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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두려운가?"

 행위와 제 마음과 그 후의 모든 것에. 질문에 드렉슬러는 웃었다. 

 "넌 네 두뇌를 얼마나 신뢰하지?"

 긴 손가락이 로라스의 뺨을 두드리며 뛰어놀았다. 로라스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시선을 견디며 입술을 물었다. 손가락은 이제 끝을 세워 귓바퀴를 따라 목덜미로 흘러내렸다. 소름이 끼치자 앓는 소리가 났다.

 "나는 내 기억력을 꽤 믿는 편이야. 제 기능을 넘어서 일종의 축복 수준이지. 하지만 그곳이 출근 길의 도로라면. 글쎄."

 손바닥은 가슴팍을 따라 옷 속으로 기어들어가기 시작했다. 로라스는 드렉슬러의 손목을 낚아채어 당겼다. 숨이 느껴질 정도의 거리에서조차 드렉슬러는 눈을 피하지않았다.

 "엑스터시. 이건 두뇌 내에서 일어나는 화학작용이야. Boom! 그래서 너는 그 순간을 얼마나 객관적으로 기억할 수 있지?"

 드렉슬러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허리를 들어올렸다.

 "절대 자신 없다거나 자신의 능력밖이란 이야기는 안하는군."

 "그게 사실이거든."

 "망설이고있나?"

 "조금은"

 "학자라는 건 좀 더 도발적이고 실험적인줄 알았는데."

 "목숨이 걸려있다면 확신이 있거나, 죽을만큼 궁금하거나."

 "그래서 나는?"

 "선택의 기회."

 "이제 와서 비겁하군."

 "명석한 거지."

 "그래서 당신을 사랑하게 됐나봐."

 드렉슬러는 숨을 크게 들이쉬어 가슴을 부풀렸다. 그는 조금은 다시 로라스와 키스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고 곧 이어질 일련의 일들이 꽤 기대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내뱉는 숨에는 잔떨림이 있었다.


 "오늘, 저녁 식사를 같이 할까? 우린 시간이 없으니까 말이야. 이미 보름이 넘게 지났고 28일 째의 너는 날 어떻게든 식탁 위에 올려놓으려 들겠지. 물론 난 그 전에 널 죽이려고 하겠지만, 그건 너무 아쉽고 소모적인 일이잖아. 안그래?"


 "방금까지 잘도 주절댔던 것 같은데."


 "그래서 싫어?"


 '아무말도 하지마, 제발!'


 사실 드렉슬러는 이 후의 일이 조금은 겁이 났고 대화가 길어질 수록 자신의 목소리가 높아진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은 끔찍할 정도로 쾌락에 약했고 앞으로의 일은 전혀 예상할 수가 없었으니까. 하얀불꽃이 튀기 시작하면 큰 마음을 먹은 것과는 별개로 아무 수확이 없을지도 몰랐다. 레코드의 시간은 1시간 남짓.


 "기억을 도와줄 무언가가 있으면 작업이 좀 더 수월해지겠지. 내 뛰어난 두뇌와 이어진 운명을 믿어보자고."


 "갑자기?"


 "믿고 싶어졌어. 배가 고파졌거든."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가볍게 웃었다.

 저녁은 드렉슬러의 집에서 가벼운 빵과 토마토스튜를 먹었다. 대화는 없었고 식사 후에는 약속이나 한 듯 번갈아가며 샤워를 했다. 로라스가 씻고 나왔을 때 드렉슬러는 레코드판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무드라도 잡을 셈인가?"

 질문에 드렉슬러는 짧게 웃었다.

 "녹음을 할 거야. 너랑 나."

 드렉슬러의 손가락이 번갈아 서로를 가르키자 그 소리가 귓전까지 들릴 것처럼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로라스는 헛기침을 했다.

 "한가지만 물어볼게."

 "그러지."

 드렉슬러는 로라스에게 다가가 그의 뺨을 감싸 제 얼굴에 바싹 당겼다.

 "나한테 다시 반할 수 있겠어?"

 두 눈동자는 로라스의 속을 살피듯 좌우로 번갈아 움직였고 그것이 끝남을 알리며 드렉슬러가 눈을 깜박이자 그제서야 숨이 터지고 침이 넘어갔다.

 "아마도."

 "좋아."

 드렉슬러는 로라스에게 키스했다.




 "몇 번이나 멈추라고 말했잖아. 들리지 않은 거야, 못들은 척 한거야?"

 "전혀 듣지 못했어."

 "언제부터? 마지막 기억이 뭐야?"

 "자네가 내게 키스한 거."

 "하지만 뭔가 말하던 걸."

 "무엇을?"

 "그건 지금부터 들어봐야지."

 "어떻던가?"

 "짐승 같았고 자주 물더라. 목덜미는 쓰릴 지경이야."

 "아니, 자네."

 "응?"

 옷을 꿰어입던 손이 공중에서 멈췄다. 드렉슬러는 한동안 바닥을 바라보다가 눈썹을 들어올리며 침대 위에 누워있던 로라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온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며 여전히 나체인 채였다.

 "아파. 허리고 아래고 멀쩡한 곳이 없어. 네가 옷만 입을 수 있었어도 내가 벗고 누워있었을거야."

 "미안하군."

 "넌 어때?"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만 제외하면 나쁘지 않네."

 "아니, 넌 어떠냐고. 날 여전히 사랑하는 것 같아, 아니면 기운이 빠질 때까지 섹스하고 나니 그럴 기분이 아닌 것 같아?"

 옷을 마저 다 입은 드렉슬러는 침대 위로 다시 올라 전처럼 로라스와 눈을 맞춰 기색을 살피듯 눈동자를 굴렸다.

 "예전 같이 자네를 집어삼키고 싶은 기분은 없네. 손가락 하나하나 먹음직스러워서 잘근잘근 씹어 먹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않아."

 잠시간의 침묵이 있었다. 드렉슬러는 가만히 턱을 긁더니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쉽게 됐군. 그럼 이제 정말 레코드 판 하나에 의지해야하네."

 "그 엄청난 두뇌는 제 기능을 못했나보지?"

 드렉슬러는 슬쩍 웃더니 다시금 로라스와 눈을 맞췄다.

 "어젯밤의 내가 겪은 건 굉장히 폭력적인 섹스였어, 환자양반. 왜인줄 알아?"

  그는 되묻듯 깜빡이는 눈을 깔보듯 비웃었다.

 "네 놈이 내 몸에서 나오는 건 모조리 먹어치우려들더라고. 황홀해서 죽을 뻔했지."

 죽을 뻔했다는 말을 또박또박 씹어뱉는 드렉슬러로부터 로라스는 눈을 피하며 침을 삼켰다. 침묵이 이어지자 남는 것은 어색함 뿐이었다. 뱉은 말로써 드렉슬러는 꽤 괴로웠다.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하는 경우는 수도 없이 많았지만 견뎌내지 못한 것은 꽤 오랜만이다. 그 사이에 로라스는 몸을 일으켜 침대머리에 머리를 괴고 한숨을 내쉬었다.

 "내게 원하는 건 데이터뿐인가?" 

"그렇다면."

 손에 얼굴을 묻고 대답하는 바람에 소리가 뭉개졌다. 로라스는 고개를 들어 드렉슬러의 어깨에 괴었다.

 "나는,"

 "너는?"

