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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유로웠던 얼굴이 단숨에 일그러졌다.

 

 털썩. 삐그덕.

 

 의자 소리가 요란했다.

 

 "젠장"

 

 드렉슬러는 양 손에 얼굴을 묻었다.

 

 원하던 대답을 들었다. 미련은, 남는 것은. 제겐 이젠 정말 시간이 없었다. 날짜는 코 앞으로 다가왔으며 리처드가 준비한 선물은 제게 들어맞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지만. 약한 단어들이 제 나가는 길에 발을 걸었다. 마음의 준비는 다 되었었던 것이 아닌가. 아니다, 준비는 모두 되었다. 방금은 잊혀질 그 조금 서러운 것에 작별인사를 했을 뿐. 그리고 조금, 아주 조금 기대했을 뿐. 꼴이 우스웠다.

 

 파란 눈이 번들거렸다. 개는 낯선 곳이 두려운 듯 밝은 등을 향해 몇번이고 축축한 코를 움찔대고는 다음을 기다리듯 얌전히 드렉슬러를 바라보았다. 드렉슬러는 흐린 초점으로 그 끝에 눈을 맞추어 무릎에 턱을 괴었다.

 

 "멀리 떠날 거야. 네 녀석이 내 기억도 다 먹어치우면 좋을텐데."

 

 소리를 지르기에는 미적지근하고 울음을 터뜨리기에는 차오른 물이 얕았다. 어찌하지 못할 답답함에 드렉슬러는 빙글빙글 웃었다. 개는 두려운 듯 다리 사이로 꼬리를 감추고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드렉슬러는 제 목이 부풀어오른다고 생각했다. 알러지 반응처럼 콧속이 답답해지고 점막이 부풀어 세포 하나하나에서 삐걱삐걱 소리가 날 것 같은 불쾌감을 느꼈다.

 

 "다 씹어먹으라고.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네가 보고 있는 것, 듣고 있는 것 전부 삼켜대고 있는 걸 알아. 녀석은 모르겠지. 아무것도 모를거야. 자, 어서! 죄다 먹어치워보라고!"

 

 그는 결국 괜한 시비를 걸고야 말았다. 엉망으로 꼬여버린 삶으로 휘는 눈가와 내질러진 고함에 개는 공포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뛰어오르는 대신 점점 뒷걸음질만쳤다. 덜덜, 그 떨림이 눈에 보였다. 젠장. 드렉슬러는 나쁜 사람은 못되었다.

 

 "이리와."

 

 개는 방금의 두려움은 잊은 양 또 슬금슬금 벌려진 팔 사이로 파고들어 드렉슬러의 어깨에 턱을 괴었다.

 

 "멍청해가지고."

 

 누구에게 하는 이야기인지 저도 도통 알 수가 없었다. 파묻은 코 끝의 털이 부드러웠다.

 

 "가끔 기억해줘."

 

 털 사이로 손가락을 묻으며 드렉슬러는 좀 더 숨을 깊이 마셨다. 시간이 갈 수록, 개를 끌어안을 수록 손

의 떨림은 점점 더 심해졌다. 두려웠다. 욕심과 이성사이에서 드렉슬러는 고뇌하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올 수록 모든 것이 두려워지고 있었다.

 

 


/

 어두운 밤이었다. 그 날 이후로 로라스는 더이상 제 등을 끌어안지 않았다. 다 잘 되어가고 있었다. 14일째의 새벽에 드렉슬러는 가죽자켓의 깃을 세워 얼굴을 가렸다. 검은 모자를 눌러쓰고 시궁창을 따라 걸었다. 썩은 진창이 신발 바닥에 늘러붙고 괴상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점점 익숙한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이끼 낀 판자를 두드렸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오렌지 빛 등불과 주름 자글한 노인이 얼굴을 보였다. 콧수염이 찡긋거렸다.

 

 "영감, 늙었군."

 

 "네 놈도 금방이야."

 

 리처드는 등불을 후-, 불어 끄고 길을 열었다. 드렉슬러는 비좁고 어두운 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어둠이 찾아오고 창가의 별빛으로 곧 실내가 희미하게 보였다.

 

 "선물은 어떻게 했어."

 

 "내 것이 아냐. 답장도 했었잖아."

 

 "네 놈은, 마음이 약해서 안되는 거야."

 

 리처드는 제 입가를 움켜쥐었다.

 

 "프란시스코네 아들놈이 군에 들어갔다는 소식은 그렇게 놀라운 얘기는 아니었어. 로라스, 그 집안 놈의 자식들은 터뜨리고 쏘아대는 거라면 환장을 하는 녀석들이니까. 제 아버지와 사이도 좋지 않던 녀석이고 하니 제 살길 찾으러 나갔겠거니. 다들 그랬지. 그런데 몇 년 전에 제가 먼저 돌아오겠다고 한 거야. 프란시스코는 몸이 좋지 않았어서 자리를 보존하기 힘든 상태였어. 조직을 맡기기엔 얼간이 녀석들 뿐이었고. 아마 얼씨구나 했겠지. 조직 내 조그만 전쟁후 그렇게 들어앉은 자식을 나는 너한테 보냈다. 네 놈도 사실 이유는 알고 있잖아."

 

 리처드는 빠른 걸음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무 잔에 와인을 가득 채워 단숨에 반쯤 비웠다. 와인 방울이 맺힌 콧수염이 바르르 떨렸다.

 

 "당신은 너무 생각이 많아."

 

 드렉슬러는 엄지로 검지를 문질렀다. 톡톡, 식탁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거절하려고 했다. 네 놈은 이런 일이라면 질색을 하니까. 그런데 고지식한 군바리, 그 냄새가 지독하더군. 그 자식이 내게 인사를 했단 말이야. 허리를 깊이 숙여서, 이렇게, 죽은 사람한테 하듯이 말이야."

 

 리처드는 와인을 한모금 더 마셨다.

 

 "누군가가 보낸 것도 분명해 보였어. 큰 거물. 군인의 뒤라면 분명. 그런 생각이었지. 그대로 보냈다가는 네 녀석 성질머리론 퇴짜를 놓았을테고, 그래서 이름을 달아보냈다."

 

 드렉슬러를 바라보는 리처드의 눈이 일렁거렸다. 붉어진 코는 금방이라고 훌쩍거릴 듯이 보였다.

 

 "별이라면 응당 빛이 나야지. 내 형은 별을 타고 우주로 갈 생각이었겠지만 나는 그런 야망을 갖을 정도로 큰 그릇이 아니야. 너도 알고 있겠지."

 

 "조셉은 해도를 펼쳐들었고 영감은 옥상으로 날 데려갔지. 여전히 원망하고 있어. 별이 빛나던 밤하늘아래말이야. 녀석은 날 좋아해. 그러면 안 되는 거라고."

 

 "그 때는, 그게 좋은 생각 같았어."

 

 "조셉은 내게 늘 자신을 아버지라 부르라고 했어. 난 한 번도 그를 그렇게 부른 적이 없고."

 

 "그래, 그랬겠지. 얼마나 멍청한 녀석이냐, 내 동생이라는 놈은."

 

 리처드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Mi padre."

 

 무거운 공기에 웃음기가 가셨다. 어둠 속에서 등불에 눈만이 번들거렸다. 추위가, 그 찬 공기의 무게가 옷속으로 파고들어 뼈가 시렸다. 해가 뜰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새벽이 가고 있었다.


 "감사 인사하러 온 거야. 몸 조심해. 간다."

 

 별이 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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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 뒤에 뿌리 깊은 화상으로 새겨진 상처가 꿈틀거렸다. 원숭이를 집어삼키는 뱀의 괴상한 문양은 저도 전에 본 적이 있다. 등은 키와 함께 커지고 커져 흉터의 자국을 넓혀 경계선을 흐려놓았다. 그러나 그것은 사라지지 못하고 흉하게 자리를 넓혔을 뿐이다. 아물지 못한 성장이란 그런 것이다. 필시 달궈진 쇳덩이가 어린 시절의 여린 살을 뭉개고 익혀 그 연한 조직을 쪼글쪼글하게 만들어 물을 채워넣었을 것이다. 자신이 뭉개고 싶은 것은 아마도 그 어린 시절일테고. 로라스는 드디어 눈을 감고 억눌렸던 스냅샷의 빈 공간에 그 등을 채워넣었다.

