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tumblr : http://bincannote.tumblr.com twitter : @bincannote Bincan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65)
Faith&Spear (65)
그림 (4)
단편 (24)
그 곳, 벼랑 언저리 즈음 (2)
Novio (8)
짝사랑 (2)
Midnight Blue (23)
D.D (1)
Acto de jura de band.. (0)
미완 (1)
Total
Today
Yesterday

달력

« » 2024.9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최근에 올라온 글

남자는 취한 듯이 편지 장을 손에 쥐고 끊임없이 반복해 읽어 내렸다. 몇 글자의 이름과 몇 가지의 단어와 짤막한 문장. 그 단출한 문장들. 반쯤 벌어진 입술이 달싹였다. 그가 오고 있었다.




드렉슬러의 외근은 그 자체로 낯선 감이 있었다. 하지만 바다 건너 일련의 사건들이 일반적이지 못하여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부분이 거의 없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평소 그런 단어들로 푹 젖어 살아가는 그가 이 원정에 일순위로 배정을 받게 된 것은 사실상 꽤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늘 상황은 괴상할 수록 그에게 일상이라고 부를 만한 일이 되었다. 특히나 이번 사태는 그 예측불가의 특수성으로 드렉슬러 특유의 변덕스러운 성향과 호기심으로 시작되는 기호에 너무나도 철저히 부합되어 맞아 떨어졌던 것이다. 요점으로, 문제는 드렉슬러가 아니었다.



로라스는 책상 위에 놓인 쓸모없는 종이짝을 노려보았다. 변수가 너무 많은 일에 변수를 만들 요소는 최소화하는 편이 좋다. 이번 일에 대한 윗사람들의 태도는 그들의 말을 빌려 조금 고상하게 에두르자면 대충 이런 모양새가 되었다. 그들이 보기에 제 성격은 불씨 앞의 마른 장작 같았고 사소한 정에 휘둘렸으며 고지식하여 대처에 융통이 없었다. 외곬으로 다른 이들과 공동 작업에 적절치 않으며 단독 행동의 위험이 있어 이번 건은 '절대' 허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실 윌라드는 로라스를 직접 불러다가 위쪽의 의사를 전달하며 절대라는 단어를 몇 번이고 사용했다. 어지간히 그 답지 않은 일이다. 로라스는 상심했다.



공식으로 내려온 파견지원서에 대한 답장에는 처참할 정도의 냉엄함이 있었다. 로라스는 몇 번인가 책상 서랍에 지원서를 넣었다 다시 꺼내보았다. 제 생각에도 부질없는 짓으로 부적합이라는 붉은 도장은 밤새 타닥타닥 써 내려갔던 검은 잉크 위에 시간이 갈수록 깊숙히 스며들었다. 그런데 이 남자에게 일상이라는 단어를 써도 좋은 걸까. 그는 잠시 그런 생각을 했다.



바다 건너 남쪽에서 수증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보고를 받은 관계자 모두 숨을 죽였다. 바다 건너의 전쟁이 또 일어날지도 모른다. 공포로 잠식된 침묵 속에서 모두가 시끄럽게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능력광폭, 불안, 억제. 섣불리 접근 할 수 없는 지대를 가장 전통적이고 고전적인 방법으로 접근하기로 결정이 나자 로라스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석 달. 못해도 석 달이 걸릴 거야.



드렉슬러는 별 일 아닌 양 그렇게 중얼거리듯 말을 흘렸다. 그가 묻지않은 말에 친절히 대꾸하는 일은 도무지 익숙하지가 않아서 로라스는 한참을 끔벅끔벅 아직 꼬리가 남은 겨울 햇볕이 조금 따갑게 그를 내리쬐는 것을 구경했다. 펜이 사각거렸다.



회사에서 비품으로 타자기를 배정해주었는데도 그는 꿋꿋하게 잉크펜을 썼다. 그게 어느 날인가. 로라스는 아마도 그것이 제가 재작년에 준비했던 크리스마스 선물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 해를 떠올리며 찬찬히 드렉슬러를 살폈다. 몇 번을 주의깊게 살펴도 펜촉 달린 펜대가 만년필로 바뀌었을 뿐. 남자는 여전히 변한 게 없었다. 고집스러운 것은 둘이 참 닮았다. 나는 그래서 그가 좋은 걸까. 로라스는 그런 생각을 했다. 잠시. 내가 그를 좋아하나. 물음이 바뀌었다.



“혹시 모르니까 가지고 있어. “



마지막 날의 부름으로 로라스는 열쇠를 받았다.



“별 것 아냐.”



열쇠 쥔 주먹을 움켜쥐고 멀뚱히 서있는 로라스를 보며 드렉슬러는 슬쩍 웃었다. 괜찮아. 덧붙여진 말이 속에서 웅웅 울렸다.



날들은 어느 순간이고 어느 시간이고 같았다. 둘은 사무실에서, 갑판에서, 제 것이 아닌 남의 공간에서 시간을 헤아리지 않았다. 하늘이 흐르고 바람이 불었으며 일상이 업무가 되었다. 한 달쯤 되었을 때, 로라스는 이 넓지도 않은 집의 거실이 휑하다는 생각을 했다.



빈 공간은 찾아오는 것이다. 깨닫는 순간 낯설어지는 시간이 있었다. 로라스는 소파에 길게 누워 슬리퍼를 벗어던지고 읽던 책을 가지런히 가슴 위에 덮었다. 허하다. 내가 저녁을 먹었던가. 천장 위의 조그만 백열등에서 열이 나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그는 이것이 별 것 아니라고 했다. 괜찮다고.



“괜찮아.”



로라스는 눈을 감고 그 때의 어조를 흉내내보았다. 괜찮아. 그리고 슬쩍 웃는다. 그래서 나는 저녁을 먹었던가. 자꾸만 헛생각이 났다.




평범한 날이었다. 로라스는 우편함 속 드렉슬러의 우편물을 가지고 그가 준 열쇠로 문을 열어 입구의 테이블 위에 평소처럼 열쇠와 물건들을 올려놓은 후 코트를 벗어 옷걸이에 걸어놓았다. 그대로 복도를 걸어나가다 언듯 익숙한 갈색봉투를 본 기분이 들어 왔던 길을 돌아 걸었다. 그리고 알베르토 로라스. 제 이름을 보았다.



우편은 한 장의 편지와 두 장의 보고서로 이루어져있었다. 다른 재질의 편지지에 자꾸만 손가락 끝이 간지러웠다. 로라스는 편지를 제일 나중에 읽기로 결정하고 보고서 맨 뒷장으로 종잇장을 감추었다.



보고서의 한 장은 이번 원정 구성원들의 이름 목록과 그 역할에 대한 사본이었고 나머지 한 장은 서두 가득 그들의 노고에대한 의미없는 꾸밈말로 그 자리를 채우다가 마지막의 몇 줄로 상황을 보고, 종료하는 알림문이었다. 로라스는 내용을 빠르게 훑었다. 서두르는 움직임에 자꾸만 문장들이 겹쳐 읽혔다.



“아-”



1차 원정종료. 귀환 예정일 2.10~16. 전원 무탈.



무탈! 그 단어가 어찌나 기뻤던지. 로라스는 그제야 괜찮아.-하고 제대로 드렉슬러를 흉내낼 수 있게 되었다.



굳은 살로 갈라진 손 끝에 사각사각 종이 소리가 요란스러웠다. 로라스는 보고서를 바닥으로 흘리고 그 묘하게 갈색빛이 나는 종이를 양 손으로 쥐었다.




-친애하는 알베르토



우선 집을 봐줘서 고마워. 사실 내일에야 널 불러다가 열쇠를 맡길 셈이지만 아마 너는 거절하지 않을 테니까 미리 인사한다. 사실 꼭 봐주지 않아도 좋았어. 꽤 긴 여행이지만 사람을 고용하면 됐을 일이니까. 하지만 만약 내일 내가 너에게 그 열쇠를 넘기게 된다면-분명 그럴테지만-나는 그냥 그러고 싶어서 그런 거야.