 "나는 어쩌면, 한 번 더 자네에게 협조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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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좁은 공간에 둘만이 남는 것은 당연하게도 좋지 않았다. 온갖 서류를 정리하기 위한 캐비넷들에 둘러쌓여 둘의 책상이 고작 8피트 정도의 간격만을 두고 마주 보게 놓였기 때문이다. 드렉슬러는 한없이 분주해보이다가도 무언가 생각에 빠지면 정오부터 해가 질 무렵까지 책상에 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움직이지 않는 피사체로, 상상은 달음박질친다.


 처음. 이가 닿았다. 턱은 자연스럽게 힘이 들어가 마치 기름칠이라도 한 듯이 미끄러졌고 이어 단단하고 섬세한 송곳니의 끝이 부드럽게 눌렸다. 커다란 소리 없이 단단한 마찰. 그 둔한 사각거림. 매끄러운 치아의 표면을 지나 치아 사이사이의 그 굴곡을 혀끝이 더듬었다.


 로라스는 이어 연필을 씹었다. 이제는 눈 끝에 그의 그림자라도 어른거릴라치면 목구멍 너머의 꺼멓고 끝을 모를 구덩이 속 허기가 주머니를 쥐어짜기 시작했다. 목구멍을 태울 듯이 쓴 물이 오를 때면 관절에 쇠못이 박힌 꺼먼 쇠막대들이 물찬 주머니를 터뜨릴 듯이 제 위장을 들썩거리고 있는 위험한 기분 마저 들었다.


 시선을 내리고 눈을 잠시 감는 것도 도움이 되질 않았다. 이미지는 뚜렷하고 생생하여 사실 그 존재가 무척 옅음에도 방 안을 한 가득 채운 그의 체취나 손가락들이 스치는 소리들을 더 예민하게 잡아냈기 때문이다.


 그가 서류를 넘기며 책상을 부드럽게 오가는 손과 그 마디, 힘줄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느 새 제 혀는 그의 피부 위를 노니며 그 짠 맛과 피부의 굴곡을 느끼고 있었다. 그의 손등 대신 제 손등에 입술을 누르며 눈을 감고 그 감각을 음미한다. 끔찍한 기분이 들었다.


 일주일이 지나자 드렉슬러는 시선을 의식했다. 등골이 늘 스산했고 숨이 막혀오는 공기를 모른 척 할 수 없었다. 하늘이 돕는구나. 무언가 제 머리를 스치자 드렉슬러는 이런 생각을 했다.


 그는 벌떡 일어나 로라스를 향해 성큼성큼 걸었다. 날이 서 시퍼런 시선이 제게 따라붙고 있었고 이것으로 확인을 할 필요성은 충분했다. 자신은 노려지고 있었다. 테이블 위를 손으로 밀어 엉덩이를 걸쳐앉았다. 냉기로 쑤셔지는 듯한 눈맞춤에 드렉슬러는 빙글 웃고는 로라스의 뺨을 감싸 엄지손가락으로 눈 아래살을 끌어내렸다.


 "충혈은 아직인가?"


 

 끔찍한 스킨쉽이었다. 로라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제 뺨을 쥔 그의 손을 끌어내려 입 속에 쳐박고 싶었다. 손가락 끝부터 씹어삼킬 것이다. 충동이 들어 고개로 손을 뿌리쳤다.


 드렉슬러는 제 다리 사이에 그를 가두었다. 턱을 끌어올려 다시 제 눈을 맞추고 뺨을 눌러 억지로 입을 벌리게 했다.


 "하지만 입맛은 있는거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로라스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 모든 일을 드렉슬러가 장난처럼 생각하고 있다면 그는 이 일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제가 누르고 있는 충동이 얼마나 위험한지에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로라스의 배려에도 불구하고 드렉슬러는 그의 멱살을 잡아채어 의자에 도로 앉혀놓았다.


 "네가 원한다면 내 가슴을 틀어쥐거나 엉덩이를 쥐어짜도 좋아."


 어리둥절한 얼굴에 드렉슬러는 키스했다. 깊고 들이마시는 키스에 로라스는 심장이 두근거려 위장이 다 끄집어내지고 있다고 느꼈다. 거센 파도같았던 충동이 가라앉고 몸은 의자 위로 녹아내린다.


 "그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야."


 드렉슬러는 다시 웃었다.


 내 연구를 도와줘. 그는 말했다. 신체의 반응, 병세의 기간, 임기응변, 끝내는 치료법까지 나는 모두 필요해.


 "내가 어떤 도움이 될지 나는 모르겠네."


 "내게 언제 반했지?"


 하얗고 네모지기만 한 종이에 드렉슬러는 무언가 사각사각 적어내렸다.

 환자, 병명, 상태, 대처 전, 후, 방법, 연관성.

 '환자 취급이군.' 로라스는 다시 한 번 입맛을 다셨다.


 "처음의 식사 때일세."


 이 후로 드렉슬러는 이것저것을 물었다. 반했을 때의 심경, 신체 변화, 자신이 생각 나는 주기, 자신과 만나기 전에도 자신을 생각하는 마음이 점점 커져갔는지, 아니면 괜찮아졌는지. 로라스는 담담히 답을 읊어 나갔다. 수치스러움보다 의자에 잘못 앉아있는 듯한 낯설음이 더 컸다. 자세하고 정확한 답을 하려 집중해나갈수록 드렉슬러 역시 제게 더 집중해오는 느낌이 들었으므로 어찌되든 좋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내 생각하면서 한 적은 있어?"


 이 전까지는. 무신경한 남자라고 로라스는 생각했다. 헛기침을 했고 이것을 솔직하게 말해도 되는지 잠시 머리를 굴리려하다 진중하고 집중하는 드렉슬러의 얼굴에 입술을 꾹 물었다.


 "있네."


 "언제?"


 "최근은 바로 어제 저녁일세."


 "횟수나 주기는 어떻게 변하고 있어? 혹시 날짜나 시간은 다 기억해?"


 "자네 생각이 나 잠들 수 없을 때쯤이나 퇴근하고 직후, 빈도는 짧아지고 유지기간은 길어지는 느낌이야. 상상 속의 자네가 더 열정적으로 변하거든. 이미지는 점점 더 선명해지고 붉어지네. 색이 짙어지면 소리가 들리고 촉감이 느껴지고 끝으로 후각까지 돌아오지. 자네는 늘 유혹적이고, 나는 시간이 갈 수록 자네에게 손을 댈 필요가 없어져. 자네가 날 원하고 있다는 착각을 하게 되거든."


 드렉슬러는 무언가 말을 하려 입을 벌렸다가 다시 생각에 잠기듯이 침음을 내고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도 증세가 심각해지면 결국 해야하잖아."


 그것이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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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라리 사랑이었다면 좋았을까.


 입버릇으로 말하던, 나의 사랑하는 별, 내 소중한 창.


 나는 그가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애진즉 알고 있었다. 그 부드럽게 넘어가는 혀의 소리와 그 입술 끝에 남은 바람을 나 역시 간지러움에 파묻혀 가득 베어물고는 했으니, 모를 수 없었다.


 언젠가 한 번은 그 간지러움이 괴로워 별과 창이 모두 사라지고 어떤 단어가 그 빈자리를 가득 채웠으면 하는 충동에 사로잡혔던 시절도 있었다.


 그래서 내가 그를 사랑하느냐면, 나는 그를 거절했을 것이다.


 나의 사랑하는 별.