 

 푸른 바다가 어둑어둑했다. 일렁거리는 검은 물결은 탁하고 침침하여 매순간 바위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날 줄 알면서도 혀를 널름거리고 저를 향해 아가리를 벌리려들었다. 그것은 더이상 푸르지도 않았다. 온갖것을 불싸질러 잿가루를 만들고 그것을 곱게 빻아 물에 탄다고 해도 이보다 더 무채색일 수는 없었다. 깊은 곳은 모든 색을 빨아들였다. 그리고 곧 저도 집어 삼킬 속셈이었다. 두려움은 어린 드렉슬러의 발에 족쇄를 달아 육지에 그 두발을 묶어놓았다. 결국 제 아비도 무너져가는 나라의 가상사리에서 풀썩이는 모래먼지의 냄새를 맡고 배를 띄운 배신자였으니 이미 허옇게 질린 두 손은 바다에 담글 길 조차 없는 것 아닌가. 그래서 더욱 갑판에 올랐다.

 

 드렉슬러는 무릎을 가슴팍에 끌어안고 물로 가끔씩 목을 축이며 늘 그 곳에 있는 짐상자마냥 자리를 지켰다. 누군가가 저를 알아볼까 두려웠다. 그렇게 저를 번쩍 들어 두 다리를 하늘로 향하게 하고 배 건너로 꼬꾸라트릴 것만 같았다. 물 속에 처박히면 인어가 몰려들어 제 팔이고 다리고 우적우적 씹어먹을 것이다. 뼈는 사라지지 못하고 제 의식에 엉켜 밑으로 밑으로 가라앉을 것이다. 그렇게 붉은 별이 되겠지. 하지만 아무도 붉은 별을 그려넣어주진 않을 테였다. 제 자리는 없었다. 그럼에도 배를 탔다. 배를 탈 때마다 늘 그랬다.

 

 17년을 꼬박 세상구경을 했다. 그 시간동안 늘 드렉슬러는 도망자였다. 수없이 많은 사람 속에서 티끌이 되어버린 자신을 느끼면서도 무언가 제 뒷덜미를 낚아채 바닷속에 처박아넣을 것이라는 공포에서 도저히 자유로워질 수 없었다. 그렇게 저를 쫓고있는 것을 얼음으로 가득찬 산 속에서 보았다. 검은 돌 위에 켜켜히 얼어붙은 얼음에 제 얼굴이 비쳤다.

 

 청산을 위해 돌아왔다. 영국땅을 밟은 것은 아무도 깨어있지 않을 새벽으로, 다행히도 리차드는 그저 늙었을 뿐이었다. 안녕, 영감.

 

 로라스는 차마 침대 위에 앉을 수가 없었다. 앉았다간 괴상한 냄새가 날 것만 같았다. 밝은 방이 불쾌했다. 잘 개어진 제 담요와 베개를 노려보았다. 제 담요와 베개를 노려보았다. 제 것인데.

 

 로라스는 무엇을 향해 화를 내는지를 모르고서는 화를 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무작정 화만 차올랐다. 더이상 참았다가는 짐승마냥 으르렁거릴 것 같았다. 그래서 입을 열어야만했다.

 

 

 "잡무에 비역질도 들어가는 모양이지?"

 

 

 모르는 척하고 싶지 않았다. 적성에 맞지 않았다. 숨길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제 앞에서 드렉슬러는 낱낱히 까발려져야했다. 가슴 속에 엉기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야했다. 그만이 그랬다.

 

 

 "왜 화를 내지?"

 

 

 돌벽에 잔 금이 가있었다. 수리가 필요해보일 정도는 아니었는데 핏발이 서 노려보는 눈에는 그 자잘한 잔 금마저 눈에 거슬렸다.

 

 

 "화를 낸다고?"

 

 

 뒤를 획 돌아 로라스는 드렉슬러와 눈을 맞췄다. 망설임도 없이 단호한 말투로 로라스는 순간 드렉슬러가 애처로워보인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 화 내고 있잖아."

 

 

 드렉슬러는 조금 웃고 있었다.

 

 

 "아니야."

 

 

 "거짓말쟁이."

 

 

 우물거리는 사람은 없었다. 정해진 스크립트처럼, 미리 짜여진 시놉시스처럼 공간에 갇혀 빠져나가지 못하게 드렉슬러는 서서히 로라스의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응? 그렇잖아."

 

 

 가까워지는 거리에 맥박이 뛰었다.

 

 

"아니면, 로라스."

 

 

 숨이 졸렸다.

 

 

"이게 화를 내는 게 아니면."

 

 

 한 발자국.

 

 

 "날 지켜줄거야?"

 

 

 그렇게 다가서는 입술에 주춤, 로라스는 뒤로 물러섰다. 아차.

 

 

 "거 봐."

 

 

 빙그레 웃는 웃음이 또 끝에 걸렸다.

 

 

 "거짓말쟁이."

 

 

 뒷걸음질 친 다리가 침대에 걸려 로라스는 그 자리에 주저 앉고 말았다. 삐그덕, 소리와 함께 방이 침침해진 기분이 들었다. 세상이 들썩였다. 그들은 뛰고 있었다.

 

 

 "앞으론,"

 

 

 입을 가렸다.

 

 

 "이런 짓 하지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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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콤한 목소리에 얹어진 어정쩡한 메세지를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망설임은 마지막이라는 단어에 옅어져갔고 드렉슬러의 도와달라는 그 한 마디가 마지막 덧창마저 열어젖히고 만 것이다.

 

 시간과 공간과 사건과 사람이 한데 맞물려 톱니바퀴처럼 돌아가고 있었다. 토마스는 저보다 큰 덩치의 드렉슬러를 받쳐안고 허리를 들썩였다. 맨살이 부딪히며 나는 둔탁한 소리와 저의 헐떡거림과 드렉슬러의 거친 숨소리, 말들이 선명한 방 안을 마저 채웠다.

 

 앓기만 하던 이의 손이 순간 힘이 들어가 우그러들었다. 힘껏 쥐어진 어깨의 통증과 바뀐 공기에 어리둥절하던 토마스는 참담한 얼굴로 입술을 짓이기는 드렉슬러의 얼굴을 보고야말았다. 드렉슬러는 노련하게도 아주 잠깐 사이에 그것들을 행위의 고통에따른 괴로움으로 바꾸어놓았다. 그리곤 제 매끈한 등을 구부려 안으로, 안으로 토마스를 밀어넣었다. 제 옆머리 언저리에서 우물거리는 입술이 느껴졌다. 망설이는 것은 제가 아니라. 좋아. 터져나온 소리와 함께 툭. 둔탁한 것이 문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열하루째. 사실 날짜는 이제 며칠 남지 않았다. 로라스는 당연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첫 날 드렉슬러를 마주하면서, 그리고 어제의 거절을 들으며 그간 제 자신을 붙잡고 있었던 무언가가 완전히 당락이 난 참이라 걸음은 가볍기만했다.

 

 그렇게 문까지 열걸음쯤 남았을까. 한 걸음에 소리가 성큼 다가왔다. 또 한 걸음에 불안이 성큼 다가왔다. 그 다음은 기척, 그리고는 열기, 한 걸음이 남자 로라스는 제자신이 어째서 이렇게까지 평온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틈사이로 뻗어져오는 것은 시선이나 갈망보다는 오히려 존재감, 그 자체였다. 달궈져 들뜬 공기 속이 유난히 고요하고 적막했다. 군사용 철제 침대 위 딱딱한 매트리스, 그 위의 얇은 줄무늬 시트 한 장. 토마스는 그 위에 어지러진 담요와 베개가 처음부터 신경쓰이던 참이다.

 

 어두운 곳에서 밝은 곳을 바라보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제가 앉아있어야 할 곳에서 살덩이가 뒤엉켜 들썩였다. 언제나 등은 제 차지였으므로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몇 번이나 그려보았던 갈색 등이 하얀 불빛 아래서 땀에 젖어 번들거렸다.