아마도 넌 두 달하고 스무날쯤 지난 이 시기에 이 편지가 어떻게 보고서와 함께 내가 아닌 네 앞으로 도착했는지가 궁금하겠지. 나는 이 편지를 떠나기 전 '그 상냥한 홀든'에게 부탁했어. 무뚝뚝하지만 꽤 괜찮은 녀석이야. 내 눈이 틀리지 않았다면 녀석은 편지봉투 없이도 이 편지를 읽지 않겠지.



별 다른 일은 아니야. 나는 '이 일'이 내 계산대로 문제없이 끝난다면 우리가 내년 2월 14일 오전 중으로 포츠머스에 도착할 거라고 생각해. 아마 그건 틀림없이 그럴테고 말야. 그래서 만약 별 일 없이 보고서와 편지가 네 앞으로 도착한다면 네가 항구로 내 개인 짐을 실을 수레를 하나 보내주었으면 해. 나는 짐이 꽤 많거든.



나중에 보자, 알.



-다리오 드렉슬러


ps. 선착장으로 직접 전보를 친다면 그렇게 번거로운 일은 아닐 거야.






여관의 침대는 꽤 삐그덕 거렸다. 흰 커튼을 걷어내면 다닥다닥 늘어선 낮은 건물들이 보였다. 파랑과 초록과 노랑과 붉은 벽돌과 페인트, 그 알록달록한 색 건너건너로 바다와 배가 있다. 걸어서, 차를 타고, 요 근 이주간 몇 번이나 되걸었던 길은 이제는 눈을 감고도 선히 떠올릴 수 있게 되었다. 코 끝에 빙글빙글 묘하게 바다와 안개와 새벽 냄새가 난다. 들뜬 탓이다.



로라스는 머리맡 달력에 붉은 선들로 하루하루를 헤아리며 날이 가기를 기다렸다. 그처럼 신발을 벗어던지고 침대 위로 뛰어들듯 누워도 보고 베개를 끌어안아 얼굴을 문질러도 보고 이불 속에 몸을 동그랗게 말기도 했다. 읽히지 않는 문장과 떠도는 생각들과 달력의 나열된 숫자들, 시간들, 그리고 첫 날의 하얀 호텔 시트. 그 새 것의 냄새로.



로라스는 부정하는 것을 그만 두었다. 시간은 기다림이었다. 그는 눈을 뜨면 붓의 결이 생생한 흰 나무 격자창 틈으로 불어드는 푸른 바람이었다가 또 잠시간 지기 전 해처럼 붉게 붉게 타올랐다가 조금 시간이 지나면 꿈에 빠져들 남빛 짙은 천장의 총총히 박힌 별이 되었다가 하며 하루들을 보냈다.



2월 14일. 하필이면. 로라스는 오지 않는 잠에 의자를 끌어 창틀에 팔꿈치를 괴고 손을 맞잡아 입을 기대어 막았다. 우연이라기에는 얄궃고 필연이라기에는 너무나 잘짜여진. 이렇게 자신은 결국엔 기대하게 되고 말지 않는가. 신이 계시어 나를 용서치 않으신다면 나는 기어코 과거 흐린 영광 속 역사에 상처로 남은 성자가 되리다. 중략.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중략. 가로등 불빛을 가벼이 얹고 숱많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결국 로라스는 밤을 새웠다.



해가 뜨기 무섭게 로라스는 택시를 잡아탔다. 오랜시간동안 배를 탔으니 늘 헝크러져있는 머리는 더 제멋대로일 것이라고 마음대로 생각하면서 파란 바다를 뒤로 하고 제게로 걸어오는 그 곧은 걸음걸이를 떠올렸다. 상상은 즐거웠다. 그는 행복해보였고 저를 보며 웃고 있었다. 바라보는 것이 좋다. 바라봐 오는 것이 좋다. 그 밝은 눈으로, 아름다운 웃음으로.



로라스는 웃음이 비죽비죽나오는 것을 참지못했다. 주의 신실한 종으로 기도를 멈추지 못하면서도 그 이에 관해서라면 어울리지않게 엉큼한 상상을 하는가 하면, 또 동시에 만남에대한 순수한 기대로 아이처럼 마냥 들떠올랐다. 가슴 언저리를 배회하는 손에서는 손 끝으로부터 진동이 오르고 있었다. 부디 성 발렌티노의 축복이 우리에게도 함께 하길. 드디어 육지의 끝의 끝으로부터 하얀 파도 위로 고동소리가 섞여 밀려들었다. 그랬다. 그가 오고 있었다.



드렉슬러는 부드러운 천 사이 감추어두었던 날선 면도날 하나를 끄집어내었다. 제 계산대로라면 내일 정오쯤 배는 항구에 도착할 것이고 제 집에가면 어쩌면 로라스를 만날지도 모른다. 이것은 열쇠를 주었을 때부터의 생각이다.



석 달동안 기른 머리는 적당히 넘겨 묶을 수 있는 길이까지 왔지만 거울을 보며 드렉슬러는 그것이 꽤나 꼴사납다고 생각했다. 설상가상으로 어중간한 길이의 수염은 몸의 긴 선과 어울어져 날도둑놈처럼 보인다. 이렇게 만나서는 저도 모르게 삼십육계 줄행랑을 칠테다.



되는데로 움켜쥐어 면도날을 세워 쳐냈다. 적당히 적당히 해야 멋이 난다. 저는 늘 이렇게 다듬었다. 머리는 이쯤. 항상 이쯤. 그리고 우묵한 접시에 면도크림을 개어 뜯어먹은 듯한 수염을 살살 밀어내었다. 사각사각. 억센 털을 깎아내는 철 소리가 피부 위의 진동으로 들린다. 단조로운 일상을 타고 생각들이 차곡차곡 몰려들었다. 2월 14일이라니. 로라스라면, 그라면 오늘이야말로 꽤나 로맨틱한 생각을 하고 있지않을까. 문득 떠오르는 수줍은 이미지 위로 무언가 말하고 싶은 입술이 웃음을 참고 꿈틀거렸다. 바-앙. 머릿속을 가득 채운 생각과 또 그 생각들의 위로 파도소리가 섞이며 배 경적 소리가 울렸다. 그러니까 지금 저는, 그에게 가고 있었다.



입항은 순조로웠다. 실려있던 짐들이 인부들의 손에 분주히 옮겨지는 사이로 가벼운 가죽케이스나 배낭등을 메고 승객들은 차례차례 하선하고 있었다. 드렉슬러는 그들 사이에 가만히 서서 이른 아침 안개의 뒤로 멀리멀리 시선을 두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옅은 태양 아래의 안개 뒤로 묘하게 익숙한 걸음걸이의 남자가 저를 향해 조금은 조급히 걷는 것이 보였다. 흐릿하게. 또 점점 뚜렷하게. 안개는 순식간에 개었다. 2월 14일의 일이다.

'Faith&Spear > 단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라드렉/G] 짝사랑 (번외)  (0) 2016.10.04
[로라드렉/G] 공백  (0) 2016.10.02
[로라드렉/G] 당신 혹은 죽음-상  (0) 2016.07.12
[로라드렉/G] 자유로운 자살에 관하여.  (0) 2016.02.29
[로라드렉/G] 감상  (0) 2015.11.22
Posted by Bincan
, |

 로라스에게 객관적 사실이란 이렇다. 이 세상 모든 매혹적인 일이 눈 앞에 벌어진다고 해도 결국 제가 하는 일이라고는 그 아름다운 것들을 배를 채우듯이 게걸스럽게 집어삼켜 제 아귀같은 욕망을 잠시 진정시키는 정도이고 불행하게도 그 후의 욕심은 더욱더 커지기만 하리라는 것.