 나의 소중한 창.


 괴로웠어도 그랬을 것이다.


 나는 소중한 것이 많았다. 움켜쥔 것이 많으니 더 쥘 수 없었다. 그것은 욕심이요, 죄악이니 필히 벌을 받으리라. 나를 바라보는 그의 파란 바다에 안겨 안락의자에 몸을 뉘이며 그런 생각을 했다. 그 폭풍과 불꽃과 파도들.


 나는 그의 집 벽난로의 나무 타는 냄새가 좋았다. 나무가 타들어가며 나는 묘하게 매캐하고 온기 어린 냄새는 그에게서 나는 종이와 쇠 냄새에 아주 근사하게 어울렸다. 그러다 어느순간 그가 치수를 재기 위해 내게 다가올 때면, 손끝에 묻은 잉크냄새가 그 따뜻한 것들에 섞여들 때면, 나는 시선을 부드럽게 내리기위해 무던히 애를 써야했다.


 그는 나를 사랑했다. 거품을 거둬내던 손길과 어깨 위에 얹어지던 내 손끝의 그 떨림. 그 놀라움. 그 고통스러운 얼굴. 명백하게 그는 나를 사랑했다.


 나는 신에게 기도했다. 그의 괴로움이 녹아사라지게 해달라고. 그의 통증이 사라지는 동안, 가슴이 뻐근하여, 나는 엎드려 빌었다. 떨리는 손으로 묵주를 쥐고 엎드려 그의 고통이, 사랑이 사라지게 해달라고 빌었다. 무아지경으로 몸부림이 나면 가끔씩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이 입으로 들어오기도 했다. 주여,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게 하소서. 나에게 사랑이 없음으로 그가 괴로워하지 않게 하소서.


 역한, 고약한 불꽃의 냄새가 났다. 붉지도 못해 하얀 불이 다른 것을 껴안아 제 몸을 터뜨렸다. 폭발에 몸이 뜨고 돌벽에 머리를 부딪혔다. 충격으로 잠시 뻗어 누워있으려니 하늘이 맑았다. 연기가 모락모락 오르는데도 눈이 부시게 맑았다. 몸이 멀쩡하구나. 역시 그는 대단해. 몸을 일으켰다.


 단순한 메뉴얼이었다. 모두가 알고 있을, 피해상황에 관한 메뉴얼. 폭탄인지 지뢰인지 능력자의 짓인지보다 먼저 파악해야할 현재의 메뉴얼.


 누가 현재로부터 낙오됐는가.


 입에서 괴상한 소리가 났다. 그도 사람이니 실수가 있겠지. 방금의 충격으로 내게 무언가 문제가 생겼을거야.


 다리가 움직이질 않았다. 숨을 쉴 수가 없어서 투구에 손을 올렸다. 하지만 누군가 힘껏 누르고 있는 것처럼 벗을 수가 없었다.


 나는 비척비척 뛰었다. 갑주에 물이라도 가득찬양 몸이 너무 무거워서 바로 걸을 수가 없었다. 창을 힘껏 움켜쥐고 나는 그래도 뛰었다. 그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 연기가 나는 곳으로 나는 가야했다.


 사랑이었다면 좋았을까. 가만히 두었다면 그가 내게 사랑한다고 언젠가는 말했을까. 나는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힘없이 떨어져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안 돼, 안 돼 하며 고개를 젓는 시늉을 했다. 뭐가 우스운지 입술끝까지 당겨올리며 안 돼, 안 돼. 없는 소리가 무겁게 투구를 눌러 이제는 정말 투구를 벗을 수 없게 되었다.


 눈은 깜박깜박 무슨 생각을 하는지 여닫히기만 했다. 충동이 밀려들었다. 거세고 고약한 감정이 겨우내 얼어붙었던 폭포가 녹아내리듯 쏟아지기 시작했다. 뺨을 쓰다듬고 싶었다. 그와 눈을 맞추고 싶었다. 그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고 그로 인해 내가 살아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나는 긴 시간을 건너 드디어 손을 들어올렸다. 그의 눈이 감겼다.

 그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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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처가 따끔거린다. 없는 것이 아프다. 비어있는 곳에 손을 대어보고 휑한 가슴 위에 어색한 동작으로 손을 옮긴다. 팔을 잃었다.

 

 ‘글 쓰는 연습을 하세요.’

 

 의사가 말했다. 의사는 길고 지루한 말을 질척이고 끈적거리게 늘여 귓구멍에 붙여놓고 목숨을 달아 제 말에 무게를 더했다. 익숙하지 않은 동작에 익숙해지지 않으면 당신은 죽어요. 없는 소리가 들린다. 치료 외의 처방을 내리며 그는 자신을 무엇으로 여길까. ? 그렇다면 나는 그 제단을 쌓기 위해 놓여진 한 장의 벽돌인가. 의사의 뒷거울에 비친 비딱한 모습에 나는 빙그레 웃었다. 의사는 그것을 보고 따라 웃는다.

 

 나는 왼팔, 왼손의, 왼쪽검지를 들어 타자기의 버튼을 공들여 하나하나 누른다. …, …, …. 일정한 간격의 늙은 소리가 난다. 이가 악물려 사나운 소리가 나자 전쟁 같은 오케스트라의 하모니가 신경을 긁어 A부터 Z까지의 흔적을 남겼다. 나는 미련 없이 타자기를 치워냈다.

 

 펜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펜촉에 걸려 울어버린 종이를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매끄럽게 늘 미끄러지던 곳에서 발이 걸린 펜은 대체 무슨 생각을. 종이는 제가 견딜 수 없는 날카로운 고통에 몸뚱이를 통째로 내어주었다. 종이가 잔뜩 운 자국 위를 손가락 끝으로 떠듬떠듬 쓸어냈다. 손 끝에 잉크가 묻어 파란 자국이 남았다. 주먹을 움켜쥐었다.

 

 전장은 모든지 순식간에 지나가버린다. 아차. 하는 순간 죽음은 목 뒤까지 다가와 제 낫에 턱을 걸쳐놓는다. 죽지 않았으니 다행이다. 그 말은 밑도 끝도 없이 불쾌하게 다가와 나는 웃는 얼굴로 하하, 그렇네. 정말 다행이네. 하며 어울리지도 않는 접객을 했다. 모두가 떠난 그 때, 주름진 미간과 한껏 다친 시선으로 상처를 더듬는 사람이 있었다.

 

 남자는 홀린 듯이 말을 놓는다.

 

 “자네는 이제 창을 쥘 수가 없어.”

 

 그 말에 나는 헛웃었다. 의도도 이유도 알 수 없는 말에 당황을 웃음으로 무마시키려고 했다.

 

 “자네는

 

 남자는 이를 악물었다.

 

 “이제 창을 쥘 수가 없어.”

 

 나는 울었다.

 

 그는 다 잃어버린 것 같았다. 내가 잃은 것은 팔 하나일 뿐인데 그는 그의 삶을 송두리째 잃은 듯이 굴었다. 나는 빈 공간을 허우적대며 주먹질을 했고 그는 이를 앙다문 채로 그 주먹을 고스란히 받아냈다. 나는 그의 품 속에 무너져 한참을 울었다.

 

 다시 글쓰기를 한다. 섬세한 근육을 단련시키는 좋은 운동이다. 이제 알파벳뿐만 아니라 짧은 글귀들을 베껴낼 수 있게 되었다. 곧 머릿속에 있는 것들도 다시 빛을 볼 것이다. 그렇게 좋은 생각을 한다.

