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라드렉] 차가운 물, 모자 그리고 깃털달린 펜
“적당히 좀 해.”
쇠꼬챙이에 찔린 손은 아직 열감이 있었다. 무언가를 만들면서 열중하다 보면 흔하게 생기는 상처를 다리오 드렉슬러는 이곳저곳에 이미 무수히 가지고 있었다. 데이고 찢어지고 가끔은 뚫리기도 한다. 상처가 흉 지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그런 손을 알베르토 로라스는 기어코 끌어다 소독을 하고 얼음을 대어 주물덕거리며 심각한 얼굴을 한다.
“자네는 좀 더 제 몸을 아낄 줄 알아야해.”
“잔소리쟁이.”
“그렇다면 자네를 끔찍하게 사랑하는 잔소리쟁이겠지.”
잔뜩 찌푸려진 미간의 골은 사라질 기미가 보이질 않아 드렉슬러는 늘상 다음에는 더 조심하겠다는 둥의 이야기를 했다. 대신 조금 느리게 한 발 양보한다. 화를 내는 로라스는 섹시하다. 그리고 드렉슬러는 그것을 로라스가 몰랐으면 했다. 그는 이미 너무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있었고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는 자신이 그 얼굴에 끌려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이 고독한 남자를 사랑하게 되는 이유에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좀 더 고상한 이유가 필요했다. 아름다움 외에도 이렇게 다정하고 강직한 사람을 어떤 이유로 사랑하면 좋은 걸까. 드렉슬러는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
손 안쪽 상처의 열감이 차가운 얼음주머니에 식으며 묘한 쾌감이 들었다. 대장간의 습기가 주머니 겉에 맺혀 팔목을 타고 주르륵 흘렀다. 드렉슬러는 그제야 제 몸에 열이 가득 차있다는 것을 알았다. 제 손을 식히기에 여념이 없는 남자의 정수리를 가만히 보다가 그 위에 입을 맞췄다.
“네가 내 사람이라는 게 믿기지가 않아.”
이에 로라스는 고개를 들어 답하듯 가볍게 입을 맞췄다.
“믿어주지 않으면 이젠 더는 방법이 없네.”
“내가 믿을 수 없다면?”
“그래도 사랑하겠지.”
달콤한 말을 하면서도 표정변화 하나가 없다. 둘의 사이는 오래되었다. 일상이 소곤거리고 이불깃이 사부작대는 나른한 날도, 피비린내 가득히 제 목숨을 걸고 쇳덩이가 부딪히는 전장에서 다시금의 약속 하나로 견뎌온 날도, 세는 일이 의미가 없을만큼 많이 지났다.
등 뒤에서 로라스를 급습한 적을 무리하게 랜스로 벽에 처박아 넣고 드렉슬러는 그대로 의식을 잃으며 뒤로 무너졌다. 무너진 돔의 아래에 누워있던 드렉슬러의 손을 기억한다. 부서진 갑옷과 푸른 새벽의 공기가 드렉슬러의 차가운 몸 위를 덮어 로라스는 흐트러진 옷매무새로 망가지듯 무릎을 꿇고 그의 배에 머리를 기대었다. 오래된 수로를 따라 번진 이끼 위에 가만히 누워 피투성이의 손을 끌어당겼다. 넓은 홀에 갑옷 절그덕거리는 소리가 울렸고 헤진 가죽강갑을 가만히 쓸어 제 뺨에 대었다.
“기다리겠다고 했었지.”
“무릎을 빌려주겠다고도 했어.”
“얼마나 무서웠는지 몰라. 내 삶에서 가장 길고 먹먹한 길이었지. 자네에게 가는 내내 왜 자네를 저택에 가둬놓고 멋대로 사랑하지 않았는지 후회하기도 했어.”
하지만 오르락내리락하는 드렉슬러의 배에 가만히 누워 로라스는 제 반지로 그를 구속하지 않은 것을 다행스럽게 여겼다. 그것이 자랑스러웠다. 드렉슬러는 강했고 그것은 그의 육체적인 것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는 제 보호 없이도, 홀로도 괜찮았다. 하지만 여지를 주었다. 그 부드러운 곳에, 그의 연약한 부분에 자신을 들여놓아도 좋다고 넌지시 준 암시가 있었다.
“사실, 도망갔을지도 몰라.”
“응, 알고 있네.”