 

 다른 이들의 행위를 보는 것은 생경한 일이었다. 코팅이 된 우비 위를 흘러내리는 빗물처럼 일련의 일들은 눈을 거쳐 신경을 타고 뇌를 두드렸으나 어울리지 못하고 도르르도르르 흘러내리기만 했다. 다만 우비만으로는 그 습기들이 우비 속의 안감을 눅눅하게 만들고 손 끝과 발 끝의 온기를 앗아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로라스는 딱 그짝이었다.

 

 어린기가 남은 청년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부드럽게 휘어든 등이 어거지로 구부려지며 뻣뻣하게 굳어졌다. 갈색과 흰색이 섞인 뒷통수가 위아래로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깜박깜박. 눈은 잘도 깜박였다. 항상 어둡던 방에 빛무리가 흐르는 것이 이상하게도 이상하지 않았다. 모든 장면이 스냅샷이 되어 차곡차곡 쌓아올려지기 시작했다. 이상할 것이 없었다. 로라스는 조금 출출한 뱃속과 제가 왜 이 자리에 서있는지에 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어째서 문을 열고 들어가 저 둘의 옆, 그러니까 항상 자신이 앉아있던 자리에 제가 앉을 수 없는지에 관해서도 생각했다. 생각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제 생각에 눌려진 이미지들이 흐렸다.

 

 좋아.

 

 몸이 빨려드는듯 했다. 저도 모르게 내딛은 걸음은 구두의 끝으로 문을 찼다. 뻑뻑한 경칩으로 틈새가 조금 더 벌어진 것뿐이지만 예민한 신경으로 토마스가 인상을 찌푸리는 것을 보았다. 로라스는 두 손가락으로 입술을 막고 울대를 넘겼다.

 

 솔직하게도 구역질이 났다.

 

 무엇이 그의 심기를 건드렸는지 토마스는 알지 못했다. 눈이 부시게 밝은 빛 아래에서 어둠 속이 도통 보이지 않아 불안에 떨 뿐이었다. 상상속의 로라스는 어둠 속에서 저희를 노려보고 있었다. 어쩌면 그저 역한 것을 본 행인마냥 인상을 찌푸렸을 지도 몰랐다. 그러나 여전히 제 상상 속 로라스는 저희를 노려보았다. 문을 두드리고 남자는 시선을 끊어냈다. 드렉슬러는 앓고 있었다.

 

 약해.

 

 "너무해요."

 

 얼마 전 리차드가 제게 얼굴을 굳히며 경고하던 말이 고막 속으로 흐르지 못하고 고여 왱왱 울렸다. 축축하게 젖은 뺨에 연거푸 입을 맞추며 토마스는 그저 너무해요, 너무해요 라고 되뇌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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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드렉슬러는 배와 땅과 아버지를 모조리 잃고 짐승 취급을 받으며 짐짝 사이를 굴러다녔다. 조그만 머리통에선 수없이 많은 생각들이 떠다녔지만 대부분이 지금 당장 써먹을 수 없는 것들뿐으로 이것들이 왜 지금 이렇게 솟아나는지 알 수 없었다. 채울 수 없는 갈증이 일기 시작한 것은 그 때쯤으로, 머릿속을 끄집어 낼 수 없는 답답함이 얼마나 괴로운 것인지 그제야 알았다. 조그만 톱니바퀴와 번쩍이는 금속들이 저와 함께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화이트 칙스의 수장 노엘 맥그리거의 괴상망측한 성벽은 그런 드렉슬러를 더 힘들게 했다. 까만 뱁새눈의 남자가 제 아버지를 쏘고 저를 보며 고약하게 웃었던 것을 기억한다. 뛰고 달리고 부딪히고 박살나는 그 소란을 적막으로 기억한다. 두근거리는 조그만 가슴팍에 그 커다란 옷과 일지를 끌어안고 두려움에 질려 책상 뒤의 구석지에 쪼그려앉아 벌벌 떠는 것이 고작이었다. 붉은 별이 질 것을 알았다. 총소리가 나고 선창으로 언제나 굳게 서있던 두다리가 공중에 붕 뜨는 것이 잠시간 보였다. 아버지. 아버지. 바다냄새가 짙게 났다.

 

 노엘은 금발의 파란눈과 전형적인 아일랜드계의 골격을 지닌 백인으로 지독한 백인우월주의자였으나 애석하게도 제 어머니가 집시라고 했다. 이것은 조셉이 얘기해준 것이다. 남자는 늘 어린 소년을 끼고 있었다. 흑인이거나 라틴계가 대부분이었으며 그와중에 금발은 없었다. 남자는 제 금발머리를 싫어했다. 여자아이는 싫다. 임신은 끔찍하므로. 백인아이도 싫다. 그 금발이 싫으므로. 혼혈도 싫다. 그 존재 자체로 불경한 것이므로. 그 축축한 입으로 드렉슬러의 어깨를 집어삼키며 노엘은 잘도 떠들었다. 드렉슬러는 끊임없이 훑어지고 짜내지고 훌떡훌떡 동전의 앞뒷면마냥 뒤집어졌다. 이야기는 체액으로 더럽고 특유의 냄새로 지독하여 몸이 찢어지는 고통 속에서도 잊지 않을 수 있었다. 어쩌면 남자는 제 자신이 싫었는지도 몰랐다.

 

 조셉은 그걸 알았다. 그래서 자신을 계획에 끼워넣은 것이다. 그것은 드렉슬러도 알고 있었다. 자기혐오만큼 무너지기 쉬운 것도 없단다. 주방장이 엉망인 식당은 문을 닫아야지. 그리고 새 가게를 열거야. 조셉은 그 조그만 눈을 반으로 접고 콧수염을 실룩이며 웃었다. 드렉슬러는 그것이 그렇게 역겨울 수가 없었다.

 

 니노. 아이는 그저 사랑받고 싶었다. 매음굴에 굴러다니던 심부름 꼬마를 거둬준 것은 따뜻하고 커다란 손으로 퉁퉁한 배가 넉넉한, 재밌게 생긴 신사였다. 남자는 아이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었고 토시하나 틀리지 않고 말을 외우는 니노를 자랑스러워했다. 적어도 니노에겐 그렇게 보였다. 얼굴 모르는 아버지나 마약에 찌들어 매음굴을 굴러다니는 어머니보다 남자는 훨씬 근사했고 고상했으며 또 친절했다.

 

 니노는 남자를 굉장히 좋아했으나 남자에겐 니노가 최고가 아니었다. 억센 갈색머리에 하얀 새치가 섞인 못생긴 라틴계 녀석이 항상 남자와 동행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자가 니노를 아끼는 것과 그 남자아이를 아끼는 것이 다르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애정의 깊이가 달랐다. 니노가 보기에도 남자아이는 비범한 무언가가 있었다. 소위 천재라고 불리는 족속으로 가장 재수 없는 것은 그것이 제 발버둥과는 상관없이 언젠가 인정받으리라는 사실이었다. 조셉은 날카로운 눈매로 그것을 잡아챘고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었다. 운 좋게도 이글거리는 질투와는 상관없이 조셉은 제 계획에 저를 끼워넣고 계획을 세웠다. 니노에게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는 사람은 어짜피 다 똑같은 이었다. 제 어머니든. 조셉이든.

 

 드렉슬러는 니노의 파란 눈이 언제나 질투로 불타오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결국 그것이 계획을 망치리라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막을 수 없었다. 완벽한 것들 사이에서 부유하는 결점을 제 두 눈으로 보고 싶다는 욕심이 입꼬리에 대롱대롱 매달려 도저히 그것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그것으로 여기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그 때는 그것으로 좋았다.

 

 조셉은 제 눈 앞에서 사살당했다. 약속된 창고 나무문 뒤에 저는 또 웅크려 숨어있었다. 총소리와 동시에 두 다리는 있는 힘껏 땅을 찼고 조셉의 쌍둥이 형 리처드의 도움으로 드디어 지옥에서 발을 빼낼 수 있게 되었다.