 

 ‘나는 끝나지 않았으니까.’

그저 팔을 하나 잃었으니까.’

 ‘밝은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자네는 신을 믿지 않잖아.”

 

 소리가 머리 위에서 떨어진다. . 떨어진 물방울에 잉크가 번졌다. 눈물이 차는 것은 어째서 언제나 늘 갑작스럽고 당황스러우며 부끄러운 일인지. 펜을 쥔 손 위에 손이 얹어진다. 등이 감싸여 안기고 뜨거운 숨이 귓가에 닿았다.

 

 “다리오.”

 

원망이 아닌 좌절에 관해 글을 쓴다는 것은.

 

 “다리오 드렉슬러.”

 

 일어나기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

 

 네가 나를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없는 것의 통증이 가셨다.

Posted by Binc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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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목의 약국은 늦게까지 문을 열었다. 부지런한 주인은 새벽 같이 일어나 가게 앞을 쓸고 물을 부어 무언가를 쓸어내는데 익숙했다. 밤 늦은 시간의 손님과 실과 바늘, 소독약의 알싸한 냄새는 마치 친구 같았고 비명소리, 탄 냄새, 부서진 뼈를 움직이지않게 고정시키는 것은 너무 익숙한 나머지 다음 날이 되면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러나 한 발 이상의 총성은 오랜만의 것이었다. 드문 드문 이어지는 고요는 뱃속의 이질감으로 고여 묵직하게 남았다.

 날이 저물고 날벌레가 타닥타닥 타들어갈 무렵, 바닥에 무거운 것이 질질 끌리는 소리가 났다. 잔돌이 섬유에 박혀 바닥의 커다란 벽돌을 득득 긁는 무거운 소리. 그러나 발소리는 들리지않았다. 약사는 서랍을 열어 권총을 꺼내 책상 아래로 단단히 쥐었다.

 끌리는 소리가 약국의 문 앞 계단에서 멎었다. 곧이어 실낱 같은 소리가 오래 된 나무문의 틈 사이를 비집었다. 소리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약사는 침을 삼켰다.

 "…누구시오."

 또 한 번 작은 소리가 기어들었다. 약사는 총을 그대로 들어 잠금장치를 풀고 문 바로 옆의 벽에 몸을 숨겼다.

 "누구냐니까!"

 질러 낸 고함으로 귀가 울렸다. 타닥타닥. 날벌레 타는 소리가 이어지고 침묵이 가라앉았다. 조금 더 큰소리가 물에 잔뜩 젖어 울렸다.

 "…선, 생님."

 터지는 탁성에 약사는 힘껏 문을 열어젖혔다. 그러자 오물이 잔뜩 묻은 익숙한 남자가 가장 아래의 돌계단 하나에 걸쳐져 누워있었다.

 "오, 토마스…! 이게…이게 대체…!"

 약사는 총을 선반에 내려놓고 단숨에 계단을 뛰어내렸다.

 피투성이의 토마스는 계단에 기대어 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다리도 팔도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금발의 남자는 도망치는 제 팔뚝에 한 발, 옆구리에 한 발을 박아넣었다. 타들어가는 듯한 뜨거움에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숨이 막힐 때까지 골목을 달리다 하수도의 흙탕물과 오물더미에 몸을 숨기고 이곳까지 기어 도망쳤다. 겨우, 목숨만을 건졌다.

 "선생님…리처드가, 리처드가 죽었어요…"

 울먹임에 무언가가 잔뜩 섞인 침이 튀었다. 토마스는 힘 없이 늘어져 약국 안으로 옮겨지면서도 꺽꺽대며 필사적으로 말을 이었다.

 "듣고 있, 어요? 내가, 내가 봤어요. 벽에…기대어 있었어요…."

 약사는 수도를 틀어 오물을 씻어내기 시작했다. 물소리에 묻혀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얼마나 상처가 깊은지도, 감염 여부도, 심지어 오물로 인해 상처의 위치도 모르는 시각을 다투는 상황에서 토마스가 떠들어대는 소리는 저에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시체는 치료할 수 없으니 이런 이야기는 지금 들어봤자 의미가 없지않은가. 약사는 곧 팔의 출혈을 발견하고 옷을 벗겨 붕대로 상처 위의 팔뚝을 단단히 묶었다. 소독약을 붓자 끔찍한 비명이 터졌다.

 "토마스, 나 여깄네. 여긴 약국이야. 정신을 잃지 않게 집중해. 지금 오물 때문에 상처가 정확히 어딘지 알 수가 없,"
 
 "리…처드가 죽었어요, 선생, 님…! 화이…화이트 칙슷….다 그 놈,들 짓이에요…"

 토마스는 가슴 위를 세워 이제 거의 고함을 지르듯이 핏대를 세웠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에 눈이 터져나올 듯이 붉어지자 약사는 침착함을 잃고 결국 언성을 높혔다.

 "감염이 돼 썩어들어가면 죽을 수도 있어! 다친 곳이나 말해!"

 토마스는 얼이 나간듯 보였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 눈물조차 말라버린 멍청한 눈으로 아무 말도,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제게 화난 얼굴이 두 눈 가득 들어차자 지금까지의 발악은 온데간데 없이 온 몸의 힘이 풀렸다. 토마스는 바로 누워 허망한 얼굴로 웃다가 "네, 선생님. 왼쪽 팔, 오른,쪽 옆구리를 맞았어요." 라고 답했다. 약사는 재게 움직였고 이어 토마스는 시체처럼 늘어져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문양이,"

 "그 더럽고 거대한, 문양이요. 리처드의 이마에 새겨진, 그 죄인의 낙인이요…."

 토마스는 울고 있었다.

 "그, 사람은요. 이제, 그 사람은요."



-


 지하도는 습하고 비린내가 났다. 공기는 탁하고 더러워 숨을 쉴 때마다 매캐한 연기를 들이마시는 듯한 착각이 들었고, 바닥은 이끼로 미끄러워 정장구두 밑창이 자꾸만 미끄러져 불쾌했다. 로이드는 발끝만을 내밀어 이끼 낀 돌바닥을 한 번 문질러보고는 다시 그것을 맨땅에 문질러 닦았다.

 "로이드. 결국 여기까지 왔군."

 "맥그리거씨가 훈계까지 시키시던가."

 제임스는 입술을 비틀었다. 듣는 이가 있건 없건 작업 도중에는 절대 본명을 부르지 말 것. 언제부터인가 둘은 이 세계의 가장 기본적인 룰조차 따르지 않고 있었다. 부서진 규칙은 의미가 없다. 그 의미 없는 규칙에 세워진 왕국은 힘없이 무너진다. 둘은 사람 좋은 미소를 띄우고 마주 웃었다.

 "곧 차가 도착할 거야. 우리 애들이니 겁먹지 말고 갈 길 가면 돼."

 "걱정이 너무 과한 것 아닌가? 상대는 겨우 한 명인데."

 "조심해서 나쁠 것없지."

 "비겁하군."

 "마치 당신처럼."

 둘은 악수를 나눴다.

 "나는 자네가 고꾸라지는 걸 보고싶어, 로이드. 자넨 성공한 사람치고도 아주 뒤가 구린 사람이잖아."