 제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잡아먹었다. 둘 사이에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그 광경을 보고도 어떤 불쌍한 여자와 결혼을 하여 저를 낳았다. 집은 엄격했고, 고상했으며, 또 품위있었다. 그는 이런 집에서 태어났고 이제는 그 빛을 잃어버린 귀족이란 이름으로 장식한 명예의 껍데기를 뒤집어 쓴 채 스스로의 규격에 맞는 인간다움으로 제 정돈을 마감하여 곧은 허리, 아름다운 걸음을 시간에 맞춰 옮겼다.


 격세 유전이라는 것은 굉장히 새롭고도 놀라운 발견이었다. 고결한 피와 더러운 피로 나누어지던 세계가 조금더 세분화되어 그 뿌리 자체도 찾기 힘들어졌으니 누군가 혼란으로 제 마음 깊은 곳의 지저분하고 역겨운 원죄를 덮어버리려했다면 그것은 굉장히, 또 천재적으로 성공한 셈이다. 이것은 드렉슬러의 객관적 사실이다.


 드렉슬러는 질병대책연구소의 수석연구원이다. 그의 업무는 새로운 발견에 대한 조언과 새로운 발견을 위한 연구, 또 제 불평을 쏟아놓는 것이다. 다행히도 일련의 일들에 맥락을 부여하는 것은 다른 이가 한다.


 며칠 전 드렉슬러는 파혼당했다. 양가의 부모와 약혼녀와 그녀의 사촌이 함께한 자리였는데 그의 직업에대한 관심으로 그녀의 사촌이 합석을 원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드렉슬러는 뭔가 아주 작고 못된 마음이 제 두뇌를 두드리는 것을 느꼈다.


 사실 결혼에대한 끝없는 불신과 제 선택과 인생에 대한 회의로, 일에는 전혀 도움 되지 않는 여러가지 생각들에게 시달리던 참이었으므로 그는 잠시간 시간을 두고 빙그레 웃었다. 준비한 짧은 브리핑은 너무나도 성공적이어서 약혼녀측의 어머니는 제가 앓던 지병으로 인한 가벼운 쇼크로 기절해버렸고 자신은 며칠 뒤 가문에서 제명되기에 이르렀다. 그 후, 제 물건이 든 네댓개의 상자들을 작은 하숙집으로 옮기면서 드렉슬러가 한 반응이라고는 또다시 빙그레 웃으며 어깨를 들썩인 것 뿐이다.


 "이게 내 일인걸."


 업무에 시달리던 비서가 또 그만두었다. 기왕이면 제대로 된, 조금더 일처리가 빠른, 아무것도 묻지 않지만, 그래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 지 정도는 알아듣는. 그간도 온갖 불평의 연속이었지만 이번엔 소장이 뛰어내려왔다. "한 명만 더 관뒀다가는 자네를 내 옆자리에 앉혀놓고 일을 시키겠어!" 소장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소리를 질러댔다. '네, 알겠습니다. 라고 하면 되겠지.' "하얗고 붉고 분홍빛의 기름이 진 게 굉장히 돼지 같이 생겼군." 침묵이 흘렀다.


 새로운 비서가 채용됐고, 또다시 보조연구원이라는 타이틀로 책상에 명패가 달렸다. 드렉슬러는 제 책상 맞은 편 밤색 나무탁자 위, 흰종이에 타이핑되어 투명한 플라스틱 판에 보잘 것 없이 끼워져있는 그 명패를 스쳐지나가다가 마치 춤을 추듯 부드럽게 미끄러져 뒷걸음질쳤다.


 "알베르토 로라스입니다."


 사촌이었다.  


 "지원했다고."


 "사실입니다."


 드렉슬러는 로라스의 곧고 푸른 눈이 몹시 서늘하고 차갑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것은 깨질 듯한 살얼음보다는 너무 투명하게 바닥이 들여다보여 깊이를 알 수 없는 호수를 연상시켰는데 순간 찰박-하고 호수의 물이 튀는 장면이 떠오르자 드렉슬러는 로라스의 두 눈이 정말로 차가운 것은 아닌지 두 손에 쥐어 확인해보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내가 허락을 할 것 같나?"


 "사정을 들었습니다."


 소식은 일종의 기회였다. 언젠간 발현될 제 유전병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일하는 것. 적과의 동침. 제 사촌 여동생의 결혼 소식은 그저 그런 의미였다.


 로라스는 몸단장을 했다. 흠 하나 없이 마음에 들어야했다. 이것은 지금껏 제가 만났던 기회중의 가장이다. 불청객의 입장으로 종잡을 수 없이 까탈스럽다는 그에게 밉보여서는 안되었다. 그래서 그저 그런 마음이었다.


 시체, 해부학 자료, 흑백으로 쏟아지는 내장들, 사실은 뇌조각인 것과 그 위에 꽂혀있는 고정핀, 세포조각의 상호작용들을 그는 굉장히 짧고 명료하게 집어냈다. 오분. 아마도 정확히 오분. 빠짐없이 치밀하게 짜여져 제 아버지의 만류를 배경음악으로 그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로라스에게 이 날은 굉장히 강렬한 경험으로, 그 오분 동안 그는 순간적으로 눈 앞이 시뻘개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붉은 색은 선명하고 아름다운 빛으로, 선연한 두려움과 치솟는 기쁨이 서로 얽혀들어 가득 차올랐다 순식간에 사라졌다. 로라스는 드렉슬러에게서 어떤 이미지를 받아냈다.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의 선택은 최악이었던 셈이다.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Faith&Spear > 단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라드렉/G] 공백  (0) 2016.10.02
[로라드렉/G] 2.14  (0) 2016.08.16
[로라드렉/G] 자유로운 자살에 관하여.  (0) 2016.02.29
[로라드렉/G] 감상  (0) 2015.11.22
[로라드렉/G] 무제  (0) 2015.09.13
Posted by Bincan
, |

말하자면 그는 일종의 로맨티스트다. 별을 쫓고 늘 끊임없이 상상하며 움직여 현실을 살아가지만 그 자리에 머물러 살아가는, 고인 샘물이다.

 

어느 순간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모든 것이 사로잡히는 때가 있다. 흔하지 않지만 흘러가버릴, 아주 단순하고도 중요한 생각 말이다. 다리오 드렉슬러에게 이것은 별마저 저버린 새벽녘에 제 서재의 파일철 위에 나란히 새겨진 듯 적힌 제 이름을 본 순간 떠올랐다.

 

일종의 나열에 그는 순식간에 질려버리고 말았다. 정말로 깨달아버리고 만 것이다. 지겨워서 죽어버릴지도 몰라. 이것은 전쟁의 시작 전에 습관처럼 중얼거리던 말이다. 그는 고개를 들어 제 주변을 둘러보았다. 변하지 않는 일상, 변하지 않을 제 자리, 변하지 않는 세상, 변하지 않을 제 생각.

 

1934. 34. 달력은 제 나이를 떠올리게 했다. 몇 번이나 이런 순간이 찾아왔었지? 그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시계는 계속 움직였다. 어린 시절보다 빠르게. 또 의미 없이. 끊임없이 떠오르는 아이디어들. 생각들. 의욕. 성취. 갈망. 욕구. 저를 살아나가게 했던 것들이 몸을 불렸다.

 

뻔뻔하기 그지없이 당연스럽게도 그런 것들에 의지해 저는 살고 있었다. 수없이 많은 이들이 죽고 죽어나가는 상황 속에서 몇 번인가 시체를 밟고 전진한 적이 있다. 얇은 천과 그보다 두꺼운 철판, 다시 철판, 천조각, 그 아래의 살덩이. 그 감촉을 기억하느냐 묻는다면, 아니. 3의 눈을 통할 때는 비참하고 괴로웠던 일들이 정작 바로 제 발 아래에서는 하나의 과정이 되었다. 그 좋은 머리로, 그 비상한 두뇌로 기억해내는 것은 효율을 위해 걸러진 필요한 데이터들뿐으로, 저는 정말 삶을 살고 있는 것인가. 나는 운명을 살아간 것이 아닌가. 최악이었다.