 

 조직 내에서 드렉슬러의 위치는 수장의 애첩 같은 것이었다. 스스로 빛나는 것은 어둠 속에서도 빛이 가려지지 않았고 조셉 뿐만 아니라 누구든 알아차릴만한 것이었다. 쌓여가는 종이조각과 갈증으로 어린 드렉슬러는 제 빛을 숨기는 법도 참아내는 법도 알지 못했다. 쏟아지면 쏟아내었고 솟아나면 솟아나게 두었더니 그렇게 되었다. 날벌레들은 빛을 찾아다녔다. 도망친 드렉슬러를 쫓아 영국 구석구석을 누볐다. 드렉슬러는 하렘가 리처드 소유의 상점에 숨어지내며 숨을 죽였다. 리처드는 조직의 일원도 아닌데다 동생을 잃은 시름으로 늘 분노에 잠겨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리처드를 쉬이 건들 수 없었다.

 

 리처드는 드렉슬러에게 쉼터와 음식을 내어주면서도 복수에대한 갈망이 가득 찬 눈으로 드렉슬러를 쏘아보며 항상 이렇게 말했다.

 

 '다 네 놈 탓이야.'

 

 '알고 있었지?'

 

 '네가 사람새끼라는 걸 믿을 수가 없구나.'

 

 리처드와 조셉은 일란성 쌍둥이었지만 한날 한시에 태어나지 못했다. 리처드를 낳고 산모의 몸에 이상이 생겨 조셉은 일주일이 지난 뒤에야 그 목숨과 맞바꾸어 세상 빛을 본 것이다. 조셉은 잔인하고 악독한 구석이 있었다. 허나 제 피를 나눈 하나뿐인 동생이었고 제법 똑똑한 편이었으며 남의 신뢰를 얻는 일에 익숙했다. 리처드는 타고난 제 순한 성질로 동생을 사랑했고 늘 그의 편을 들어주었으며 동시에 그 약삭빠름을 질투했다.

 

 동생의 죽음은 충격적인 것이었다. 죽고 난 뒤 남긴 유일한 것,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던 라티노는 제가 보기에는 깡말라 볼품없었으나 통통한 엉덩이 정도는 꽤 볼만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참일 뿐이다. 저런 녀석을 믿고 계획을 세우다니 바보같은 녀석. 머리까지 치솟는 열에 눈물이 죽죽났다.

 하지만 겁에 질린 와중에도 드렉슬러의 재능은 굉장한 것이었다. 리처드는 드렉슬러에게 동생의 죽음에대한 책임을 묻다가도 신이 내렸다고 밖에는 설명할 길 없는 재주에 넋을 놓고는 했다. 그렇게 한 달, 또 한 달이 지나자 이 모든 일이 헛된 것이라는 생각이 완전하게 수면 위로 올라왔다. 그간 제가 한 짓을 돌이켜보자 그렇게 어리석을 수가 없었다. 소년에게 사과하겠노라고, 리처드는 그렇게 마음을 먹었었다. 통돼지를 굽고 스콘도 넉넉히 만들었다. 제 특기인 특제 사과소스까지 저녁은 완벽했다.

 

 드렉슬러의 방이 비어있었다.

 

-

 

 토마스는 평소와 다른 방에 어리둥절하여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매일 같이 들르던 방이 유난히 밝았다. 노랗고 어두운 조명대신 하얗고 밝아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선명한 색이 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눈이 부셨다.

 

 부드럽게 팔을 쓸어 당기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알았다. 일이 끝나고나서 그간도 몇 번인가 그와 한 적 있는 일이다. 하지만 맡은 일이 있을 때의 드렉슬러는 늘 일에 열중하기 바빠서 토마스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았다. 평소 답지 않았다. 분명 이상한 일이었다.

 

 "허리가 무거워서 집중이 되질 않아."

 

 왁스로 쓸어넘긴 머리를 섬세한 손끝으로 다시 정돈해주며 드렉슬러는 토마스의 귓가에 얼굴을 붙인채 속삭였다.

 

 "지금."

 

 목까지 붉어진 하얀 피부 위를 미끄러지듯 손톱으로 쓸어 뒷덜미를 끌어당겼다. 이마가 맞닿아지고 눈을 마주하자 뿌연 안개가 낀듯한 몽롱한 파란 눈이 한 눈에 들었다. 절로 들어올려지는 턱을 드렉슬러는 저지하듯 검지로 내리눌렀다.

 

 "착하지."

 

 뺨에 닿는 입술이 부드러웠다. 침대로 끌어당기는 손은 조급한 감이 있었다. 늘 정돈되어 있던 침대 위로 담요와 쿠션이 어지러웠다. 밝은 실내로 고스란히 들어오는 적나라한 장면에 토마스는 주저했다.

 

 "정말이에요?"

 

 열망에 반쯤 젖은 눈은 의심쩍음을 주렁주렁 달고 드렉슬러를 향했다. 분명 어린 시절 제가 원했던 것은 이런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제가 원하는 것은 아무래도 좋게 되어버렸다.

 

 "뭐가."

 

 대꾸는 퉁명스러웠다. 머플러와 자켓, 셔츠, 바지를 솜씨 좋게 벗겨내며 드렉슬러는 어느새 속옷차림인 토마스를 침대 위로 밀어냈다.

 

 "토미."

 

 부드럽게 불리는 이름에 맑은 눈이 깜박였다. 드렉슬러는 조용히 웃었다.

 

 "도와줄거지?"

 

 손은 어느새 옷깃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금방 씻은 사람으로부터 나는 비누향이 가득했다. 순식간에 제 옷까지 벗어버린 드렉슬러는 익숙한 듯 무릎을 꿇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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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끝이 났다. 파악하고는 금방이었다. 원래부터 있던 것. 상대는 조잡했다. 처음부터 꺼슬꺼슬 신경을 건드리던 것은 아마도에서 결국엔이 되었다. 다만 세번째 편지 후의 잠시간 흔들리던 마음이 여전히 맥을 못추고 있었다. 그래도 벌벌거리던 손으로 단 열흘만에 완벽한 답안지를 내었다. 이제 남아있는 일이라고는 제 흔들거리는 마음을 결정내리는 것이 하나, 또 그를 위한 선물을 결정하는 것이 하나였다. 사실 하나밖에 되지 않았다. 검은 개는 여전히 꼬리를 흔들었다.

 

 개는 오늘따라 침대에 납작 엎드려 움직이지 않았다. 동물의 감각은 사람과는 사뭇 다른 것이 있었다. 어쩌면 그간 자신의 행적이 결국 또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는지도 몰랐다. 드렉슬러는 곁눈질로 자신을 훔쳐보는 개에게 다가갔다. 가까워지는 거리에 개의 머리가 들렸다.

 

 "얼마 안 남았어."

 

 털의 결을 따라 부드럽게 쓰다듬자 개는 멀뚱히 자신을 바라보았다. 제 주인의 것과 닮은 눈은 아무런 뜻도 담지 않고 다음을 곧은 시선으로 기다렸다.

 

 드렉슬러는 실없이 웃었다. 그러면 그렇지.

 

 "참, 너도 안 어울리는 짓을 하는군."

 

 개를 조금 밀어내고 침대 머리부분에 앉아 벽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바닷가에서 자주 들려오던 자장가가 코를 울리며 작은 방을 가득 채웠다. 제 허벅지에 턱을 올려놓는 개의 행동이 조금은 사랑스러웠다. 괜찮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드렉슬러는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로라스는 눈을 뜨기 전부터 기분이 좋았다. 충분한 온기와 익숙한 느낌으로 어린 시절 자신의 요람에서 눈을 뜨는듯 평온하고 안정된 느낌에 절로 미소가 날 지경이었다. 뺨에 닿은, 평소보다 조금 거친 느낌의 천에 살갗을 문대었다. 기분이 너무 좋았다.

 

 눈을 떴을 때는 익숙한 돌벽이 시야에 차지 않았다. 바스락거리는 셔츠 천이 제 이마에 닿아 머리를 움직일 때마다 그 주름을 조금씩 바꿔가고 있었고 들이쉬고 내쉬는 편안한 숨에 천아래로 살덩이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알았다. 제 뺨과 눈가와 귀와 뒷통수에 걸쳐 얹어진 손바닥은 수면으로 인해 평소보다 높은 체온으로 따뜻했다. 꿈인가. 알 수 없는 기분에 이마를 더 바짝대었다. 넘어가려는 울대로 제 입술 위에 손가락 두 개를 얹었다. 맙소사.