 "지금이 그런 시대 아닌가. 나야 땅에 떨어진 기회를 주웠을 뿐이야. 그리고 다른 이들은 이런 내 위치를 아주 부러워한다네. 부러워하다못해 시기, 질투를 하지. 자네를 좀 보게!"

 로이드는 가볍게 손뼉을 쳐 양 팔을 벌리고 입꼬리를 더 끌어당기며 덧붙였다.

 "평생 뒷처리 신세라니, 정말 안됐군!"


-


 끝없는 낙하가 계속된다고 생각했다. 바닥이 없었고 잡히는 게 없었으니 그저 떨어지고 있다고. 그러다 어느 순간 로라스는 제가 땅에 발을 딛고 서있다는 걸 깨달았다.

 풍경이 낯이 익었다. 드문드문 흙집이 지어진 넓은 황야에는 모래 섞인 바람이 불고 풀도 나무도 바싹 말라 죽어있었다. 순간. 소름끼치는 소리가 났다. 완전히 바스라지지 않은 나무에 겨우 매달린 그네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익숙하다. 모든 것이 익숙하다.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로라스는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황급히 제 모습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뒤에서 두런두런 익숙한 목소리가 난다. 모든 것이 확실해졌다. 이곳은 과거의 전장이다.

 씻을 수 없는 과오, 치욕스러울 정도로 멍청했던 과거의 자신. 휘두르면 휘두르는대로 움직이는, 성능 좋은 꼭두각시 같았던 제 부대는 결국 최전방으로 밀려나 돌격명령을 받게 되었다. 군인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거는 것. 소중한 것을 지켜내는 것을 숙명으로 받아들여야하는 위험하지만 명예로운 직업. 그리고 이것은 명령이니까. 텅 빈 마을이라고 생각했던 곳에서 적의 폭격을 받았을 때, 로라스는 그제야 제가 얼마나 멍청했는지를 깨달았다. 자신들은 고작해야 체스의 말에 불과한 것을.

 로라스는 혼자 살아남았다. 능력자로 구성된 제 부대의 부대원이 자신의 목숨을 마지막으로 건 대상이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은 무엇을 했나. 침상에서 일어나 공로훈장을 받고 진급하여 그 길로 군인을 그만두고 다시 아버지의 뒤를 이었다.

 다시는 이런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자신은 또 한 번 그 지옥으로 걸어들어가고 있었다. 로라스는 모든 것에 한 가운데에 있으면서도 멀리서 모든 것을 지켜보는듯한 기분 역시 동시에 느꼈다. 일이 어떻게 될지 알기 때문에 일은 또 한 번 그렇게 되고 있었다. 그는 이 상황의 주체이면서 또 동시에 관람객이기도 했다. 그렇게 단 세걸음만에 깨달은 것은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절망적인 사실이었다.

 다만 기시감이 들었다. 이 곳은 한 때는 제가 무언가 바꿀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죄책감으로 고개조차 들지 못했던, 그렇게 몇 번이나 보아왔던 광경이다. 정말이지 그간에도 수차례 꾸었던 악몽인데, 몇 번이나 도망쳤던 전장인데. 이상했다. 모든 상황이 익숙하면서도 낯설고 그렇게 될 일이면서도 부자연스러웠다. '제 발로 미끼가 되려 걸어가는 것을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다니.' 로라스는 탄식했다.

 미끼.

 그렇다면 무엇을 위한 미끼였나. 우리는 적군의 모습을 드러내기 위한 미끼였다. 아니, 아니. 좀 더 근본적인 것. 우리는 무엇을 위해 미끼가 되었나. 전쟁의 승리? 대를 위한 소의 희생? 이것은 그렇게 거창하고 위대한 작전이 아니었다. 오히려 천대받는 이들을 미끼로 쓰고자 한 아주 비열하고 더러운 부류의 것이었다. 그래서 누가 가장 큰 이익을 얻었지? 누가 우리를 내몰았는가?

 '수고했네. 고생이 많았어.'

 훈장은 하나가 아니었다. 파란 제복. 악수. 부드럽게 웃는 얇은 입술. 떠오르는 이름이 있었다.

 뜨겁게 타오르는 머리로 이가 악물리고 얼굴 근육이 경련했다. 퍼런 핏줄 속 붉은 피가 두근거려 눈물이 터져나왔다. 떨리는 입술, 흔들리는 시선과는 상관없이 쿵, 큰 소리와 지진이 났다. 붉은 불덩어리가 머리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폭격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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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의 총성으로 거리의 시간이 멎었다. 바람 한 점 없이 총구가 흔들렸고, 시작된 저녁의 찬 공기에도 이마를 타고 식은 땀이 흘러내렸다.







 땀은 리볼버를 움켜쥔 손 안에도 가득 차 미끌거렸다. 단 한 번 총을 쐈을 뿐이다. 술에 취한 늙은 몸은 이 반동조차 힘에 겨워 했다. 온 몸이 크게 흔들려 근육이 뻣뻣해지면서 살이 아리고 저렸다. 충격을 버티느라 딱딱해진 양 팔과 두 다리는 그렇게 리처드를 땅바닥에 주저앉혔다.



 잔경련은 성가셨다. 그 커다란 떨림이 잘게, 더 잘게 쪼개져 온 몸으로 질병처럼 퍼지고 휘어도는 감각 속에서 인중과 입술, 눈 아래에 하얗고 통통한 구더기가 기어다니는 느낌이 몽롱하게 퍼졌다. 리처드는 리볼버의 총구를 애써 고쳐쥐고 도드라진 손바닥의 살만으로 콧수염을 문질렀다. 콧수염이 땀으로 축축해졌다.







 태양을 등진 금발의 남자는 낯이 익었다. 서글픈 인상의 순한 얼굴. 살기 그득한 눈동자와 얇고 희미한 입술선. 그간 보지 못했으나 잊을 수 없는 인상과 그 어린 아이의 잔혹함이 성인이 되며 굳어진 얼굴선과 건장한 골격 속에 고스란히 살아있었다. 이 녀석도 과거의 망령이로구나. 리처드는 허탈한 숨을 내쉬었다.







"니노, 이 멍청한 새끼."







리처드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오랜만이야, 리처드."







제임스는 그가 자신을 기억한다는 사실이 우스운양 짐짓 입술을 비틀어 웃으며 덧붙였다.




"지독하게 똑같은 얼굴이군."





 똑같은. 그 말이 우스웠다. 리처드는 잠시 뻣뻣하게 굳었다가 목젖까지 내보이며 껄껄 웃었다. 뱉어내는 웃음으로 침이 흘러내리고 시야가 흐려지며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남말을 하는구나."


리처드가 총을 향해 얼굴을 내밀어 소맷부리로 침을 닦으며 말했다.


"이제 그만 하지. 숨겨주는 일도, 또 도망치는 것도."


 제임스는 입을 다물며 총을 꺼내 리처드를 겨눴다. 석양의 붉은 빛이 서서히 들어올려진 은색의 매끈한 쇳덩이를 비추고, 순간 그 번쩍임에 눈이 부셔 리처드는 눈쌀을 찌푸렸다.


 "나는 아무것도 몰라. 마치 너처럼. 하기야, 너야 항상 그랬지. 네 부모에게도,"


 리처드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무언가 떠오른 듯이 덧붙였다.


 "또 내 동생에게도."