 

그는 자존심이 강했다. 모든지 스스로 결정하지 않으면 안됐고 그래서 가문에서 퇴출당했으며 그래서 그것이 아무렇지도 않았다. 새벽의 생각은 참으로 무서운 것이었다. 그래서, 무언가가 내 삶을 살고 있다면. 사로잡힌 생각은 털어내기도 전에 스며들었다.

 

상냥한 목소리가 등 뒤로부터 굳어버린 어깨를 감쌌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제 이름이다.

 

다리오 드렉슬러는 알베르토 로라스가 좋았다. 명백하게 로라스는 드렉슬러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는 제 욕망을 참아는 냈지만 숨길 줄을 몰랐다. 그리고 그것에 눈이 어두워져 제 앞을 잘 보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드렉슬러가 제 마음을 숨겨놓고 꺼내지 않는다는 것을 몰랐다. 참아내지 않아도 좋을 관계가 되어서도 그것만큼은 몰랐다.

 

날 사랑해?”

 

멀뚱히 저를 쳐다보는 시선에 당혹스러워하던 로라스의 얼굴에 온화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것은 정말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는 눈가를 휘고 입꼬리를 끌어당겨 환하게 웃었다.

 

그래. 사랑하네.”

 

로라스는 제가 그 말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쁘다는 듯이 굴었다. 드렉슬러는 그의 감정들이 시간에 따라 옮겨 다니는 것을 자세히 보았다.

 

사랑하네. 말을 마치고도 사랑이라는 단어는 입안을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로라스는 드렉슬러가 몹시 좋았다. 그의 첫인상은 처음에는 그저 그랬다. 늘 변덕스럽고 제멋대로에 이기적으로 보였으니까. 하지만 그곳에는 맥락이 있었다. 그는 그저 자기자신을 확신하는 사람이었고 스스로를 믿었으며 그만큼 사랑할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당위성을 따지자면 그렇다는 것이고 사랑에 빠진 것은 그저 저항할 수 없는 욕망에 의한 것이었다. 한 번은 왜 저를 사랑하게 됐느냐는 물음을 받은 적이 있었다. 로라스는 그 질문에 대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것은 그저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 로라스는 아무 경험도 없는 신출내기 기사도 아니었고, 여자를 모르는 갓 입학한 아카데미생도 아니었다. 그는 매력적이었고 신사적이었으며 또 언제든지 그를 원하는 여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기사도에 관해 고루하게 적혀 내려진 삼류 연애소설처럼 사랑을 나눌 기회가 충분히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사랑의 종류 중 하나였음에도 만족스럽게 뜨겁지 않았다. 그 끝에서 그는 늘 제대로 된 사랑이 찾아오리라고 믿었다.

 

이로써 로라스 역시 로맨티스트인 셈이다. 물론 드렉슬러와 조금은 다른 종류의. 로라스는 제가 그에게 제 사랑을 고백하던 날을 떠올렸다. 드렉슬러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어떻게 제게 사랑을 고백할 수 있느냐 물었다. 그 질문에 로라스는 드렉슬러의 사회적 위치, 성별, 또 세상의 편견에 관해 자신의 굳은 다짐을 설명했다. 드렉슬러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음을 털어내듯 웃고는 다시 말했다. 고백으로 잃어버릴 우리의 관계에 대한 두려움을 어떻게 이겨냈느냐. 그것이 그의 물음이었다. 로라스는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고는 오른손을 왼 가슴 위에 얹어 답했다. 내 온 마음으로.

 

관계는 섹스가 키스보다 빨랐다. 육체적 욕망의 뒤를 드렉슬러는 기다린다고 했다. 제 육체가 로라스에게 매력적이었을 것이라 기대하기는 어렵지만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지 않겠느냐, 침대 위에서 드렉슬러는 농담조로 웃었다. 로라스는 그 모습 뒤의 두려움을 읽었다. 그가 겁을 내는 것은 처음 보았다. 두려움의 근원지를 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자체로 묘하게 흥분이 되었다.

 

첫 사정으로 드렉슬러는 처음과는 달리 굉장히 부끄러워했다. 흥분의 열기인지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어서는 지금처럼 또 가만히 저를 올려다 보았다. –둘의 첫 체위는 정상위였다. 로라스는 여전히 이것을 제일 좋아한다.- 드렉슬러는 제가 어떠했느냐고 가만히 물었다. 마치 제가 그를 강간한 기분이 들어 로라스는 순간 죄책감에 빠져들었다. 그것은 순식간에 제 영혼을 물고 흔들어댔는데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 있을만한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투박하지만 긴 손가락이 우아한 그의 양 손이 제 가슴팍을 밀어내려 들었다. 로라스는 당혹으로 그 양손을 베개 위로 내리누르고 정신 없이 그의 얼굴 곳곳에 입을 맞추며 드렉슬러에게 키스를 애원했다.

 

그리고 드렉슬러는 그 애원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로라스의 생각보다 드렉슬러는 그를 먼저 사랑하고 있었다. 그저 숨기는 것이 더 능숙했을 뿐으로, 제 속도 오랜 시간 동안 까맣게 타 들어가고 있었다. 제게 외면은 타고난 것처럼 익숙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과는 늘 맞서 싸워왔기 때문에 저도 몰랐던 일이다.

 

사랑. 드렉슬러는 이 단어가 껄끄럽기 그지없었다. 그 앞에서 저는 저항도 해보지 못한 채 끌려들어가고 만다. 로라스를 사랑하고 있느냐면 그랬다. 너무나 열렬히 사랑하여 제 마음을 뱉어낼 용기조차 내지 못할 만큼 사랑했다. 자신은 용맹했고 똑똑했으며 지적이고 근사했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너무나도 겁쟁이어서 놀랍게도 저는 한 번도 로라스에게 사랑한다 말한 적이 없었다. 그에 반해 로라스는 어떠한가.

 

나는 자살할 거야.”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편히 기대며 드렉슬러는 늘어지듯 말했다. 로라스는 큰 충격으로 떠듬떠듬 입을 열기 위해 입술을 달싹이며 한 발짝 앞으로 나왔다. 개의치 않고 드렉슬러는 말을 이었다.

 

만약 내가 자살한다면,”

 

그만.”

 

낮은 목소리가 떨림을 가득 안고 흘렀다. 평소보다 묵직한 소리는 명령이었고 곧 절망이었다. 다시금 입이 열리자 결국 로라스는 빠르고 힘 있는 걸음으로 드렉슬러에게 뛰어들었다.

 

그만. 그만해.”

 

큰 소리가 났다. 고르지 못한 숨이 쉭쉭거렸고 드렉슬러는 그 소리가 제 심장부근까지 저릿하게 하는 것을 알았다. 밀어내는 손길에 로라스는 생각보다 쉽게 밀려났다. 그는 절망으로 잔뜩 일그러진 눈을 한 주제에 드렉슬러를 안심시키려 억지로 웃고 있었다. 드렉슬러는 이것으로 로라스가 제게 완전히 매여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꼈다. 그래서 더욱 더 말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왜 그런 소리를 해. ? 그만하게.”

 

로라스의 눈 앞의 드렉슬러는 첫날의 침대 위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다만 이번에 드렉슬러는 스스로 로라스의 목에 팔을 감아 그를 다시 힘껏 제 품에 안고 속삭였다.

 

만약 내가 자살한다면 알베르토, 그건 널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야.”

 

드렉슬러는 로라스의 정수리에 몇 번인가 입을 맞췄다. 성스러운 의식처럼, 이러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그것은 그간의 무엇보다도 자연스럽게 일어났다.