“난 누군가 날 가둬놓는 건 지긋지긋 했거든.”
손의 상처는 조금만 손바닥을 펼치려해도 욱신거렸다.
“하지만 난 할 수 있다면 자네를 부드러운 천으로 묶어놓고 싶었어. 언제나 내 곁에 있도록 말이야.”
“넌 가끔 소름 돋는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더라.”
“농담 같은 게 아니니 말일세.”
“알고 있어.”
로라스는 드렉슬러의 다친 왼손에 연고를 마저 바르고 붕대를 감아 입을 맞췄다. 드렉슬러는 질린 얼굴을 했다.
“정말 징그러운 짓을 잘도 한단 말이야.”
“자네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기 때문이지.”
장난스럽게 맞춰오는 곧은 눈에 드렉슬러는 시선을 피해 왼손을 가만히 쥐었다.
“한동안 물 닿는 작업은 힘들겠네.”
중얼거리는 드렉슬러를 두고 로라스는 척척 걸어나가 의기양양하게 책상의 서랍들을 열었다.
“자! 다행이 여기 밀린 서류작업이 있네. 그러니 자네가 심심할 일은 없을 거야.”
서프라이즈 파티처럼 활짝 열린 책상의 서랍 속에는 터무니없이 많은 종잇장이 있었다. 로라스는 개운한 얼굴로 한켠에 쌓인 종이박스를 책상 근처로 나르기 시작했다.
“클랜 업무는 집에 가지고 오지 않기로 했잖아!”
사색이 되어 뒷걸음질치는 드렉슬러의 허리를 감아 로라스는 얼굴을 마주하고 방긋 웃었다.
“업무가 너무 많아 발명할 시간이 턱없이 부족한 다리오 드렉슬러가 삼일간 사라지는 것도 사실 예정된 일은 아니었지. 나는 자네가 회사 업무에 가담한 이후 책임감을 가지고 함께 일을 하고 있는 동료이기도 하네.”
로라스는 짐짓 엄한 얼굴을 했다. 드렉슬러는 그 얼굴이 우스워 견딜 수가 없는 나머지 속에서 울화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회사 말을 안 듣는 건 사실 네가 제일이잖아. 이제 와서 회사의 충직한 직원 흉내라도 낼 셈이야?”
“나는 언제 어디서든 나의 믿음에 걸맞게 행동하려고 노력할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걸 자네도 사실은 잘 알겠지.”
“알 게 뭐야! 집에서 잔업하기 생겼는데!”
“잔업이란 말은 사실 맞지않네. 이건 자네의 무단결근이 가져온 사단이니 쉬는 날이 바뀌었다고 생각하는 게 옳겠지.”
더 이상의 말싸움은 시간낭비일 뿐이라는 것을 같이 지내온 시간으로 드렉슬러는 잘 알고 있었다. 정론의 남자. 드렉슬러는 로라스를 만나기 전까지는 고집으로 누군가에게 져본 일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자신의 언변은 훌륭했고, 머리는 뛰어났으며, 원하는 마음은 강렬했다. 그래서 로라스와 언쟁을 할 때면 속이 뜨겁게 타는 듯 했다. 갑갑하고 답답한 외곬수의 남자는 설득이나 협상 같은 단어는 모르는 것 같이 굴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의 의견이 대부분 옳게 보이는 탓에 자신의 말들은 모두 변명이나 하잘것 없는 반항정도로 보이는 것이다.
“사실 어린애 같이 구는 건 넌데 말이야.”
드렉슬러는 한숨을 쉬었다.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군. 같이 하면 금방은 아니겠지만 끝은 낼 수 있을걸세. 자네가 얼마나 집중력이 좋은 사람인지는 내가 가장 잘 알지. 다행이도 다친 손 역시 왼손이 아닌가? 펜을 잡는데 불편함이 없으니 업무 속도에는 지장을 주지 않을걸세. 나는 작업이 끝날 때까지 곁에서 기껍게 도와주도록 하지.”
드렉슬러는 복잡한 기분이 되었다. 로라스는 드렉슬러를 어르고 달래지않았다. 타고나기를 사근하고 다정함과는 거리가 있었다. 대신에 해야하는 일을 짚어주고 옆에 있어주는 것으로 그 다정함을 대신해온다. 사실 그것이 로라스의 다정함일 것이다.