 

 숨소리가 사근사근 났다. 그 숨이 스무번정도가 들락날락할 정도가 되어서야 로라스는 제 머리 위의 손을 받치고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여 바로 누웠다. 뒷목에 괴어진 허벅지가 단단했다. 주인이 일어나기 전까지 제 손아귀에 쥐어진 손은 제 장난감 같은 것이었다. 로라스는 마디 굵은 손을 조금씩 더듬으며 로이드와 반지와 잃어버린 전우들과 또 아까의 온기따위의 것들을 생각했다. 반지. 이 아름다운 손가락에 제 반지를 끼워넣어야했다. 그 전에 조금, 그 위에 키스하고 싶었다.

 

 "아."

 

 손을 빼앗기자 탄식이 흘렀다. 눈 안에 가득 들어왔던 손이 거둬지자 시큰둥한 얼굴로 저를 내려다보는 얼굴이 대신 들어찼다. 벌어진 입을 다물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로라스는 그 얼굴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멍청한 얼굴이라고 드렉슬러는 생각했다.

 

 "뭐 해. 뭐 해."

 

 타박하듯 손가락들과 손바닥으로 시선을 끊어내고 배려없이 몸을 일으키자 낡은 침대 위로 머리가 떨어지며 철제 프레임이 삐그덕삐그덕 비명을 질렀다. 무언가를 빼앗긴 어린아이처럼 로라스는 조금 심통이 났다.

 

 드렉슬러가 알 바는 아니었다. 잠은 완전히 달아났지만 잠을 깨려는 척 앞머리를 헤집고 뒷목을 벅벅 긁었다. 다시 삐그덕 소리가 났다. 침대에 걸터앉은 로라스는 다시금 엄지로 제 검지의 반지를 문질렀다.

 

 "…반지."

 

 들릴듯 말듯 말이 새었다. 그 어설픔에 순간 울컥하고 화가 밀려왔다. 드렉슬러는 제 책상의자에 꽤 거칠게 앉으며 거만하게 몸을 늘어뜨려 손깍지를 꼈다.

 

 "알게 뭐야. 그런 시시한 반지."

 

 잠시간 허공에서 시선이 닿았다. 시큰둥한 얼굴과 시큰둥한 목소리를 로라스는 잠이 덜 깬듯한 한껏 멍청한 얼굴로 응대했다.

 

 보기좋은 입가가 뒤틀리며 푸흐흐, 웃음이 나왔다. 고개를 숙인탓에 흘러내린 머리를 정리하며 로라스는 고개를 들었다. 노랗고 어두운 조명 아래서 파란눈은 따뜻하게 빛이 났다. 드렉슬러는 처음으로 로라스의 제 얼굴을 본 것 같았다. 나쁘지 않았다.

 

 "그렇지. 시시하지. 자네 말이 맞네."

 

 로라스는 제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내었다. 금장의 은반지는 알이 작은 푸른 보석을 빛내며 그간처럼 제가 해왔던 일을 했다.

 

 "갖고 싶지 않나?"

 

 "필요 없어. 그런 거 없었어도 여지껏 나, 잘 살았다."

 

 입을 열고 말들이 입 밖으로 튀어나가는 동안 드렉슬러는 그것들이 더더욱 확실해짐을 느꼈다. 그랬다. 제 길에 반지는 필요하지 않았다. 여태껏 그래왔고 지금까지 저런 상징들로 저를 옭아매려는 모든 것은 제 구둣발에 짓밟히거나 아니면 그 무게로 저를 짓이겨오곤 했었던 것이다.

 

 "그럴 줄 알았네."

 

 실망한 기색을 띠는 목소리에 그런 것이 아닌줄 알면서도 드렉슬러는 숨이 답답해지고 화가 났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이 허리 아래가 무거워진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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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엔 어색한듯 단단히 굳어있던 어깨가 이틀째에는 귀찮은듯 저와 멀리 물러났고 일주일이 되자 오히려 제 가슴팍으로 붙어오기 시작했다. 로라스는 제가 그의 뒷목을 희롱했던 날의 새벽, 그간 무슨 의식인양 해오던 일을 거른 탓에 찾아든 헛헛한 느낌으로 손을 들어 제 가슴팍을 쓸어내렸다. 추운 날의 온기란 그런 것이었다.

 

 희미한 향이 코 끝을 간질였다. 분명 어디선가 맡아본 적이 있는데. 옷가지를 벗어들다 말고 배쪽의 천을 훌떡 뒤집어 킁킁, 냄새를 맡았다. 향수의 화려한 향이나 로션의 포근한 냄새 같은 것이 아니었다. 시원한 단내. 깊이 들이 쉬었더니 기분이 좋아져 니트 위에 얼굴을 묻어 비볐다. 사람 살냄새. 따뜻한 냄새가 났다.

 

-

 

 개가 품 속으로 파고들게 된 것은 며칠 되었다. 개는 이젠 꼬리를 흔들다못해 발치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드렉슬러가 움직이는 대로 눈을 뒤굴뒤굴 굴렸다.

 

 "귀엽지 않아."

 

 가는 눈으로 개를 노려보자 개는 바닥에 납작 엎드렸으나 꼬리는 여전히 휙휙 바닥을 쓸었다.

 

 "밉상."

 

 파란 눈에 담긴 저는 여전히 낯설었다. 몇 번이고 파랗고 선명한 눈동자에 제가 비치면 드렉슬러는 저도 모르게 제가 제 고향 스페인의 하늘 아래, 그리고 하얀 빛이 너울거리던 푸르른 고향의 바다에 서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바람을 타기 위해 돛이 펼쳐지며 공기를 때려 내던 소리가 뱃전에 부딪히는 파도소리와 섞여 들려왔다. 기대로 가득 차있던 여섯살의 첫 출항. 조셉은 자신이 이 모든 걸 기억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질 못했다.

 

 드렉슬러는 토마스를 통해 리처드와 세 통의 편지를 주고 받았다. 처음은 드렉슬러의 것으로 당연스럽게도 드렉슬러는 제 편지의 첫머리에 리처드의 멍청함에대해 일장연설을 늘어놓으며 리처드가 제 이름을 달아 보낸 골칫거리에관한 불평을 쏟아냈다. 두번째 편지 전에 전서구가 도착했다. Close the door. 일전 도망쳐나오기 전의 작전명은 리처드의 밑바닥의 마지막 카드 같은 것이었다. 조셉은 그 때 죽었다. 제 수장을 배신하려던 오른팔은 우습게도 심부름 꼬마의 내부고발로 사살당했다. 꼬마는 조셉이 주어온 고아였다.

 

 "심지어 나도 알겠어요. 리처드씨는 도대체 무슨 생각이신 거예요."

 

 "오래된 애증의 고리라고나 할까. 숙원이라고나 할까. 뭐 그런 거지."

 

 별 것 아닌 듯한 어투의 리처드는 열을 내고 있는 토마스의 말에 되는대로 적당히 주어넘기는 듯이 답하며 영수증과 물건을 확인하고 칸마다 싸인을 했다.

 

 "이해할 수 없어요. 그 사람이 무슨 요원인지는 모르겠지만...!"

 

 "틀렸어."

 

 잘린 말에 입술이 비죽였다. 성가신 녀석. 리처드는 제 콧수염으로 간질거리는 코를 실룩거리며 검지로 코 옆을 긁었다.

 

 "그 자식은 이전부터 B구역을 맡고 있던 마피아 집단의 우두머리가 맞아. 제 아버지 로라스가 제 아들 로라스에게 물려준거지. 그정도는 이쪽 계통 녀석들이라면 다들 알고 있어. 네 녀석이야 이제 이 년차니까 알턱이 없지만."

 

 꼬맹이. 끝에 따라붙는 말에 토마스는 발끈 화를 냈다.

 

 "그 사람은 이런 곳에 있을 사람이 아니에요! 이제 슬슬 그만할 때도 됐잖아요. 육 년이에요. 리처드. 육 년이라고요."

 

 "그만해?"

 

 일순 공기가 날카로웠다. 토마스는 헛숨을 들이키며 입을 닫았다.

 

 "뭘 그만해."