 

사랑해, 알베르토. 사랑해.”

 

드렉슬러는 로라스를 사랑했다. 스스로를 사랑하는 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그 새벽 내, 그리고 그 아침, 점심과 저녁까지 그는 그간의 제 결정들에 관해 끊임없이 고민했다. 생각이 갈무리되기 시작하자, 그것이 먼 미래일지 가까운 이래일지는 알 수 없었음에도 그는 이미 이 생의 끝에서 스스로가 자살하고야 말 것임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갈망하는 자유를 얻는, 가장 근사치에 가까운 마지막. 자신은 이제는 이것을 열망할 것이다. 그것은 예견과 같은 종류의 깨달음이었다. 그리고 이 잔인한 계산 속에 로라스가 서있었다. 제 사랑은 그에게는 마지막 배려가 될 것이었다.

'Faith&Spear > 단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라드렉/G] 2.14  (0) 2016.08.16
[로라드렉/G] 당신 혹은 죽음-상  (0) 2016.07.12
[로라드렉/G] 감상  (0) 2015.11.22
[로라드렉/G] 무제  (0) 2015.09.13
[로라드렉/G] 장미꽃 한 송이를 준비했네  (0) 2015.07.26
Posted by Bincan
, |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은 불안한 정서로 감상이란 이름 아래, 나는 또 아름아름 걷는다. 적막한 심상은 헤아릴 길이 없어 비어버린 곳에 나는 그렇게 어거지로 노래를 흥얼거렸다. 자, 모두 다 잊어버리자.



 나는 이런 내가 물린다. 추억에 취해 단 것을 잔뜩 집어먹은 성인처럼, 일주일 내내 먹어치워야했던 첫 라자냐처럼, 그리고 끈질기게 뛰어대는 이 고동소리처럼 나는 내가 물린다. 그런데 너는 왜 이리 지겹지도 않은지.



 너는 참 음식을 정갈히 먹는다. 의자에 기대 묶여 자세교정을 받았던 꼬마시절이 생각날 정도로 바른 자세로, 흐트러짐 없이.



 스프에 빵을 찍어 입에 넣다가 힐끗 그 반듯한 얼굴을 훔쳐보았다. 손가락에 스프가 묻고 입가에도 묻었다. 스프가 묻은 손가락을 쪽쪽 빨았다. 너는 이쪽을 쳐다보지도 않는다.



 더운 여름. 영국의 습기는 마르지 않는 땅 위에 이글거리는 태양의 열기를 꽁꽁 묶어놓으려들었다. 단추를 두세 개 풀고 손부채질에 늘어져있으려니 물 한 잔과 그늘막의 네가 보였다. 잘 여며진 옷, 긴 소매, 긴 바지. 그런데도 그곳에는 희미한 바람기가 느껴져 답답한 줄을 몰랐다.



 제일이였던 것은 언제나 비상 후의 먼 거리에서의 감상으로 네 뜀박질은 순간의 환상이자 열기이며 꿈결같아 더 그랬다. 볼 수 없는 표정의 너는 늘 부드럽고 강한 미소를 걸고 먹잇감을 찾아 눈을 빛냈다. 강하고 아름답다고.



 그래, 그 때 그랬다.



 감상은 끈질겼다. 거리를 조절하는 것이 익숙치않아 어지간해선 흩어지지 않았던 집중력이 별 다른 이유없이도 비명을 질렀다. 제 집처럼 드나드는 것은 네 손에 쥐어준 구리열쇠. 걸어다니는 것은 갑주의 신발 소리. 창이 공중을 가르며 웅웅 울고 너는 몇마디 말도 없이 내 공간을 지배하려 들었다.


 너는 이기적이다.


 연필 끝이 아작이 났다. 칠의 맛과 나무의 텁텁한 조각이 혀끝에 맴을 돌았다. 흑연, 그 매끄러운 맛.


 나는 글쓰기를 하듯 매끄럽게,



 "좋아해."



 라고 기어코 운을 뗐다.



 머릿속에서 돌려보았던 몇 번의 시뮬레이션보다 다정하게 말이 흐르자 나는 조금 기분이 좋아져 슬며시 웃고야말았다. 단단히 굳은 네 눈의 각막에 여과없이 투과되고 있을 그 꼴사나울 얼굴이 네 푸른 바다에 가득 담기지 못하게. 깜박깜박. 눈꺼풀은 느리게 움직였다. 미끄러져 내린다.



 "그런가."



 오롯이 들은 대꾸에 나는 그만 미끄러져내린다.

이것으로 되었다. 나는 네게 이정도이면, 그리고 너도 내게 이정도이면 그만이다. 다행스럽게도. 안도의 한숨이 흘렀다. 그것이면 되었다. 어쭙잖은 미소로.



 매끄러운 것은 매끄럽게 길을 타고 나아갔다. 그런 것이 된 애정의 감상은 더이상 보고 싶지 않았으므로 잘된 일이라고 나는 여겼다.


 변화는 달갑지 않았다. 아무 것도 바뀌지 않은 듯 생떼를 쓸 때면 더 그랬다. 덤덤했던 것들이 얼마지나지 않아 살갗이라도 찢어발겨놓은양 로라스는 어울리지 않는 짓들을 하기 시작했다. 늘 같은 시간 같은 장소 같은 사람과 있는 주제에 대화의 흐름과 분위기가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만 조금씩 바뀌었다. 멍청하게도 그는 이것이 나에게 통할 것이라고 확신하는 듯했다. 여자 이야기, 신과 술과 그리고 여자 이야기. 심장이 쿵쿵 뛰어 뒷덜미가 잡아채어지는 듯했다. 머저리 새끼.


 나는 조금도 미안하지 않았다. 다만 그가 너무 역해서 견딜 수가 없을 따름이었다. 목덜미를 물어뜯어 입을 닫아버리자. 몇 번이나 생각했다.



 결국 나는 축객령을 내렸다. 당황하지도 않고 너는 그 붉은 빛이 아름아름한 노란 열쇠를 늘 네가 앉아있던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쇠가 나무를 때리는 달그닥소리에 손끝이 살짝 놀라는 것이 보였다.  손은 다시금 열쇠를 쥐었다. 그리고 다시 내려놓았다.


 "내가 그렇게 싫으냐."


 신소리를 했다. 내 모든 것이 우스갯소리처럼 들려 네가 '그래, 역겨워서 참을 수가 없어.' 따위를 중얼거리거나, 소리치고 얼른 문을 쾅 닫아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랬다. 그것이 지금 나의 유일한 소망이자 바람이었다. 주먹이 말렸다 펴졌다, 어설프게도 너는 어쩔줄 몰라했다. 그것을 그렇게 불러도 좋다면.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거야."


 바보같이 입술이 떨리지 않게 기를 썼다.


 "잠시만,"


 잠시만 널 사랑할게. 매듭을 짓지 못하고 입술을 으깨어 물었다. 서툴러서는 모두가 다친다. 나는.


 성큼성큼 긴 다리가 내걸었다. 바짝 붙는 얼굴을 나는 붉어져있을 얼굴로 밀어내었다. 수치와 모멸. 가득 담긴 동정이 일렁거려 그 끝을 성둥 잘라내 뒤로 하고 나는 결국 자리를 뛰쳐나왔다.



 걷는다.



 나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Posted by Bincan
, |
뜨겁게 사랑하고 불꽃처럼 타오른 뒤엔 비가 내리고 다시금 새싹이 오르겠지.