“응, 나도 사랑해.”
그 말에 로라스는 입술이 간질거렸다. 다리오 드렉슬러는 독립적인 사람이다. 혼자서도 아무런 문제 없이 외로움따위는 타지않고 망망대해를 헤쳐 미지의 대륙에 도달할 그런 부류의 사람이다. 스스로의 일은 스스로가 결정하고 주변의 시선은 신경쓰지않는다. 자신이 옳은지 그른지는 중요하지 않아서 그의 행동은 좀체 예측할 수가 없다. 그래서 세상은 그를 괴짜로 부르고 자신은 그의 독립성에 매료된다. 당당하게 빛나는 나의 별. 그 별이 제게 반짝여줄 때의 먹먹한 가슴을 가끔은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는 기분이 들었다.
“사람 얼굴이 잔뜩 달린 서류는 지긋지긋해.”
볕드는 식당의 테이블로 자리를 옮겨 시작한 작업은 아직 끝이 보이지 않았다. 드렉슬러는 리스트 업이 끝난 서류 뭉치를 머리 높이 들어올려 등 뒤로 집어 던져버렸다. 30페이지정도 되는 종이 뭉치가 팔랑거리며 떨어지는 소리에 스트레스가 조금 풀리는 것도 같았다. 로라스는 작성중이던 서류에서 잠시 시선만을 들어올려 기지개를 펴는 드렉슬러를 힐끗보았다. 3일간의 결근은 사실 의도된 바는 아닐 것이다. 어쩌다보니 화장실 가는 것도 잊은채 책상에서 밤낮이 바뀌는 것도 몰랐겠지.
높고 좁은 영국식 집은, 특히 런던에서는 방음이 제대로 되질 않아 드렉슬러는 창문 하나 없는 지하에 작업장을 만들었다. 같은 능력을 가졌음에도 사실 전장에서는 합이 잘 맞지 않아 외근이 다른 경우가 많다보니 생활패턴이 잡혀있는 로라스가 집에 없는 동안 가끔 그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무언가에 열중하기 쉬웠다.
“클랜 업무가 자네에게 배당 됐을 때 홀든 경의 얼굴은 꽤 우스웠지. 어울리는 일은 아니야. 책상과 자네의 그림이 이상하지는 않지만.”
종류가 다르지. 드렉슬러는 괜히 엄지와 검지를 문질러 펜을 빙글빙글 돌렸다. 펜이 돌아가며 끝에 달린 깃털이 휙휙 돌아갔다. 아, 이렇게 일이 착착 돌아가서 눈 앞의 서류가 전부 증발했으면 좋겠다. 다음 더미의 서류를 또 한뭉치 집었다.
“회사는 이상해. 비효율적이고 비이성적인 업무를 아무렇지도 않게 결정한다니까. 포스터 보고 나는 기절하는 줄 알았어.”
“나는 제법 잘 나온 포스터라고 생각했는데.”
“잘 팔리겠지, 내가 워낙 매력적이니까.”
로라스의 손에서 사각거리던 펜이 뚝 멎었다. 펜이 멎은 자리에 잉크가 천천히 배어나왔다.
“멋대로 광장에 마네킹처럼 세워놓고 말이야. 하루종일 구둣발로 서있다 집에 와서 신발을 벗으면 발냄새가 고약하다고.”
“...일이니까.”
누구에게 하는 지 모를 말이 로라스 입 사이에서 흐르듯 나왔다. 드렉슬러는 의식적으로 눈을 깜박깜박 두 번 감았다. 로라스는 가끔 이렇게 귀여울 때가 있다. 말간 아이가 아닌데도 빤히 속이 보였다. 장난을 조금 칠까. 드렉슬러는 턱을 괴었다.
“기왕하는 거 광대모자라도 씌워서 화끈하게 벗겨놓지, 왜.”
툴툴대듯 미끼를 던졌다. 시시각각 로라스의 얼굴에 그림자가 지는 모습을 보는 것이 즐거웠다. 로라스는 짐짓 아무렇지 않는 척 컵을 들어 물을 마셨다.
“멘트도 좀 더 자극적인걸로 바꾸고. 이런 미남을 데려다 군부대 모집 카피로 교묘하게 가릴게 아니라, 뭐가 좋을까. 섹시 가이 상시 대기?”