 

 리처드는 화를 삭히듯 주먹을 움켜쥐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신경질적으로 펜을 놀리다 돌연 추욱 어깨를 늘어뜨렸다. 쓸쓸하게 처진 눈꺼풀 아래 검은 눈동자가 빛을 잃었다.

 

 "마에스트로, 마에스트로."

 

 답답한 마음에 리처드는 연거푸 제 늙은 거죽을 마른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주름과 검버섯이 당겨지고 하얗게 새어버린 털이 엉그러졌다.

 

 "이미 내 손을 떠나간 일이야. 내 일이 아니라고."

 

 몇 십년이나 곪아온 속이 말이 아니었다. 스러져가는 별을 볼 때의 죄악감과 잃어버린 것에대한 그리움과 탄식, 그리고 되돌릴 수 없는 과거를 향한 원망이 썩은 진흙처럼 문드러졌다.

 

 "꼬맹이. 녀석은 한 번 이 곳을 떠났었어. 내 손에선 고작 두 달. 고 맹랑한 것은 열 다섯에 도망쳐서 스물하고도 여덟이 돼서야 돌아왔다고. 난 녀석이 돌아오지 않을 줄 알았어."

 

 얇은 입술이 바르르 떨려오자 리처드는 손으로 입을 움켜쥐어 쓸어내렸다.

 

 "정말이지, 그러기를 간절히 바랐다고."

 

 리처드는 조금 풀이 죽은 듯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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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끔찍한 침묵이 이어졌다. 두 사람의 발소리조차 적막했던 길고 긴 복도를 지나 실험실로 돌아온 둘은 각각 제자리를 찾았다. 침대는 흐트러져 있었다. 소란에 정돈할 시간이 없었던 것인지 두툼한 책이 두 권 펼쳐져있었는데 얼핏 보기에는 제 몫일 생화학 책이 한 권, 그리고 나머지 한 권은 지도책인 것 같았다. 제대로 쉬고는 있었던 건가. 로라스는 창백한 드렉슬러의 안색을 살피며 묘한 얼굴을 했다.

 

 "붉은 펜으로 표시를 해놨군. 여행이라도 갈셈인가?"

 

 "뭘 봐. 낯짝도 두꺼워선."

 

 순식간에 손 안에 들려있던 책을 빼앗겼다. 멍청한 얼굴로 눈을 깜박거리다 침음이 새자 오히려 당황한 쪽은 드렉슬러였다. 안 그래도 로라스를 몰아세운 것이 제깐에는 조금 마음에 걸렸던 참이다. 책을 책꽂이에 꽂아 넣으며 드렉슬러는 입을 열었다.

 

 "땅 지도가 아니야."

 

 "그럼?"

 

 "알아서 뭐하게."

 

 로라스는 엄지로 검지의 반지를 문질렀다.

 

 "그냥."

 

 "일 없다."

 

 흘끔. 시선이 손 끝에 닿았다. 머리속은 더 복잡해지고 있었다. 한숨을 쉬었다.

 

 "하늘 지도야. 별 지도. 붉은 색 표시는 내가 한 게 아니야. 영감이 한거지."

 

 "리처드?"

 

 "아니, 조셉."

 

 주춤대는 어깨는 방금의 이름이 입에서 저도 모르게 흐른 것임이 분명했다. 낯익은 이름인데도 얼굴이 바로 떠오르질 않았다. 그건 또 누군가. 묻기에는 둘 사이가 그렇게 가까운 것도 아니었다. 책꽂이에 등을 기대고 저를 내려다보는 거만한 얼굴에선 숨기려해도 사람냄새가 났다. 무릎 위의 손가락이 톡톡 바닥을 두드리자 드렉슬러는 짜증스런 손길로 제 머리를 헤집었다.

 

 "그거 하지마."

 

 "뭘 말인가."

 

 "그거, 그 손가락, 두드리는 거 하지 말라고. 정신사나우니까."

 

 "아, 거슬릴 줄은 몰랐군."

 

 "그런 게 아니야."

 

 바로 지어오는 의아한 표정에 드렉슬러는 제가 쪽지를 받은 이래로 쪽잠조차 전혀 자지 못하고 있으며 그의 방문으로부터 아흐레인 지금까지 기껏해야 예일곱시간정도의 조각잠만을 잤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쳤다. 피로로 찌들어 있을 얼굴을 한 손으로 쓸어내리다 잠시간 멈추어 코 아래에 걸어놓았다. 이러면 보이지 않겠지. 멍청한 생각이 들었다. 잠시간 빛을 본 조셉의 이름이 입 안에서 머무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 벌어진 틈새로 비집고 나오려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그냥 초조해져서 그래."

 

 "일이 잘 풀리지 않는가?"

 

 "아니, 아니, 무슨 소리야. 솔직히 말하자면 너무 쉬워서 이상할 정도지. 이건 마치,"

 

 이미 치료약이 있는 병처럼 보일 정도거든. 마저 말을 뱉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평소라면 뒷말의 시작은 하지도 않았을 것인데. 피곤한 것이 분명했다. 로라스는 제 손목의 시계를 흘끔보았다. 10시 45분.

 

 "시간이 아직 많이 남았군. 오늘은 읽을 것을 가져오지 않았는데."

 

 이리 일찍 올 것을 왜 가져오지 않았느냐고 묻고 싶지도 않았다. 침입자. 명쾌했다.

 

 "영감, 눈이 완전히 멀었군."

 

 "리처드?"

 

 "오오냐."

 

 본인도 별 감추려는 생각이 보이질 않았다. 태생적으로 거짓말을 못하는 자를 보내는 머저리가 누굴까. 연기일까. 이득은? 취할 것은? 목적은? 제 가설이 의심스러워질 정도로 투명한 사내가 여전히 읽을 거리를 요구하며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꽂았던 책을 도로 뽑아 던졌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중에 네 수준에 맞는 건 그런 것 밖에 없어."

 

 로라스는 드렉슬러가 자신이 그 책을 펴보길 기대하고 있다는 묘한 느낌을 받았다. 별의 항해일지라고 적혀있는 책은 낡아빠진 가죽책으로 그것조차도 헤진 겉껍질에 새로 만들어 덧댄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속지는 누렇게 변색되어있었다. 첫장에는 유려한 필체로 '내 아들에게.'라고 적혀있었고 드렉슬러가 별지도라고 부른 것은 20년쯤 전의 해도였다. 모년 모월 모일. 날씨 맑음. 잔잔한 바다.

 

 "별에 관한 책이 아닌데."

 

 "별 지도 맞아. 붉은 색 별이야."

 

 드렉슬러는 갑작스레 발작하듯이 깔깔댔다. 우스갯소리라도 한 듯이 명랑했지만 경멸스러운 웃음은 감출 수 없이 차가웠으며 웃음 특유의 따스함이라고는 한 조각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Prestigio. 명예라는 글자를 뱃머리 앞에 달고 배는 출항했다. 어린 아들을 품에 안고 바다의 비린 소금내가 나는 털북숭이 사내는 키를 잡았다. 도중 필체가 바뀌었다. 일기였던 것은 소설처럼 다른 이의 눈으로 적혀내려갔다. 내용도, 방식도 모든 것이 달라졌다. 펜을 쥐는 자가 바뀌자 무역을 하던 배는 해적을 만났고 약탈당했다. 배에 싣고 있던 노비, 향유, 짐승, 술과 음식, 돈이 되는 모든 것들이 낯선 땅에 얹어지기 전까지의 기록이 꽤나 즐거운 어투로 유쾌하게 적혀있었다.

 

 "불쾌한 책이군."

 

 씹어뱉는 듯한 어투에 드렉슬러는 빙그레 미소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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샹들리에, 웅성거리는 대화 소리, 한 구석의 관현악단, 칵테일바와 서버, 그리고 사람들, 사람들, 사람들. 파티는 이상할 것이 없었으나 오전 중에 끼인 안개처럼 위화감이 들었다. 로라스는 한쪽 벽에 기대어 파티장을 한 눈에 담았다. 조반니, 알폰소, 돈, 카를로스, 존, 프랭크, 벤자민, 안드레아, 마셜, 라이오넬, 제프리, 기타등등. 기타등등. 스치는 것만으로도 그네들에 관련된 자료가 죽죽 치고 들어왔다.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 한데 모여 아무렇지 않게 웃고 어울리고 있었다. 간질간질한 가슴팍에 멍하니 웃음이 나오려하자 머리가 아팠다.