헐떡대는 숨소리는 먼저 가라앉은 열기가 마치 꼭 순간의 안개인듯 굴었다. 굳이 시시비비를 가리자면 고약한 영국의 안개마저 견디지 못할 정도로 선선한 바람에 갓 맺힌 땀방울조차 눈 깜박할 사이 식어버렸으므로 이것은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후희의 킁킁댐과 곧이어 버스럭거리며 시트를 쓸어댈 조그맣고 사소한 익숙함이 흐릿한 불빛아래 찾아오지 않았다. 감각이 죽어가며 시간이 멎어버리고 있었다. 꿀꺽, 드렉슬러의 침넘기는 소리를 안타깝게도 둘 모두 듣고 말았다. 로라스는 몸을 일으켜 세우지 않았다. 가슴팍이 들썩였다.


드렉슬러는 혀로 제 치열을 더듬었다. 치아 뒤와 천장. 혀가 입 안에서 뒹굴었다. 이쯤, 그리고 이쯤. 찌릿거리던 감촉은 아무리 뒤져도 찾을 수가 없었다. 제 옆에 누워 마찬가지로 천장만 보고 있을 나무토막을 떠올렸다. 효과가 있었다.


이번엔 입술을 치아로 물어 우물거렸다. 도톰한 살은 씹어댄 탓에 부어올라 치아가 닿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곧 터질듯이 매끈한 안쪽에 혀끝을 굴렸다.


이쯤, 이쯤. 계속 더듬었다. 뺨과 목, 가슴, 배의 굴곡과 무릎을 굽혀 허벅지까지. 시트가 버스럭거리는 소리는 그제야 났다.


제가 제 몸을 더듬거릴동안 로라스는 몸을 씻고 화장수를 발라 제 살정돈까지 마쳤다. 비 냄새. 가라앉은 영국의 새벽, 아침. 회색 도시, 그 웅장함과 과거. 과거. 찬란히 아름다웠던. 드렉슬러는 그 과거가 생각보다 변변치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과거는 시간을 뒤집어쓰고 무엇이든 아름다워지지 않는가. 그리고 결국 빛이 바래고 자연스럽게 잊혀진다. 무엇이든.


뜨거웠다. 무엇보다 뜨거워서 저를 내주고 허락하고 사랑했다. 했었다.


등을 돌아누웠다. 시트를 어깨까지 얹고 눈을 감았다. 일정한 무게의 한결같은 걸음소리, 물잔, 겉옷, 방 문고리. 문고리.


"가지마."


문이 닫힐 때가 되어서야 소리가 희미하게 새었다.


문이 닫혔다.


잠시의 침묵과 놀라운 발소리가 울렸다. 떨어지는 겉옷과 끌어안기는 어깨와 뜨거운 손과 목덜미를 더듬는 입술이 순식간에 위로 쏟아졌다.


드렉슬러는 뛰어든 로라스를 깊이 안았다. 사랑해. 사랑해. 귓가에 끊임없이 속삭였다. 내가 더. 더 많이. 소리가 속닥거려 귓속이 간지러웠다. 사랑하고 있었다.
Posted by Bincan
, |


(쌍창 전력으로 썼던 건데 장마를 장미로 잘못보고 쓰는 바람에 마감을 못맞춘 글 ;~;)

집에는 늘 자네가 있었어. 내가 섬세한 편이 못되니 서툴게나마 집을 돌봐주곤 했지. 바다 건너 타지에서 서로 돕고 산다기에는 우리는 너무 친밀한 관계였네. 이건 자네도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해.


두 개였던 집이 비싼 물가로 하나가 되고 같이 식사를 하고 출근을 하고 거실의 소파에 나란히 앉거나 커피테이블에 앉아 오후의 차를 마시고 부스럭대는 신문소리나 서류조각이 내는 조금은 날카로운 소리가 익숙해지고 나서는 머지 않아 우리는 침대마저 같이 쓰게 됐어.


오늘 같은 날이야 언제라도 계속 될 거라고 난 늘 생각했네. 하루하루 다행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그런 거짓말을 했지. 사실 거짓말이라기엔 이상했어. 자네는 정말 늘 집에 있었고 늘 내 곁에 있으면서도 항상 비슷하고도 놀라운 하루를 보내는 것 같았거든.


다만 나는 종종 불안해지곤 했네. 가끔씩 자네는 지루함에 잠겨 질식할 것 같은 표정을 짓곤 하니까. 사실은 최근에 들어서야 내가 불안해한다는 걸 알았어. 그전엔 그저…기분이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뿐이었고.


그런데 언젠가 자네가 또 지루함에 잠겨있다 나를 본 거야. 자네를 바라보고있던 날 말일세. 자네는 웃었어. 웃음은 굉장히 부드러웠고 햇살처럼 푸스스 공중에 바스라졌지. 나는 그제야 안심했어. 그래서 알았지. 내가 불안해하고 있다는 것 말일세.


동시에 알았어. 빛이란 거 말일세. 잡아둘 수가 없는 것 아닌가? 전구라던지 빛나는 도구들이 있지만 막을 수는 있어도 가둬놓지는 못해. 그것들은 언제나 뻗어나가고야 마니까. 그것들이야 원체가 그런 것들 아닌가.


나도 그저 웃고 말았어. 낮이 오고, 밤이 오고, 등 뒤의 바스락 소리나 시트를 타고 오르는 온도라던지 자네의 손끝이나 샤워 후의 부드러운 입술 같은 것들에 말일세. 나는 그것들에 그저 웃고 말았어. 그리고 오늘이 되었네.


저녁식사 후에, 원래대로라면 이제 곧 잠자리에 들어야하지만 나는 오늘이 되었네. 늘 그렇듯이 말이야.


오늘 아침에 말일세. 눈을 떴는데 자네가 눈 앞에 있는 거야. 매일 기껏해야 뒷통수나 아니면 벽이나 마주보고 일어나곤 했거든. 그런데 그 얼굴이 묘하게 또 정면이 아닌걸세. 나는 나도 모르게 조심스레 몸을 일으키고 있었어. 그런데도 순간 시트가 끌리고 스프링이 삐걱거린거야. 매트리스를 바꿔버리겠다고 순간 결심까지 했는데 다행스럽게도 자네는 일어나질 않더군. 세상모르고 곤히 잠든 얼굴에는 그 어떤 지루함도 불안도 느껴지질 않았어. 그때 나는 조금 행복한 기분이었네.


하루종일 기분이 좋더군 출근길의 미적지근하고 습한 바람이나 흐린 하늘이나 그 아래 빛바랜 회색빛의 건물이나 질기고 식어빠진 베이글도 너무 볶아 쓰기만한 커피도 아무것도 나를 흔들어 놓을 수 없었어. 다만 지금 이시간까지 하루를 보내면서 몇 번이고 나를 괴롭혔던 것은 아주 사소할 지도 모르는 문장과 단어들이었네. 그래서 나는 오늘을 살기로 방금 이 식탁에서 결정한 거야.


자네는 어때? 나와 결혼해 주겠나?

'Faith&Spear > 단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라드렉/G] 감상  (0) 2015.11.22
[로라드렉/G] 무제  (0) 2015.09.13
[로라드렉/G] Love me tender  (0) 2015.07.08
[로라드렉/G] 짝사랑 (달성표 보상)  (0) 2015.07.08
[로라ts드렉] 카르멘  (0) 2015.05.29
Posted by Bincan
, |
꼭 일년 전이었던 것 같다. 시에스타 대신 영국의 티타임동안 회사 근처 카페에 앉아 이렇게 함께 시간을 보낸 것이. 그렇게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서로의 눈빛 만으로 사정을 알고, 이야기를 듣고, 일어나고 머물러야할 순간을 깨닫게 된 것이.


어느 날, 이 날은 조금 달랐다. 함께 있는 시간이 오래된 쿠션의 먼지냄새를 맡은 듯 불편했다. 익숙하고 변하지 않은 것에서 느끼는 이질감은 꽤나 명쾌할 정도로 분명해서 드렉슬러는 로라스 역시 이 자리를 불편해하는 것을 알았다. 일어날까. 평소보다 조금 이르게 드렉슬러는 몸을 일으켰다. 무엇인가 삐그덕, 아귀가 맞지 않는 톱니처럼 어긋나는 것만 같았다.