 익숙한 미소 끝에 경련이 일었다. 과거는 파도처럼 급작스럽게 밀려들었다. 제임스는 제 손안에, 또 등 뒤에 솟아난 땀방울을 느낄 수 있었다.


"난 더이상 어린애가 아니야."


 다부지지 못한 목소리가 튀어올랐다. 소리는 처음도 끝도 흐리기만 했다. 자신은 어린아이가 아닌가. 더이상, 정말로?



탕-!



흔들리는 총구는 또 한 번 제임스의 근처도 향하지 못했다. 총에 맞은 흙벽에서 먼지가 날려 리차드의 얼굴로 그늘이 졌다.



"젠장."



제임스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난 늙었어. 이렇게 네 녀석이 코앞에 있는데도 맞추지 못할 만큼. 세월은 누구에게나 흐르지. 그래서, 넌. 얼마나 자랐나, 니노."



 더이상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리처드는 온화한 미소를 띄운 채 총 머리판을 제 불룩 나온 배에 걸쳐 놓았다.


 제임스는 제 다리가 땅에 붙어버렸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빛이 바란 나머지 멈춰버렸다고 느꼈다. 제 앞의 총구는 간신히 정면을 보고 있을 뿐이었고 다 늙고 지쳐 술에 찌든 노인이 가누지 못하는 팔로 제대로 쓰지도 못하는 총을 움켜쥐고 있을 뿐이었다. 늙은이. 오래된 늙은이. 그러나 끝을 낼 수 없었다. 노인의 눈 그늘 아래엔 여전히 빛이 번쩍였다. 밝은 곳에서조차 빛 바랜 사기그릇 같을 것이 분명한 눈이, 그 뱁새처럼 조그맣고 멍청할 눈이 마지막까지 빛나고 있었다. 그것이 저를 놓아주지않았다.




 방아쇠를 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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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취한 듯이 편지 장을 손에 쥐고 끊임없이 반복해 읽어 내렸다. 몇 글자의 이름과 몇 가지의 단어와 짤막한 문장. 그 단출한 문장들. 반쯤 벌어진 입술이 달싹였다. 그가 오고 있었다.




드렉슬러의 외근은 그 자체로 낯선 감이 있었다. 하지만 바다 건너 일련의 사건들이 일반적이지 못하여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부분이 거의 없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평소 그런 단어들로 푹 젖어 살아가는 그가 이 원정에 일순위로 배정을 받게 된 것은 사실상 꽤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늘 상황은 괴상할 수록 그에게 일상이라고 부를 만한 일이 되었다. 특히나 이번 사태는 그 예측불가의 특수성으로 드렉슬러 특유의 변덕스러운 성향과 호기심으로 시작되는 기호에 너무나도 철저히 부합되어 맞아 떨어졌던 것이다. 요점으로, 문제는 드렉슬러가 아니었다.



로라스는 책상 위에 놓인 쓸모없는 종이짝을 노려보았다. 변수가 너무 많은 일에 변수를 만들 요소는 최소화하는 편이 좋다. 이번 일에 대한 윗사람들의 태도는 그들의 말을 빌려 조금 고상하게 에두르자면 대충 이런 모양새가 되었다. 그들이 보기에 제 성격은 불씨 앞의 마른 장작 같았고 사소한 정에 휘둘렸으며 고지식하여 대처에 융통이 없었다. 외곬으로 다른 이들과 공동 작업에 적절치 않으며 단독 행동의 위험이 있어 이번 건은 '절대' 허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실 윌라드는 로라스를 직접 불러다가 위쪽의 의사를 전달하며 절대라는 단어를 몇 번이고 사용했다. 어지간히 그 답지 않은 일이다. 로라스는 상심했다.



공식으로 내려온 파견지원서에 대한 답장에는 처참할 정도의 냉엄함이 있었다. 로라스는 몇 번인가 책상 서랍에 지원서를 넣었다 다시 꺼내보았다. 제 생각에도 부질없는 짓으로 부적합이라는 붉은 도장은 밤새 타닥타닥 써 내려갔던 검은 잉크 위에 시간이 갈수록 깊숙히 스며들었다. 그런데 이 남자에게 일상이라는 단어를 써도 좋은 걸까. 그는 잠시 그런 생각을 했다.



바다 건너 남쪽에서 수증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보고를 받은 관계자 모두 숨을 죽였다. 바다 건너의 전쟁이 또 일어날지도 모른다. 공포로 잠식된 침묵 속에서 모두가 시끄럽게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능력광폭, 불안, 억제. 섣불리 접근 할 수 없는 지대를 가장 전통적이고 고전적인 방법으로 접근하기로 결정이 나자 로라스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석 달. 못해도 석 달이 걸릴 거야.



드렉슬러는 별 일 아닌 양 그렇게 중얼거리듯 말을 흘렸다. 그가 묻지않은 말에 친절히 대꾸하는 일은 도무지 익숙하지가 않아서 로라스는 한참을 끔벅끔벅 아직 꼬리가 남은 겨울 햇볕이 조금 따갑게 그를 내리쬐는 것을 구경했다. 펜이 사각거렸다.



회사에서 비품으로 타자기를 배정해주었는데도 그는 꿋꿋하게 잉크펜을 썼다. 그게 어느 날인가. 로라스는 아마도 그것이 제가 재작년에 준비했던 크리스마스 선물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 해를 떠올리며 찬찬히 드렉슬러를 살폈다. 몇 번을 주의깊게 살펴도 펜촉 달린 펜대가 만년필로 바뀌었을 뿐. 남자는 여전히 변한 게 없었다. 고집스러운 것은 둘이 참 닮았다. 나는 그래서 그가 좋은 걸까. 로라스는 그런 생각을 했다. 잠시. 내가 그를 좋아하나. 물음이 바뀌었다.



“혹시 모르니까 가지고 있어. “



마지막 날의 부름으로 로라스는 열쇠를 받았다.



“별 것 아냐.”



열쇠 쥔 주먹을 움켜쥐고 멀뚱히 서있는 로라스를 보며 드렉슬러는 슬쩍 웃었다. 괜찮아. 덧붙여진 말이 속에서 웅웅 울렸다.



날들은 어느 순간이고 어느 시간이고 같았다. 둘은 사무실에서, 갑판에서, 제 것이 아닌 남의 공간에서 시간을 헤아리지 않았다. 하늘이 흐르고 바람이 불었으며 일상이 업무가 되었다. 한 달쯤 되었을 때, 로라스는 이 넓지도 않은 집의 거실이 휑하다는 생각을 했다.



빈 공간은 찾아오는 것이다. 깨닫는 순간 낯설어지는 시간이 있었다. 로라스는 소파에 길게 누워 슬리퍼를 벗어던지고 읽던 책을 가지런히 가슴 위에 덮었다. 허하다. 내가 저녁을 먹었던가. 천장 위의 조그만 백열등에서 열이 나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그는 이것이 별 것 아니라고 했다. 괜찮다고.



“괜찮아.”



로라스는 눈을 감고 그 때의 어조를 흉내내보았다. 괜찮아. 그리고 슬쩍 웃는다. 그래서 나는 저녁을 먹었던가. 자꾸만 헛생각이 났다.




평범한 날이었다. 로라스는 우편함 속 드렉슬러의 우편물을 가지고 그가 준 열쇠로 문을 열어 입구의 테이블 위에 평소처럼 열쇠와 물건들을 올려놓은 후 코트를 벗어 옷걸이에 걸어놓았다. 그대로 복도를 걸어나가다 언듯 익숙한 갈색봉투를 본 기분이 들어 왔던 길을 돌아 걸었다. 그리고 알베르토 로라스. 제 이름을 보았다.