 

익숙한 군화발에 시선을 채여 시야에 제복의 남자가 걸어오는 것이 보이자 로라스는 저도 모르게 가슴팍 근처까지 날을 세워 손을 들어올렸다.

 

"이런…."

 

"위험했군."

 

제복의 남자는 웃으며 속삭였다. 자연스럽게 붙잡힌 손에 악수를 했다.

 

"그렇군요, 로위드 대령님."

 

등 뒤로 나는 식은 땀에 마주 웃는 수 밖에 없었다.

 

"마티니?"

 

"예."

 

바에 앉아 시시한 얘기를 나눴다. 밖의 날씨는 보았나? 나는 조금 먼저 도착해서 말일세. 선선한 정도고 구름이 낀터라 계속 맑을지는 모르겠군요. 아내분은 어떠신가요. 출산날짜가 다가와 예민한 상태네. 제 기한에 아이를 낳지못하면 위험할지도 몰라. 의사는 우선 기다리라고만 하는군. 아직 기간에 여유가 있어 기다리고 있는 중이지만 혹시 아나. 병원을 바꾸는 편이 나을지. 하지만 제가 알기로는 그 병원의 의사가 제일 능숙하다지요. 병원 역시 이 근방에서 제일 훌륭한 곳 아닙니까? 이제와서 병원을 옮기는건 오히려 산모에게 위험한 선택일지도 모르죠. 옳은 얘기처럼 들리지만 나는 아무래도 예비 아버지로써 불안해서 말일세. 그 의사는 일전에 의료사고를 낸 적이 있거든. 한 번 실수한 사람은 그 부분에 더 민감한 법이죠. 두 번 실수한 사람은 그 실수를 필히 다시 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지.

 

냉랭한 분위기로 바텐터는 빈 잔에 술을 채워넣었다. 병에서 액체 흐르는 소리가 울렸다.

 

"부디 순산해야할텐데."

 

"괜한 걱정이십니다."

 

"그러고보니 자네도 슬슬 짝을 찾아야지. 마음에 차는 아가씨는 만났나? 나는 자네가 여자 만나는 걸 본 적이 없어. 혹시 멀쩡히 생겨선 씨주머니가 텅 빈 것 아닌가? 요샌 가끔 그런 생각도 하지."

 

"대령님의 뛰어난 상상력에 맞춰드리지 못해 죄송할 따름이군요. 제 짝은 아직 인연이 아닌가봅니다."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고? 혹시 남자 좋아하나?"

 

"그런 일 없습니다."

 

 쯧, 로위드는 가볍게 혀를 찼다.

 

"아니야, 그건 또 모르지. 신께서 결정하신 일인데 어떻게 받아넘길 수가 있겠어. 상대가 남자면 어떨까. 여자를 사로잡으려면 무엇이 필요하지? 옷, 신발, 보석. 남자라면 집이나 차, 돈인가. 아니지 아니야. 무드가 없지. 사랑에는 무드가 필요해. 필요하다면 반지라도 주어서."

 

눈이 번뜩였다.

 

"사로잡아야 하지 않겠나."

 

 등 뒤로 식은 땀이 흐르고 있었다. 제 검지 손가락의 반지가 유난히 빛났다.

 

 

대령은 미혼이었다.

 

 

 

와장창. 철기 쏟아지는 소리가 복도를 사정없이 후려쳤다. 제 공방이었다.

 

"미친 새끼."

 

정신없이 쫓아들어가니 열린 문 뒤로 황망히 방에 서있는 머저리가 보였다.

 

"내가 뭐랬지? 다른 방들은 어떻다고?"

 

금지. 입술이 우물거렸다.

 

"…길을 잃어버렸네."

 

"거짓말쟁이."

 

톡 쏘아 들어오는 말투에 시선을 내리깔았다.

 

"미안하네."

 

"거짓말쟁이."

 

생각없이 방문을 열면 큰소리가 나도록 물건을 장치해둔 것은 자신이었다. 침입자는 죽여버려야지. 드렉슬러는 그정도로 제 영역에 발을 대는 이를 싫어했다.

 

"본 소감이 어때? 네가 첫 손님이야."

 

같은 마피아 새끼니 별 상관없나. 그리 기분나쁜 느낌은 아니었다. 이제 며칠 남지 않았다는 것은 새삼스러울 부분이 없었다. 어제도 시간은 흘렀고 지금도 흐르고 있으며 아마 내일도 흐를 것이다. 그것은 대체로 그랬다. 팔짱을 껴 입구의 문지방에 몸을 기댔다.

 

중앙에 돌기둥은 맨홀에서의 물을 흘리기위해 나중에 세운 것이었다. 100평방미터는 족히 돼보이는 넓은 공간은 벽을 따라 공구와 시대착오적인 물건들이 줄을 서 배치되어있었다. 로라스는 낡은 인간이군. 하고 드렉슬러를 비아냥거렸으나 비웃음만 돌려받을 뿐이었다. "절박해지면 뛰어나지는 법이니까. 원래 그런거야. 자연섭리지." 시덥잖은 소리를 넘기고 벽을 따라 마저 걷던 로라스는 우뚝, 발을 멈췄다. 철, 강하고 빛나는 은빛 광물. 제련되어 날카롭게 빛나는 것은.

 

"후스타(Justa). 랜스인가? 어지간히 엔틱하군."

 

"틀렸어."

 

곧장 돌아오는 대답에 고개를 돌리자 담배를 빼어문 드렉슬러가 곧게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조금 숨이 막혀 길을 열자 떨어지는 선의 긴 팔이 랜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건 내가 만든 거야."

 

"1대 1의 후스타에서나 사용되는 구시대 유물 아닌가."

 

"그래서 좋은 거야. 알베르토."

 

창을 쓰는 손길이 눈을 사로잡았다. 손가락. 단단한 뼈로 불거져나온 마디가 생각보다 굵었다. 연필만 잡아본 샌님이 아닐 거라고, 그래, 그런 생각을 했었지. 조금 웃음이 났다.

 

"단 한 번."

 

순식간에 들어올려진 창은 물결을 타는 물고기처럼 유영하며 곧게 날아갔다. 콰득. 날아간 창은 하얀 페인트로 거칠게 그려진 과녁 정중앙에 꽂혀 온 몸을 푸드덕댔다. 전율이 흘렀다.

 

"단 한 번 말이야."

 

문짝에 그려진 엉성한 페인트과녁, 랜스, 철냄새 가득한 공방. 철냄새는 제게는 너무 익숙했다. 친숙하고 친밀하여 계속 자신을 자극하고 있었다. 로라스는 멍청히 과녁에 꽂혀진 창을 바라보았다. 한 번. 단 한 번.

 

"무모한 무기군. 그저 상징적일 뿐인 비효율덩어리야."

 

"그거면 충분해."

 

목소리에 웃음기가 섞여들어 이것은 마치 일상생활 속 대화의 재간넘치는 농담정도로 들렸다. 순식간에 불안이 흘러넘쳤다. 답을 원하는 얼굴에 드렉슬러는 또 등을 보였다.

 

"그래서 충분하다고."

 

그러고보니 그는 저를 알베르토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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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시 정각, 2시 48분

열두시 정각, 2시 54분

 

나흘째, 드렉슬러는 책상 위에 엎드려 십분 정도 쪽잠이 들었다. 프레파라트 위의 시료가 사라졌다. 커버글라스는 잘 덮여있었다. 갈라진 돌 틈새로 바람과 함께 비치는 빛에 눈이 부셨다. 조짐이 좋지 않았다.

 

로라스는 그 날 이후로 항상 10시쯤이면 구불구불한 지하미로를 지나 드렉슬러의 연구실 문을 두드렸다. 돌이끼, 마른 돌 냄새. 뚜벅뚜벅, 걸음 소리가 명랑했다. 똑똑.

 

대답은 없었지만 사람은 있었다. 정확히는 사람들이 있었다.