먼저 앞장서 걷는 로라스의 등 뒤를 드렉슬러는 고요히 바라보았다. 카페 밖 유리창에 반대방향으로 멀어지는 두 사람의 그림자가 비춰지자 무언가 정말로 끝난 느낌이 들었다.


로라스는 뒤를 돌지 않았다.


변한 것은 없었다. 서류와 야근과 외근과 늦은 저녁, 인사. 가끔은 시선이 맞닿기도 했으나 다른 동료들과도 흔히 있는 일로 특별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갖지 않게 된 티타임도 그립다거나 하질 않아서 잠시간 시간이 지나니 생각조차 나지 않게 되어버렸다.


밤참인 빵봉지를 안고 뚜벅뚜벅 걷다가 드렉슬러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가게의 커다란 유리에 비친 제 모습을 보았다. 넓은 공간이 허한 느낌이었다. 늘 이 자리였는데.


문의 종소리가 맑았다. 목이 말랐다. 물 한 잔과 루이보스, 프레첼을 주문하곤 멍청하니 창문 건너를 넘겨보았다. 낡아빠진 취향의 가게 주인은 계절이나 날씨에 상관 없이 제가 아는 것만 벌써 이년째 같은 레파토리의 노래를 매일 같이 틀어대었다.


"지겹지도 않나."


별 뜻 없이 샌 소리가 어지간히 싱거웠다. 신문이나 가쉽지등으로 테이블을 잠시간 어지럽히면 약간은 한심하다는듯한 눈으로 제자리를 만들던 손이 잠시간 조금 그리워졌다. 두기가 어색해진 손으로 테이블 위를 매만지다보니 주문한 차와 빈 속에 집어넣을 프레첼이 모락모락 김을 내며 자리를 잡았다. 묘하게 입맛이 없었다.


창 밖으로 사람구경을 했다. 바삐 걸어가는 양복쟁이, 허리 굽은 할머니, 아마도 저녁식사에 늦지 않기위해 달려가고 있을 아이들에 뜻없이 시선을 얹었다. 끝의 끝에서 놓아버린 시야에 걸린 것은 다정한 연인으로 무언가 서로에게 조근조근 속닥거리고 있었다.



재밌는 영화였지.


여주인공이 정말 아름다웠어.


그녀는 스크린 속의 환상일 뿐이야.


그녀를 사랑하게 되는 것이 죄는 아닐거야.


다만 소중한 것을 잃게 되겠지.



"내 사랑."


그네들의 대화를 머릿속으로 그리다 저도 모르게 말이 튀었다. 드렉슬러는 제풀에 제가 깜짝 놀라 황급히 입술 위를 손 끝으로 누른채로 고개를 숙였다.


순간 등 뒤로 무겁고 사부작 거리는 것이 닿았다. 둥둥둥. 귓전의 북소리.


"불렀는가."

'Faith&Spear > 단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라드렉/G] 무제  (0) 2015.09.13
[로라드렉/G] 장미꽃 한 송이를 준비했네  (0) 2015.07.26
[로라드렉/G] 짝사랑 (달성표 보상)  (0) 2015.07.08
[로라ts드렉] 카르멘  (0) 2015.05.29
[로라드렉/G] 꿈  (0) 2015.05.29
Posted by Bincan
, |
수삐(@asbbi_ss_) 달성표하느라 고생했어! 그러니까 연성 더 해와!:D

나의 사랑하는 별.
내 소중한 창.
언제고 그랬듯이.


쏟아질 듯한 밤하늘 아래 자리를 잡으면 어느하나 대단하지 않은 것이 없는 어름어름한 빛들이 얼룩덜룩한 검은 융단 위에 모여 딱 눈이 부시지 않을만큼만 밝아 좋았다. 그 색색의 빛들이 자리를 잡지 못하여 항상 같은 곳에 있지않음으로 그것을 보고있는 것만으로 가슴이 벅차올라 좋았다. 머릿속에 그려지는 그 반짝임이 사그라들지 않아 좋았다. 글과 그림으로 빼곡히 차있는 책보다는 길을 걷다 올려다보는 밤하늘이 더욱 두근거리듯이 나에게는 네가 그랬다.


솟아오를 때의 희열에 붉게 타오르는 열기가 좋았고 그것이 결국 땅으로 꼬꾸라져 큰 굉음을 내고나면 무구가 그 열기를 이기지못할까 빠지지않고 내게 찾아오는 그 당연스러운 규칙이 좋았다.


나는 네 앞에서 몇 번이고 창에대한 나의 애정과 별에대한 나의 사랑을 속삭였다.


나의 사랑하는 별.
나의 소중한 창.


정작 내게 가장 소중했던 것은.


빛과 열과 폭발이 있었다. 소리가 사라지고 이명이 자리를 채웠다. 뻐끔뻐끔. 그와중에 달려오는 네가 있어 좋았다. 자리를 지켜야지. 정신이 없는 중에 그런 생각을 하면서.


제 규칙 하나만큼은 철저한 놈이었는데 당황으로 잊어버렸는지 투구를 벗으려하기에 안 돼. 안 돼. 몇마디 벙긋거렸다. 만류할 팔이 없었고 고개가 들리지 않아 볼 수 없었으나 신체의 대부분이 고온고열로 산화하여 잿더미가 되었으니 아마 보통사람이었다면 이미 죽었을 것이란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투구에서 손을 내리지 못하고 너는.


아아-


외마디로 입을 열었을 것이다. 말을 잇지못하는 것은 나였어도 그랬을 것이다.


아아-


제 대장장이가 땅에 누워 죽어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아아-


네 입가가 그렇게 일그러지는 것은 지금까지 본적이 없는데.


나의 사랑하는.
내 소중한.


그래도 난 여전히 외사랑보다야 짝사랑이 나아서. 까무룩까무룩 눈이 뒤집히자 그제야 내 귀에도 안 돼. 안 돼. 소리가 들렸다.


그래, 그렇게 비가 왔던 것 같은데.

'Faith&Spear > 단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라드렉/G] 장미꽃 한 송이를 준비했네  (0) 2015.07.26
[로라드렉/G] Love me tender  (0) 2015.07.08
[로라ts드렉] 카르멘  (0) 2015.05.29
[로라드렉/G] 꿈  (0) 2015.05.29
[로라드렉/G] 새  (0) 2015.05.27
Posted by Bincan
, |

[해쉬태그/원작자 아수삐(@asbbi_ss_)]

 

호세를 유혹하는 카르멘의 하바네라. 몸을 태워 부르는 듯한 노랫소리에, 홀리는 듯 마음이 어지러워 자꾸만 피아노 위에서 손가락이 늘어졌다. 로라스는 결국 중반까지도 연주하지 못한 채 손을 내렸다. 반주 없이도 극은 계속 되고 있었다. 여전히 그녀는 뜨거운 가슴을 가진 카르멘이었다. 그렇다면 그녀에게 반한 나는 호세인가.

 

해가 붉었다. 어두운 밤이 되기 전 마지막 불꽃이 꼬리를 남기며 사라질 때, 드렉슬러는 절정을 향해 타오르고 있었다. 빛무리 속에서 기다란 손가락이 허공을 쥐었고 땋아내린 머리카락이 춤을 췄다. 즐거운 듯 미소를 걸어 놓은 입가와 하얀 치아가 유난히 눈에 들었다. 그녀는 분명 빛나고 있었다.

 

이곳에서 수 없이 불렀던 노래들을 로라스는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다. 피아노 한 대와 낡은 소파, 보면대 하나 겨우 서는 이 곳에서 처음 들은 그녀의 노래는 야생화의 강한 향처럼 머리가 어지러웠다. 길들여지지 않은 목소리가 가슴을 파고 들었고 이것에서 도망칠 수 없을 것이란 확신이 든 순간 로라스는 드렉슬러에게 청혼하는 것 외엔 방법이 없었다. 그녀를 붙잡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므로.