우편은 한 장의 편지와 두 장의 보고서로 이루어져있었다. 다른 재질의 편지지에 자꾸만 손가락 끝이 간지러웠다. 로라스는 편지를 제일 나중에 읽기로 결정하고 보고서 맨 뒷장으로 종잇장을 감추었다.



보고서의 한 장은 이번 원정 구성원들의 이름 목록과 그 역할에 대한 사본이었고 나머지 한 장은 서두 가득 그들의 노고에대한 의미없는 꾸밈말로 그 자리를 채우다가 마지막의 몇 줄로 상황을 보고, 종료하는 알림문이었다. 로라스는 내용을 빠르게 훑었다. 서두르는 움직임에 자꾸만 문장들이 겹쳐 읽혔다.



“아-”



1차 원정종료. 귀환 예정일 2.10~16. 전원 무탈.



무탈! 그 단어가 어찌나 기뻤던지. 로라스는 그제야 괜찮아.-하고 제대로 드렉슬러를 흉내낼 수 있게 되었다.



굳은 살로 갈라진 손 끝에 사각사각 종이 소리가 요란스러웠다. 로라스는 보고서를 바닥으로 흘리고 그 묘하게 갈색빛이 나는 종이를 양 손으로 쥐었다.




-친애하는 알베르토



우선 집을 봐줘서 고마워. 사실 내일에야 널 불러다가 열쇠를 맡길 셈이지만 아마 너는 거절하지 않을 테니까 미리 인사한다. 사실 꼭 봐주지 않아도 좋았어. 꽤 긴 여행이지만 사람을 고용하면 됐을 일이니까. 하지만 만약 내일 내가 너에게 그 열쇠를 넘기게 된다면-분명 그럴테지만-나는 그냥 그러고 싶어서 그런 거야.



아마도 넌 두 달하고 스무날쯤 지난 이 시기에 이 편지가 어떻게 보고서와 함께 내가 아닌 네 앞으로 도착했는지가 궁금하겠지. 나는 이 편지를 떠나기 전 '그 상냥한 홀든'에게 부탁했어. 무뚝뚝하지만 꽤 괜찮은 녀석이야. 내 눈이 틀리지 않았다면 녀석은 편지봉투 없이도 이 편지를 읽지 않겠지.



별 다른 일은 아니야. 나는 '이 일'이 내 계산대로 문제없이 끝난다면 우리가 내년 2월 14일 오전 중으로 포츠머스에 도착할 거라고 생각해. 아마 그건 틀림없이 그럴테고 말야. 그래서 만약 별 일 없이 보고서와 편지가 네 앞으로 도착한다면 네가 항구로 내 개인 짐을 실을 수레를 하나 보내주었으면 해. 나는 짐이 꽤 많거든.



나중에 보자, 알.



-다리오 드렉슬러


ps. 선착장으로 직접 전보를 친다면 그렇게 번거로운 일은 아닐 거야.






여관의 침대는 꽤 삐그덕 거렸다. 흰 커튼을 걷어내면 다닥다닥 늘어선 낮은 건물들이 보였다. 파랑과 초록과 노랑과 붉은 벽돌과 페인트, 그 알록달록한 색 건너건너로 바다와 배가 있다. 걸어서, 차를 타고, 요 근 이주간 몇 번이나 되걸었던 길은 이제는 눈을 감고도 선히 떠올릴 수 있게 되었다. 코 끝에 빙글빙글 묘하게 바다와 안개와 새벽 냄새가 난다. 들뜬 탓이다.



로라스는 머리맡 달력에 붉은 선들로 하루하루를 헤아리며 날이 가기를 기다렸다. 그처럼 신발을 벗어던지고 침대 위로 뛰어들듯 누워도 보고 베개를 끌어안아 얼굴을 문질러도 보고 이불 속에 몸을 동그랗게 말기도 했다. 읽히지 않는 문장과 떠도는 생각들과 달력의 나열된 숫자들, 시간들, 그리고 첫 날의 하얀 호텔 시트. 그 새 것의 냄새로.



로라스는 부정하는 것을 그만 두었다. 시간은 기다림이었다. 그는 눈을 뜨면 붓의 결이 생생한 흰 나무 격자창 틈으로 불어드는 푸른 바람이었다가 또 잠시간 지기 전 해처럼 붉게 붉게 타올랐다가 조금 시간이 지나면 꿈에 빠져들 남빛 짙은 천장의 총총히 박힌 별이 되었다가 하며 하루들을 보냈다.



2월 14일. 하필이면. 로라스는 오지 않는 잠에 의자를 끌어 창틀에 팔꿈치를 괴고 손을 맞잡아 입을 기대어 막았다. 우연이라기에는 얄궃고 필연이라기에는 너무나 잘짜여진. 이렇게 자신은 결국엔 기대하게 되고 말지 않는가. 신이 계시어 나를 용서치 않으신다면 나는 기어코 과거 흐린 영광 속 역사에 상처로 남은 성자가 되리다. 중략.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중략. 가로등 불빛을 가벼이 얹고 숱많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결국 로라스는 밤을 새웠다.



해가 뜨기 무섭게 로라스는 택시를 잡아탔다. 오랜시간동안 배를 탔으니 늘 헝크러져있는 머리는 더 제멋대로일 것이라고 마음대로 생각하면서 파란 바다를 뒤로 하고 제게로 걸어오는 그 곧은 걸음걸이를 떠올렸다. 상상은 즐거웠다. 그는 행복해보였고 저를 보며 웃고 있었다. 바라보는 것이 좋다. 바라봐 오는 것이 좋다. 그 밝은 눈으로, 아름다운 웃음으로.



로라스는 웃음이 비죽비죽나오는 것을 참지못했다. 주의 신실한 종으로 기도를 멈추지 못하면서도 그 이에 관해서라면 어울리지않게 엉큼한 상상을 하는가 하면, 또 동시에 만남에대한 순수한 기대로 아이처럼 마냥 들떠올랐다. 가슴 언저리를 배회하는 손에서는 손 끝으로부터 진동이 오르고 있었다. 부디 성 발렌티노의 축복이 우리에게도 함께 하길. 드디어 육지의 끝의 끝으로부터 하얀 파도 위로 고동소리가 섞여 밀려들었다. 그랬다. 그가 오고 있었다.



드렉슬러는 부드러운 천 사이 감추어두었던 날선 면도날 하나를 끄집어내었다. 제 계산대로라면 내일 정오쯤 배는 항구에 도착할 것이고 제 집에가면 어쩌면 로라스를 만날지도 모른다. 이것은 열쇠를 주었을 때부터의 생각이다.



석 달동안 기른 머리는 적당히 넘겨 묶을 수 있는 길이까지 왔지만 거울을 보며 드렉슬러는 그것이 꽤나 꼴사납다고 생각했다. 설상가상으로 어중간한 길이의 수염은 몸의 긴 선과 어울어져 날도둑놈처럼 보인다. 이렇게 만나서는 저도 모르게 삼십육계 줄행랑을 칠테다.