드렉슬러는 로라스를 살펴보았다. 아마도, 예측일 뿐이지만 속이 뒤집히는 기분일 것이다. 로라스는 이런 류의 농담을 좋아하지 않았다. 드렉슬러가 이 세상 모든 걸 비꼬고 비아냥거리더라도 눈 하나 꿈쩍하지않고 따박따박 따져 들 사람이지만 그게 드렉슬러에 관한 것이라면 이야기가 조금 달랐다. 바짝 마른 입이 달싹거리고 정리되지 않는 단어가 입 안에 뱅뱅 맴돌았다. 의심할 바 없이 짙은 집착을 입 밖에 내는 것은 로라스에게 껄끄러움을 넘어 두려운 행위였고 강렬하고 거세게 타오르는 욕망이었다. 삼켜진 말이 한숨으로 터졌다.
“저열한 단어 사용은 삼가게.”
한 번의 한 숨으로 로라스는 말끔하게 단정한 모습을 되찾았다. 펜 끝이 빙빙 돌았다. 톡톡, 종이 위에 점을 찍고 드렉슬러는 가만히 고개를 기울였다.
“보고 싶지 않아?”
의문이 담긴 얼굴이 눈 안에 가득 찼다. 드렉슬러는 부러 윗치아를 혀로 살짝 쓸어 가볍기 그지없는 표정을 했다. 로라스는 반쯤 감긴 제 눈 위에 입을 맞추는 걸 좋아했다. 졸음을 못이겨 눈을 끔벅대면 자신을 푸근한 곰인형 마냥 그러 안고 쪽쪽거리고는 했다. 그러니, 아마도, 예상컨데 로라스는 이 얼굴에 굉장히 화가 날 것이다. 그런 자신감이 있었다. 로라스의 입매가 단단히 굳는다.
종종 드렉슬러는 순전히 재미로 자신의 인내심을 시험했다. 호기심 많고 실험하기 좋아하는 사람이니까라고 이해를 하면서도 속이 끓었다. 경험을 통해 배운 것은 이런 경우 말미를 남겨주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의미없는 짓은 그만두게.”
“만날 아무 것도 못하게 하네. 드렉슬러, 이것은 안되네. 저것은 안되네. 그것은 그만두게. 자네는 대체 뭐가 문젠가.”
드렉슬러는 엄한 얼굴을 하고 고장난 로봇같이 움직이며 과장된 목소리를 내었다. 명백한 도발에 로라스는 미간을 문지르며 “다리오.”하고 드렉슬러의 이름을 불렀다.
“서둘러 서류작업 먼저 끝내도록 하지.”
어렵게 돌려놓은 화제에 드렉슬러는 전혀 맞장구쳐줄 의사가 없었다. 서류는 지겨웠고 며칠이나 갇혀있던 집안 공기는 텁텁했다. 이 집안에서 유일하게 생동적이고 재밌는 일이라고는 눈 앞의 남자가 스스로 얼마나 참을 수 있는지 싸움하는 것을 관찰하는 것 뿐이었다.
드렉슬러는 로라스의 참을성에게 조금더 과감한 싸움을 걸기로 했다. 손끝에서 돌아가던 펜을 마법지팡이처럼 가볍게 쥐고 팔을 뻗어 끝의 깃털로 로라스의 입술을 간질였다.
“난 다른 걸 먼저 하고 싶은데.”
혈관이 툭툭 터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로라스는 이를 한 번 꽉 물고 드렉슬러를 원망스럽게 노려보았다.
“자네는 가끔 정말 미워.”
크하하학. 박장대소가 터졌다. 드렉슬러는 책상을 탕탕 내리치더니 눈꼬리에 눈물까지 달아가며 숨이 넘어가게 웃었다.
“서류 작업이 너무 지겨워서 그랬어. 용서해줘.”
드렉슬러는 작업을 멈추고 책상 위에 얌전히 올려져 있는 로라스의 두 손을 그러쥐었다.
“알고 있어. 그러니 서둘러서 끝내야지.”
로라스는 답하듯 그 위로 이마를 기대었다. 잠시간의 조용한 시간이 평화로웠다.
“그런데 정말 안보고 싶어?”
“자네 정말...!”
찰나의 평화를 깨고 로라스가 벌떡 일어났다. 손깍지를 껴 뒷목을 기대고 올려다보는 파란 눈은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너만 보면 되잖아.”
정말 알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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