 

절정에 달아 젖혀진 아름다운 목선. 자유로운 집시여인은 그녀를 위한 배역이었다. 가느다란 허리를 강조하는 밑단이 풍성한 드레스를 입고 그녀는 가슴을 부풀려 제 소리를 낼 것이다. 귀가 있다면 누구나 그녀가 얼마나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보겠지. 그 때가 되면 저는 그 중 하나가 될 것이고.

 

빛나는 사람. 빛나는 내 사랑. 때가 되면 더 큰 무대를 위해 그녀는 날아가버릴 것이다.

 

-그날이 오면, 나는 어떻게 해야하나.

 

자네에겐 이런 비좁은 방보단 많은 이가 우러러보는 무대가 어울려. 그녀를 꾄 것도, 길을 열어준 것도 자신이었다. 그녀는 재능이 있었고 이것은 그것에 따른 당연한 수순이다.

 

보석을 다듬듯이 드렉슬러가 자신의 재능을 닦아 낼 수 있도록 그녀와 함께 로라스는 쉴 새 없이 피아노 위에서 손을 놀렸다. 점점 더 깊고 풍부해지는 소리에 모든 것이 잘 된 일이라고 애써 웃음지어 보았다. 하지만 도저히 쓸쓸한 기분만은 감출 수가 없었다.

 

외마디 비명이 들리자 정신이 들었다. 로라스는 품안에 온기가 들어찰 때가 되어서야 자신이 드렉슬러를 껴안았다는 것을 알았다.

 

"너 지금 뭐하냐! 가장 중요한 대목인데!"

 

당황은 잠시, 서글퍼지는 기분에 감싸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가지말아, 렉스."

 

"이게 밥을 잘못 먹었나...가긴 어딜 가!"

 

단단히 끌어안겨 몸을 뒤트는 것도 여의치가 않았다. 황당하기 그지 없는 상황에 목을 뒤로 주욱 빼자 그제야 팔에 힘이 풀린 것이 느껴진다. 흥이 끊긴 것을 따지려 고개를 들어올리니 힘 없이 내려다보는 것에 맥이 풀렸다.

 

"왜. 또 뭐."

 

퉁명스런 목소리에 로라스는 서글프게 웃었다.

 

"...옳지 못한 생각이란 걸 알고는 있지만, 노래를 부르는 자네를 보면, 두려워. 자네가 날 버리고 한줄기 노래가 되어버릴까봐. 자네가 그리도 노래하던 그 별이 될까봐. 나는..."

 

떨리는 목소리를 갈무리하여 터뜨리듯 뱉으려던 것이 입술에 막혔다. 첫 입맞춤. 다급히 뺨을 감싸쥐어 입을 맞춘 것은 드렉슬러였다. 가볍게 맞닿는 키스. 처음으로 제 사랑을 확인 받은 입맞춤으로 뺨에 열이 올랐다. 십년이 넘는 세월동안 이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마음이 변하지 않아서라고 여겼는데. 청혼을 받아들이던 때조차 제 길을 방해말라던 이가 아니었는가. 그런데.

 

"뭐야. 싫어?"

 

파혼할래? 부끄러움으로 붉어진 두 귀를 하고 뻔뻔하게 파혼을 입에 올리는 드렉슬러 때문에 로라스는 고개를 거세게 저었다. 말도 안 돼.

 

"표정이 마음에 안들어."

 

"나는, 나는 그저 자네가..."

 

의무감 때문에 내 청혼을 받아들인줄 알았어.

 

"야, 이 병신아!"

 

쨍쨍하니 큰 소리가 벼락처럼 떨어졌다. 날 그런 이유로 약혼 하는 그렇고 그런 여자로 봤단 말이야? 등신 새끼! 등신 새끼! 길길이 날뛰는 드렉슬러로인해 로라스는 주춤 한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그걸 꼭 말로 해야 알아? 당연히...!"

 

드렉슬러는 주저로 시선을 피하다 결국엔 입술을 우물거렸다. 좋아하니까 했지. 당황이 가득 찼던 얼굴이 헤벌죽 풀어지는 것이 눈에 보였다.

 

"누굴 누구 마음대로 보내. 이 머저리 같은 놈."

 

눈썹이 잔뜩 성이나 치켜올라간다.

 

"보내도 안 가! 반주나 마저 넣어."

 

로라스는 피아노 위에 다시금 손을 얹었다.

'Faith&Spear > 단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라드렉/G] Love me tender  (0) 2015.07.08
[로라드렉/G] 짝사랑 (달성표 보상)  (0) 2015.07.08
[로라드렉/G] 꿈  (0) 2015.05.29
[로라드렉/G] 새  (0) 2015.05.27
[로라드렉/G] 문장의 바다  (0) 2015.05.27
Posted by Bincan
, |

익숙한 배경이 눈에 들었다. 방, 내방. 익숙한 침대, 익숙한 의자, 익숙한 천장과 익숙한 러그의 감촉. 그리고 익숙한 남자.

 

보고 싶었어.

 

흰 셔츠에 검은 바지, 맨발 차림으로 남자는 익숙한 듯 방 이곳저곳을 거닐다가 자신이 침대 위에서 몸을 일으키면 어, 일어났어? 하고 인사를 했다.

 

여긴 내 방이야.

알고 있어. 보고싶었어, 알베르토.

 

여전히 남자는 제 할 말만 했다.

짧은 꿈. 묘한 아쉬움으로 입맛을 다시며 머리맡의 물을 찾았다. 목이 탔다.

 

이틀째,

 

왜 자꾸 나타나.

글쎄, 만나고 싶었어.

 

무언가 대꾸를 하려던 순간 잠에서 깨었다. 어찔한 현기증에 또 물로 목을 축였다.

 

사흘 째,

 

드렉슬러

한 번 더 네가 부르는 이름이 듣고 싶었어.

 

나흘 째,

 

오늘도 있는 건가.

너랑 있는 시간이 좋아.

 

닷새, 엿새, 이레, 여드레, 아흐레, 열흘…묘한 꿈으로 로라스는 자신이 점점 말라가고 있음을 느꼈다.

 

내 꿈에서 나가, 난 자네를 꿈 속에서 더 보고 싶지 않아.

 

맞춰오는 눈동자가 묘하게 반질거렸다. 아, 아니 난…당황으로 더듬거리며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드렉슬러는 처음으로 활짝 웃었다.

 

사랑해.

안녕.

 

멍청한 얼굴로 눈을 떴다. 안녕? 이별을 고한 것인지 그 이후로 더이상 꿈은 꾸지 않았으나, 안녕? 저는 마지막인사를 못했다. 이기적인 놈. 항상 이런 식이지. 자네는 항상 자기밖에 몰라. 조금 초조한 기분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꿈 속에서 그를 볼 순 없었다. 왜 찾아오지 않아. 드렉슬러. 눈을 감으며 늘 꿈 속 그가 했던 말을 되뇌었다. 사랑한다고 했던가. 그럴리가 없잖아. 자네가 그런 말을 했을리가 없어. 이유를 들어야겠어. 왜 이런 이야기를 한 건지. 여전히 꿈에 남자는 나오지 않았다. 익숙한 방은 정말 제 방이었고 항상 그것은 꿈이 아니었다.

 

'Faith&Spear > 단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라드렉/G] 짝사랑 (달성표 보상)  (0) 2015.07.08
[로라ts드렉] 카르멘  (0) 2015.05.29
[로라드렉/G] 새  (0) 2015.05.27
[로라드렉/G] 문장의 바다  (0) 2015.05.27
[로라드렉/G] Vacuum  (0) 2015.05.27
Posted by Bincan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