도 모를거야. 자, 어서! 죄다 먹어치워보라고!"

 

 그는 결국 괜한 시비를 걸고야 말았다. 엉망으로 꼬여버린 삶으로 휘는 눈가와 내질러진 고함에 개는 공포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뛰어오르는 대신 점점 뒷걸음질만쳤다. 덜덜, 그 떨림이 눈에 보였다. 젠장. 드렉슬러는 나쁜 사람은 못되었다.

 

 "이리와."

 

 개는 방금의 두려움은 잊은 양 또 슬금슬금 벌려진 팔 사이로 파고들어 드렉슬러의 어깨에 턱을 괴었다.

 

 "멍청해가지고."

 

 누구에게 하는 이야기인지 저도 도통 알 수가 없었다. 파묻은 코 끝의 털이 부드러웠다.

 

 "가끔 기억해줘."

 

 털 사이로 손가락을 묻으며 드렉슬러는 좀 더 숨을 깊이 마셨다. 시간이 갈 수록, 개를 끌어안을 수록 손

의 떨림은 점점 더 심해졌다. 두려웠다. 욕심과 이성사이에서 드렉슬러는 고뇌하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올 수록 모든 것이 두려워지고 있었다.

 

 


/

 어두운 밤이었다. 그 날 이후로 로라스는 더이상 제 등을 끌어안지 않았다. 다 잘 되어가고 있었다. 14일째의 새벽에 드렉슬러는 가죽자켓의 깃을 세워 얼굴을 가렸다. 검은 모자를 눌러쓰고 시궁창을 따라 걸었다. 썩은 진창이 신발 바닥에 늘러붙고 괴상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점점 익숙한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이끼 낀 판자를 두드렸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오렌지 빛 등불과 주름 자글한 노인이 얼굴을 보였다. 콧수염이 찡긋거렸다.

 

 "영감, 늙었군."

 

 "네 놈도 금방이야."

 

 리처드는 등불을 후-, 불어 끄고 길을 열었다. 드렉슬러는 비좁고 어두운 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어둠이 찾아오고 창가의 별빛으로 곧 실내가 희미하게 보였다.

 

 "선물은 어떻게 했어."

 

 "내 것이 아냐. 답장도 했었잖아."

 

 "네 놈은, 마음이 약해서 안되는 거야."

 

 리처드는 제 입가를 움켜쥐었다.

 

 "프란시스코네 아들놈이 군에 들어갔다는 소식은 그렇게 놀라운 얘기는 아니었어. 로라스, 그 집안 놈의 자식들은 터뜨리고 쏘아대는 거라면 환장을 하는 녀석들이니까. 제 아버지와 사이도 좋지 않던 녀석이고 하니 제 살길 찾으러 나갔겠거니. 다들 그랬지. 그런데 몇 년 전에 제가 먼저 돌아오겠다고 한 거야. 프란시스코는 몸이 좋지 않았어서 자리를 보존하기 힘든 상태였어. 조직을 맡기기엔 얼간이 녀석들 뿐이었고. 아마 얼씨구나 했겠지. 조직 내 조그만 전쟁후 그렇게 들어앉은 자식을 나는 너한테 보냈다. 네 놈도 사실 이유는 알고 있잖아."

 

 리처드는 빠른 걸음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무 잔에 와인을 가득 채워 단숨에 반쯤 비웠다. 와인 방울이 맺힌 콧수염이 바르르 떨렸다.

 

 "당신은 너무 생각이 많아."

 

 드렉슬러는 엄지로 검지를 문질렀다. 톡톡, 식탁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거절하려고 했다. 네 놈은 이런 일이라면 질색을 하니까. 그런데 고지식한 군바리, 그 냄새가 지독하더군. 그 자식이 내게 인사를 했단 말이야. 허리를 깊이 숙여서, 이렇게, 죽은 사람한테 하듯이 말이야."

 

 리처드는 와인을 한모금 더 마셨다.

 

 "누군가가 보낸 것도 분명해 보였어. 큰 거물. 군인의 뒤라면 분명. 그런 생각이었지. 그대로 보냈다가는 네 녀석 성질머리론 퇴짜를 놓았을테고, 그래서 이름을 달아보냈다."

 

 드렉슬러를 바라보는 리처드의 눈이 일렁거렸다. 붉어진 코는 금방이라고 훌쩍거릴 듯이 보였다.

 

 "별이라면 응당 빛이 나야지. 내 형은 별을 타고 우주로 갈 생각이었겠지만 나는 그런 야망을 갖을 정도로 큰 그릇이 아니야. 너도 알고 있겠지."

 

 "조셉은 해도를 펼쳐들었고 영감은 옥상으로 날 데려갔지. 여전히 원망하고 있어. 별이 빛나던 밤하늘아래말이야. 녀석은 날 좋아해. 그러면 안 되는 거라고."

 

 "그 때는, 그게 좋은 생각 같았어."

 

 "조셉은 내게 늘 자신을 아버지라 부르라고 했어. 난 한 번도 그를 그렇게 부른 적이 없고."

 

 "그래, 그랬겠지. 얼마나 멍청한 녀석이냐, 내 동생이라는 놈은."

 

 리처드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Mi padre."

 

 무거운 공기에 웃음기가 가셨다. 어둠 속에서 등불에 눈만이 번들거렸다. 추위가, 그 찬 공기의 무게가 옷속으로 파고들어 뼈가 시렸다. 해가 뜰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새벽이 가고 있었다.


 "감사 인사하러 온 거야. 몸 조심해. 간다."

 

 별이 지고 있었다.

Posted by Bincan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