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tumblr : http://bincannote.tumblr.com twitter : @bincannote Bincan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65)
Faith&Spear (65)
Total
Today
Yesterday

달력

« » 2024.11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최근에 올라온 글

 어린 드렉슬러는 배와 땅과 아버지를 모조리 잃고 짐승 취급을 받으며 짐짝 사이를 굴러다녔다. 조그만 머리통에선 수없이 많은 생각들이 떠다녔지만 대부분이 지금 당장 써먹을 수 없는 것들뿐으로 이것들이 왜 지금 이렇게 솟아나는지 알 수 없었다. 채울 수 없는 갈증이 일기 시작한 것은 그 때쯤으로, 머릿속을 끄집어 낼 수 없는 답답함이 얼마나 괴로운 것인지 그제야 알았다. 조그만 톱니바퀴와 번쩍이는 금속들이 저와 함께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화이트 칙스의 수장 노엘 맥그리거의 괴상망측한 성벽은 그런 드렉슬러를 더 힘들게 했다. 까만 뱁새눈의 남자가 제 아버지를 쏘고 저를 보며 고약하게 웃었던 것을 기억한다. 뛰고 달리고 부딪히고 박살나는 그 소란을 적막으로 기억한다. 두근거리는 조그만 가슴팍에 그 커다란 옷과 일지를 끌어안고 두려움에 질려 책상 뒤의 구석지에 쪼그려앉아 벌벌 떠는 것이 고작이었다. 붉은 별이 질 것을 알았다. 총소리가 나고 선창으로 언제나 굳게 서있던 두다리가 공중에 붕 뜨는 것이 잠시간 보였다. 아버지. 아버지. 바다냄새가 짙게 났다.

 

 노엘은 금발의 파란눈과 전형적인 아일랜드계의 골격을 지닌 백인으로 지독한 백인우월주의자였으나 애석하게도 제 어머니가 집시라고 했다. 이것은 조셉이 얘기해준 것이다. 남자는 늘 어린 소년을 끼고 있었다. 흑인이거나 라틴계가 대부분이었으며 그와중에 금발은 없었다. 남자는 제 금발머리를 싫어했다. 여자아이는 싫다. 임신은 끔찍하므로. 백인아이도 싫다. 그 금발이 싫으므로. 혼혈도 싫다. 그 존재 자체로 불경한 것이므로. 그 축축한 입으로 드렉슬러의 어깨를 집어삼키며 노엘은 잘도 떠들었다. 드렉슬러는 끊임없이 훑어지고 짜내지고 훌떡훌떡 동전의 앞뒷면마냥 뒤집어졌다. 이야기는 체액으로 더럽고 특유의 냄새로 지독하여 몸이 찢어지는 고통 속에서도 잊지 않을 수 있었다. 어쩌면 남자는 제 자신이 싫었는지도 몰랐다.

 

 조셉은 그걸 알았다. 그래서 자신을 계획에 끼워넣은 것이다. 그것은 드렉슬러도 알고 있었다. 자기혐오만큼 무너지기 쉬운 것도 없단다. 주방장이 엉망인 식당은 문을 닫아야지. 그리고 새 가게를 열거야. 조셉은 그 조그만 눈을 반으로 접고 콧수염을 실룩이며 웃었다. 드렉슬러는 그것이 그렇게 역겨울 수가 없었다.

 

 니노. 아이는 그저 사랑받고 싶었다. 매음굴에 굴러다니던 심부름 꼬마를 거둬준 것은 따뜻하고 커다란 손으로 퉁퉁한 배가 넉넉한, 재밌게 생긴 신사였다. 남자는 아이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었고 토시하나 틀리지 않고 말을 외우는 니노를 자랑스러워했다. 적어도 니노에겐 그렇게 보였다. 얼굴 모르는 아버지나 마약에 찌들어 매음굴을 굴러다니는 어머니보다 남자는 훨씬 근사했고 고상했으며 또 친절했다.

 

 니노는 남자를 굉장히 좋아했으나 남자에겐 니노가 최고가 아니었다. 억센 갈색머리에 하얀 새치가 섞인 못생긴 라틴계 녀석이 항상 남자와 동행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자가 니노를 아끼는 것과 그 남자아이를 아끼는 것이 다르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애정의 깊이가 달랐다. 니노가 보기에도 남자아이는 비범한 무언가가 있었다. 소위 천재라고 불리는 족속으로 가장 재수 없는 것은 그것이 제 발버둥과는 상관없이 언젠가 인정받으리라는 사실이었다. 조셉은 날카로운 눈매로 그것을 잡아챘고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었다. 운 좋게도 이글거리는 질투와는 상관없이 조셉은 제 계획에 저를 끼워넣고 계획을 세웠다. 니노에게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는 사람은 어짜피 다 똑같은 이었다. 제 어머니든. 조셉이든.

 

 드렉슬러는 니노의 파란 눈이 언제나 질투로 불타오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결국 그것이 계획을 망치리라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막을 수 없었다. 완벽한 것들 사이에서 부유하는 결점을 제 두 눈으로 보고 싶다는 욕심이 입꼬리에 대롱대롱 매달려 도저히 그것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그것으로 여기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그 때는 그것으로 좋았다.

 

 조셉은 제 눈 앞에서 사살당했다. 약속된 창고 나무문 뒤에 저는 또 웅크려 숨어있었다. 총소리와 동시에 두 다리는 있는 힘껏 땅을 찼고 조셉의 쌍둥이 형 리처드의 도움으로 드디어 지옥에서 발을 빼낼 수 있게 되었다.