 

"매일 같이 오는군."

 

"물품 외에도 일이 많으니까요."

 

로라스는 말 없이 토마스가 앉아있는 제 침대-엄밀히 말하자면 드렉슬러의 것인-를 바라보았다. 토마스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너무 몰아세우지 마세요. 알아서 잘하는 사람이니까요. 그렇죠?"

 

인상은 드렉슬러 쪽에서 썼다.

 

"저 자식은 날 몰아세우지 않아."

 

"하지만 RX가 이렇게까지 제대로 자지 못하는 건 처음 보는데요. 늘 눈가는 붉고 코끝이 헐어있는 걸 제가 모를 줄 아셨어요?"

 

"그건 저 자식이 밤마다,"

 

드렉슬러는 버럭 소리를 내었다가 입을 한 번 다물었다. 적당히 둘러댈 말을 찾는 입술이 우물거렸다.

 

 "...밤마다 자꾸 개새끼처럼 구니까."

 

 "그렇지, 자네는 나 때문에 밤새워 울고 말일세."

 

천연덕스러운 대꾸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로라스는 물흐르듯 자연스럽게 멀뚱히 서있는 토마스를 밀어내고 제자리를 찾았다.

 

 "누, 누가…! 네가,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야."

 

 얼굴이 붉어져 황급히 자리를 떠나는 토마스의 뒤를 보고 로라스는 조금 웃음이 날 것 같았다. 그러다 그 뒤를 쫓아 나가는 드렉슬러에 기분이 상했다.

 

"이쪽은 환자인데 말이지…."

 

 

 

 

엿새째 열두 시 정각.

 

"칼 같군."

 

우선적으로 배양 배지에서의 형질 분획은 성공적이었다. 이제 몇 번의 임상실험을 거쳐 넉넉히 보름정도면 약은 갈래가 보일 것이다. 이렇게 모든 것이 순조로운데. 그럼에도 드렉슬러는 초조해 견딜 수가 없었다.

 

오전중에 급히 넘어온 전서에는 익숙한 약어가 쓰여있었다. The present. WC CTD.-J

 

조셉. 보름. 보름. 손 끝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검은 개는 시간이 갈 수록 점점 드렉슬러에게 관심을 보였다. 이제는 드렉슬러를 보며 꼬리도 슬렁슬렁 흔들어댄다. 결 좋은 꼬리가 휙휙 바닥을 쓰는데도 바닥의 먼지는 일어날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먼지. 먼지? 드렉슬러는 천천히 검은 개를 쓰다듬다 털을 한움큼 움켜쥐었다.

 

열두 시 정각, 3시 7분

 

빌어먹을. 옳다. 빌어먹게도 자신의 예상은 벗어난 적이 없다. 시간이 없었다.

 

핑핑 돌아가는 머리에 따라오지 못하는 손이 답답했다. 이미 머릿속 또렷하게 보이는 내용을 흰 종이 위에 써적어 내리면서도 급해지는 마음에 몇 번이고 연필심을 부러뜨렸다.

 

젠장. 젠장.

 

바들거리는 오른쪽 팔에 결국엔 연필이 동강이 났다. 등을 끌어안겼다.

 

일어나는 시간을 알리라는 요구에 로라스는 그 때부터 항상 이렇게 눈을 뜨면 드렉슬러의 등 뒤로 달라붙었다. 말 없이 가만히 기대어있다가 경직됐던 어깨가 익숙해질 쯤이면 왔던대로 또 말 없이 제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말 만으로도 괜찮잖아."

 

"자리가 너무 춥대도. 그렇다고 내가 춥다는 이유만으로 난방을 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며칠 전 스스로가 했던 말을 고스란히 들으며 드렉슬러는 어처구니가 없어 뒤를 돌았다. 변형, 변질, 변수의 위험이 있는 것은 금지. 이 방 외에 다른 곳의 출입도 금지. 외박도 금지. 금지. 금지. 모조리 금지였다.

 

"그렇다고 해서 네가 말을 잘 듣느냐, 어떻게 생각해?"

 

"글쎄."

 

로라스는 가볍게 웃었다.

 

"아픈 아이는 의사선생님 말씀을 잘 들어야겠지."

 

"말은…"

 

제자리를 찾아 몸을 바로하는 드렉슬러는 또 등뿐이었다. 로라스는 턱을 쓸었다.

 

"일이 끝난 뒤에도 쭉 찾아와도 괜찮겠는가?"

 

"나는 누구 밑으로 들어가는 거 안 좋아해."

 

일절 고민 없이 뱉은 말에 말문이 막힌 것은 로라스였다. 톡톡, 손 끝으로 뺨을 두드렸다.

 

"너무 멀리 나간 것 같은데."

 

사각거리던 손이 잠시 멈췄다.

 

"틀렸나?"

 

으음, 로라스는 곤란한 듯 앓는 소리를 냈다. 예민하긴. 무릎 위 담요를 고쳐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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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시 정각, 2시 45분

 

까득까득, 손톱을 씹었다. 어쩌면, 정말로. 단정히 눈을 감고 잠들어있는 사내를 보았다. 리처드, 리처드. 조셉, 조셉 퍼거슨. 퍼거슨. 퍼거슨. 거친 모래알 같은 이름들이 입 안을 굴러다녔다.

 

미세하고 조그마한 것들이 신경 끝에서 맴을 돌았다. 그것은 사고의 진행을 방해하는 오탈자 같은 것들이었다. 성난 황소처럼 달려드는 시간에 붉은 케이프만을 들고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화이트 칙스. 창백하고 메말라 온갖 편향으로 가득찬 짐승우리.

 

드렉슬러는 다시금 조그마한 소년으로 돌아간다. 볼품없이 말라 이국의 짐승들과 함께 철창에 갇힌 소년으로 돌아간다. 짐승 냄새. 짐승들의 냄새. 창 사이 들어오는 햇빛으로 공중에 떠다니는 온갖 털과 비듬과 먼지와 그들의 삶을 보았다. 부족한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며 땀내 가득 배인 손으로 삶을 놓질 못했다. 허기지는 것은 배가 아니었다.

 

작고 뚱뚱한 남자가 뒤뚱대며 걸어와 철문 사이로 종이 조각 몇 장과 목탄 조각을 넣어주었다. 콧수염을 찡긋거리며 뱁새 같은 눈으로 남자는 자신을 바라보았다. 내미는 것을 낚아 챘다. 때 끼인 손으로 그것을 움켜쥐고서 빼앗기지 않으려 날을 세웠다. 남자는 웃었다.

 

아까워. 아까워.

 

조셉.

 

기척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연구는 잘 되어가는가. 멍해보이는 걸."

 

농 섞인 어조에 시간을 일지에 적으며 대꾸하지 않았다. 로라스는 몸을 일으켰다.

 

"자네가 잠을 제대로 자고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데."

 

돌아보지 않는 뒷모습에 검지가 목 언저리를 배회했다. 뻣뻣히 굳은 뒷목은 저도 느낄 수 있었다.

 

"남이사."

 

"난 지금 내가 자네 시간에 대한 지불 역시 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닌가?"

 

드렉슬러는 화가 치밀어 벌떡 일어섰다. 감히, 누구를. 입 안에서만 맴도는 말을 뱉어낼 수는 없었다. 처음부터 심상찮더니만. 이것으로 리처드가 붙인 사족은 명백한 것이었다. 귀찮은 영감.

 

 

"나는 네 생각보다 훨씬 성격이 나빠. 그건 못들었나?"

 

"불 같다는 이야기야 들었지. 다른 것은 글쎄."

 

치미는 분노를 애써 감추지 않는다. 그 모습이 로라스는 꽤 재밌다고 생각했다.

 

"그래, 내가 결례를 범했군. 천천히 하지."

 

양 손을 들어올려 어깨를 으쓱 거리고 침대로 되돌아가 앉는 로라스의 모습에 드렉슬러 역시 다시금 자리를 찾아 펜을 들었다. 이리저리 휘갈겨지는 수식들은 평소보다 날카롭게 비틀려져 써내려졌다. 별 것이 다 문제를 일으켰다. 종이를 북 찢어 책상 구석 한 쪽으로 던졌다. 분이 풀리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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