되는데로 움켜쥐어 면도날을 세워 쳐냈다. 적당히 적당히 해야 멋이 난다. 저는 늘 이렇게 다듬었다. 머리는 이쯤. 항상 이쯤. 그리고 우묵한 접시에 면도크림을 개어 뜯어먹은 듯한 수염을 살살 밀어내었다. 사각사각. 억센 털을 깎아내는 철 소리가 피부 위의 진동으로 들린다. 단조로운 일상을 타고 생각들이 차곡차곡 몰려들었다. 2월 14일이라니. 로라스라면, 그라면 오늘이야말로 꽤나 로맨틱한 생각을 하고 있지않을까. 문득 떠오르는 수줍은 이미지 위로 무언가 말하고 싶은 입술이 웃음을 참고 꿈틀거렸다. 바-앙. 머릿속을 가득 채운 생각과 또 그 생각들의 위로 파도소리가 섞이며 배 경적 소리가 울렸다. 그러니까 지금 저는, 그에게 가고 있었다.



입항은 순조로웠다. 실려있던 짐들이 인부들의 손에 분주히 옮겨지는 사이로 가벼운 가죽케이스나 배낭등을 메고 승객들은 차례차례 하선하고 있었다. 드렉슬러는 그들 사이에 가만히 서서 이른 아침 안개의 뒤로 멀리멀리 시선을 두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옅은 태양 아래의 안개 뒤로 묘하게 익숙한 걸음걸이의 남자가 저를 향해 조금은 조급히 걷는 것이 보였다. 흐릿하게. 또 점점 뚜렷하게. 안개는 순식간에 개었다. 2월 14일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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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라스에게 객관적 사실이란 이렇다. 이 세상 모든 매혹적인 일이 눈 앞에 벌어진다고 해도 결국 제가 하는 일이라고는 그 아름다운 것들을 배를 채우듯이 게걸스럽게 집어삼켜 제 아귀같은 욕망을 잠시 진정시키는 정도이고 불행하게도 그 후의 욕심은 더욱더 커지기만 하리라는 것.


 제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잡아먹었다. 둘 사이에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그 광경을 보고도 어떤 불쌍한 여자와 결혼을 하여 저를 낳았다. 집은 엄격했고, 고상했으며, 또 품위있었다. 그는 이런 집에서 태어났고 이제는 그 빛을 잃어버린 귀족이란 이름으로 장식한 명예의 껍데기를 뒤집어 쓴 채 스스로의 규격에 맞는 인간다움으로 제 정돈을 마감하여 곧은 허리, 아름다운 걸음을 시간에 맞춰 옮겼다.


 격세 유전이라는 것은 굉장히 새롭고도 놀라운 발견이었다. 고결한 피와 더러운 피로 나누어지던 세계가 조금더 세분화되어 그 뿌리 자체도 찾기 힘들어졌으니 누군가 혼란으로 제 마음 깊은 곳의 지저분하고 역겨운 원죄를 덮어버리려했다면 그것은 굉장히, 또 천재적으로 성공한 셈이다. 이것은 드렉슬러의 객관적 사실이다.


 드렉슬러는 질병대책연구소의 수석연구원이다. 그의 업무는 새로운 발견에 대한 조언과 새로운 발견을 위한 연구, 또 제 불평을 쏟아놓는 것이다. 다행히도 일련의 일들에 맥락을 부여하는 것은 다른 이가 한다.


 며칠 전 드렉슬러는 파혼당했다. 양가의 부모와 약혼녀와 그녀의 사촌이 함께한 자리였는데 그의 직업에대한 관심으로 그녀의 사촌이 합석을 원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드렉슬러는 뭔가 아주 작고 못된 마음이 제 두뇌를 두드리는 것을 느꼈다.


 사실 결혼에대한 끝없는 불신과 제 선택과 인생에 대한 회의로, 일에는 전혀 도움 되지 않는 여러가지 생각들에게 시달리던 참이었으므로 그는 잠시간 시간을 두고 빙그레 웃었다. 준비한 짧은 브리핑은 너무나도 성공적이어서 약혼녀측의 어머니는 제가 앓던 지병으로 인한 가벼운 쇼크로 기절해버렸고 자신은 며칠 뒤 가문에서 제명되기에 이르렀다. 그 후, 제 물건이 든 네댓개의 상자들을 작은 하숙집으로 옮기면서 드렉슬러가 한 반응이라고는 또다시 빙그레 웃으며 어깨를 들썩인 것 뿐이다.


 "이게 내 일인걸."


 업무에 시달리던 비서가 또 그만두었다. 기왕이면 제대로 된, 조금더 일처리가 빠른, 아무것도 묻지 않지만, 그래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 지 정도는 알아듣는. 그간도 온갖 불평의 연속이었지만 이번엔 소장이 뛰어내려왔다. "한 명만 더 관뒀다가는 자네를 내 옆자리에 앉혀놓고 일을 시키겠어!" 소장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소리를 질러댔다. '네, 알겠습니다. 라고 하면 되겠지.' "하얗고 붉고 분홍빛의 기름이 진 게 굉장히 돼지 같이 생겼군." 침묵이 흘렀다.


 새로운 비서가 채용됐고, 또다시 보조연구원이라는 타이틀로 책상에 명패가 달렸다. 드렉슬러는 제 책상 맞은 편 밤색 나무탁자 위, 흰종이에 타이핑되어 투명한 플라스틱 판에 보잘 것 없이 끼워져있는 그 명패를 스쳐지나가다가 마치 춤을 추듯 부드럽게 미끄러져 뒷걸음질쳤다.


 "알베르토 로라스입니다."


 사촌이었다.  


 "지원했다고."


 "사실입니다."


 드렉슬러는 로라스의 곧고 푸른 눈이 몹시 서늘하고 차갑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것은 깨질 듯한 살얼음보다는 너무 투명하게 바닥이 들여다보여 깊이를 알 수 없는 호수를 연상시켰는데 순간 찰박-하고 호수의 물이 튀는 장면이 떠오르자 드렉슬러는 로라스의 두 눈이 정말로 차가운 것은 아닌지 두 손에 쥐어 확인해보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내가 허락을 할 것 같나?"


 "사정을 들었습니다."


 소식은 일종의 기회였다. 언젠간 발현될 제 유전병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일하는 것. 적과의 동침. 제 사촌 여동생의 결혼 소식은 그저 그런 의미였다.


 로라스는 몸단장을 했다. 흠 하나 없이 마음에 들어야했다. 이것은 지금껏 제가 만났던 기회중의 가장이다. 불청객의 입장으로 종잡을 수 없이 까탈스럽다는 그에게 밉보여서는 안되었다. 그래서 그저 그런 마음이었다.


 시체, 해부학 자료, 흑백으로 쏟아지는 내장들, 사실은 뇌조각인 것과 그 위에 꽂혀있는 고정핀, 세포조각의 상호작용들을 그는 굉장히 짧고 명료하게 집어냈다. 오분. 아마도 정확히 오분. 빠짐없이 치밀하게 짜여져 제 아버지의 만류를 배경음악으로 그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로라스에게 이 날은 굉장히 강렬한 경험으로, 그 오분 동안 그는 순간적으로 눈 앞이 시뻘개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붉은 색은 선명하고 아름다운 빛으로, 선연한 두려움과 치솟는 기쁨이 서로 얽혀들어 가득 차올랐다 순식간에 사라졌다. 로라스는 드렉슬러에게서 어떤 이미지를 받아냈다.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의 선택은 최악이었던 셈이다.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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