 

 조직 내에서 드렉슬러의 위치는 수장의 애첩 같은 것이었다. 스스로 빛나는 것은 어둠 속에서도 빛이 가려지지 않았고 조셉 뿐만 아니라 누구든 알아차릴만한 것이었다. 쌓여가는 종이조각과 갈증으로 어린 드렉슬러는 제 빛을 숨기는 법도 참아내는 법도 알지 못했다. 쏟아지면 쏟아내었고 솟아나면 솟아나게 두었더니 그렇게 되었다. 날벌레들은 빛을 찾아다녔다. 도망친 드렉슬러를 쫓아 영국 구석구석을 누볐다. 드렉슬러는 하렘가 리처드 소유의 상점에 숨어지내며 숨을 죽였다. 리처드는 조직의 일원도 아닌데다 동생을 잃은 시름으로 늘 분노에 잠겨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리처드를 쉬이 건들 수 없었다.

 

 리처드는 드렉슬러에게 쉼터와 음식을 내어주면서도 복수에대한 갈망이 가득 찬 눈으로 드렉슬러를 쏘아보며 항상 이렇게 말했다.

 

 '다 네 놈 탓이야.'

 

 '알고 있었지?'

 

 '네가 사람새끼라는 걸 믿을 수가 없구나.'

 

 리처드와 조셉은 일란성 쌍둥이었지만 한날 한시에 태어나지 못했다. 리처드를 낳고 산모의 몸에 이상이 생겨 조셉은 일주일이 지난 뒤에야 그 목숨과 맞바꾸어 세상 빛을 본 것이다. 조셉은 잔인하고 악독한 구석이 있었다. 허나 제 피를 나눈 하나뿐인 동생이었고 제법 똑똑한 편이었으며 남의 신뢰를 얻는 일에 익숙했다. 리처드는 타고난 제 순한 성질로 동생을 사랑했고 늘 그의 편을 들어주었으며 동시에 그 약삭빠름을 질투했다.

 

 동생의 죽음은 충격적인 것이었다. 죽고 난 뒤 남긴 유일한 것,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던 라티노는 제가 보기에는 깡말라 볼품없었으나 통통한 엉덩이 정도는 꽤 볼만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참일 뿐이다. 저런 녀석을 믿고 계획을 세우다니 바보같은 녀석. 머리까지 치솟는 열에 눈물이 죽죽났다.

 하지만 겁에 질린 와중에도 드렉슬러의 재능은 굉장한 것이었다. 리처드는 드렉슬러에게 동생의 죽음에대한 책임을 묻다가도 신이 내렸다고 밖에는 설명할 길 없는 재주에 넋을 놓고는 했다. 그렇게 한 달, 또 한 달이 지나자 이 모든 일이 헛된 것이라는 생각이 완전하게 수면 위로 올라왔다. 그간 제가 한 짓을 돌이켜보자 그렇게 어리석을 수가 없었다. 소년에게 사과하겠노라고, 리처드는 그렇게 마음을 먹었었다. 통돼지를 굽고 스콘도 넉넉히 만들었다. 제 특기인 특제 사과소스까지 저녁은 완벽했다.

 

 드렉슬러의 방이 비어있었다.

 

-

 

 토마스는 평소와 다른 방에 어리둥절하여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매일 같이 들르던 방이 유난히 밝았다. 노랗고 어두운 조명대신 하얗고 밝아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선명한 색이 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눈이 부셨다.

 

 부드럽게 팔을 쓸어 당기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알았다. 일이 끝나고나서 그간도 몇 번인가 그와 한 적 있는 일이다. 하지만 맡은 일이 있을 때의 드렉슬러는 늘 일에 열중하기 바빠서 토마스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았다. 평소 답지 않았다. 분명 이상한 일이었다.

 

 "허리가 무거워서 집중이 되질 않아."

 

 왁스로 쓸어넘긴 머리를 섬세한 손끝으로 다시 정돈해주며 드렉슬러는 토마스의 귓가에 얼굴을 붙인채 속삭였다.

 

 "지금."

 

 목까지 붉어진 하얀 피부 위를 미끄러지듯 손톱으로 쓸어 뒷덜미를 끌어당겼다. 이마가 맞닿아지고 눈을 마주하자 뿌연 안개가 낀듯한 몽롱한 파란 눈이 한 눈에 들었다. 절로 들어올려지는 턱을 드렉슬러는 저지하듯 검지로 내리눌렀다.

 

 "착하지."

 

 뺨에 닿는 입술이 부드러웠다. 침대로 끌어당기는 손은 조급한 감이 있었다. 늘 정돈되어 있던 침대 위로 담요와 쿠션이 어지러웠다. 밝은 실내로 고스란히 들어오는 적나라한 장면에 토마스는 주저했다.

 

 "정말이에요?"

 

 열망에 반쯤 젖은 눈은 의심쩍음을 주렁주렁 달고 드렉슬러를 향했다. 분명 어린 시절 제가 원했던 것은 이런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제가 원하는 것은 아무래도 좋게 되어버렸다.

 

 "뭐가."

 

 대꾸는 퉁명스러웠다. 머플러와 자켓, 셔츠, 바지를 솜씨 좋게 벗겨내며 드렉슬러는 어느새 속옷차림인 토마스를 침대 위로 밀어냈다.

 

 "토미."

 

 부드럽게 불리는 이름에 맑은 눈이 깜박였다. 드렉슬러는 조용히 웃었다.

 

 "도와줄거지?"

 

 손은 어느새 옷깃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금방 씻은 사람으로부터 나는 비누향이 가득했다. 순식간에 제 옷까지 벗어버린 드렉슬러는 익숙한 듯 무릎을 꿇었다.

Posted by Bincan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