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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지옥이 있다면 그 곳은 아마 제가 있는 곳일 것이다. 제임스는 늘 그런 생각을 했다. 저는 악의 화신이요, 불운의 상징이니 욕심으로 모든 걸 그르치고 제 인생의 고삐마저 쥐지 못한 헬리오스의 아들 파에톤처럼 업화의 불꽃에 타죽을 것이다. 아니, 저는 신의 아들은 커녕 가장 저열하고 천박한 자의 다리 사이에서 빛을 보아 그의 아들처럼 피부가 불에 그을려 탈새도 없이 녹아사라질테지.





제임스는 손을 꾹 쥐었다 다시 폈다. 아무것도 없었다. 늘 욕심을 내도 정작 원하는 것은 가질 수가 없었다.





언제나 제 뒤는 실이 쫓아다녔다. 신뢰, 기대 같은 것들을 노인은 절대 사람에게 거는 법이 없었다. 그는 사람을 세상에서 가장 구역질나고 지저분한 생명체로 분류했다. 손은 깡말라 살가죽 아래로 뼈가 고스란히 도드라졌다. 미라처럼 바싹 마른 손가락 사이 사이, 실은 얼기설기 엉켜 복잡한 그물 모양을 만들었다. 그는 마치 사람보다는 거미나 지네 같았다. 곤충도 아닌 벌레. 그 자체로 조금은 거부감이 드는 것들. 침대 위에서 탁해진 눈으로 노인은 세상을 잘도 보았다. 그는 그 위에서 여전히 사람을 죽였고 체스를 두듯 말을 움직였으며 원하는 것이라면 언제나 제 손아귀에 잡아두려했다. 욕심 많은 늙은이. 지는 노을 아래서 제임스는 괜시리 구둣발을 땅에 비볐다. 갈 시간이 되었다.





커튼을 치는 소리가 둔탁하여 거슬렸다. 가스등이 희미하게 빛을 냈고 이것을 끄면 어둠이다. 로라스는 침대에 걸터 앉아 부싯돌을 쥐었다. 옷도 갈아입지 못한 채다. 그러나 부싯돌은 한참을 향 위에서 헛돌고 있었다. 무언가 잊어버린듯 제 머릿속 또는 마음 한 구석이 비어서, 또는 그 빈 공간이 공허한만큼 향 끄트머리의 공간엔 공기가 없는 것도 같았다.





앞으로 10분. 혹은 9분 17초. 혹은 8분 그리고 45초. 째깍째깍, 커튼까지 꽁꽁 싸맨 방은 시계소리와 제가 부딪히는 부싯돌 소리로 가득 찼다. 제대로 되지 않는 것은 제 두려움 때문인가, 아니면 그렇게 될 일이기 때문인가. 로라스는 잠시 부싯돌을 내려놓고 땀이 가득찬 손을 쥐었다 펴보았다.성공하면 살고 실패하면 죽는다. 그러나 그것이 마음에 걸리는 것은 아니었다. 도박으로 대령으로부터 15일의 연장을 거부한 만큼, 약은 분명 성공할 것이다. 겨우 보름전에 만난 남자를 로라스는 무한히 신뢰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조차 제 신뢰가 어디서 온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대령으로부터 전해들은 그의 과거 때문인지, 스스로를 몰아붙여 결국엔 제 코끝에 몰약 냄새를 남겼기 때문인지.





드렉슬러는 늘 긴장을 하고 있었다. 피곤한 몰골로 이성이 제 머리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 탓에 몇마디 말이 나오면, 그는 늘 후회하듯 입을 꾹 물었다. 거의 자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 때는 분명 옅게나마 잠들어있었어. 그 때의 바지천 아래로 느껴졌던 허벅지의 온기와 그 단단함, 저를 감싸고 있던 손, 코 끝을 맴돌다 드디어 들이쉬게 된 그 따뜻한 겨울의 냄새. 부싯돌이 부딪히고 향에 불이 붙었다.





-





날이 저문다. 붉은 해의 꼬리가 길고 저는 이미 삶에 미련이 없었다. Padre. Padre. 리처드는 그 날의 일들을 이 단어와 함께 주워 섬겼다. 마지막 태양 아래에서의 웃음을 기억한다. 떠나는 뒷모습을 보지 못했는데도 제 곁으로 날아든 새에게 안락한 새장은 의미가 없었다. 그렇게 믿었다. 리처드는 결국 반지의 알을 돌렸다.





-







로라스는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회색의 뿌연 연기에서는 지하에서의 냄새가 고스란히 났다.







-



아무래도 리처드가 이상했다. 토마스는 제 방에 우두커니 앉아 내내 그 생각을 했다. 리차드는 언제나 침착하고 냉정한 사람이다. 그가 이상해질 때면 그곳엔 언제나 드렉슬러가 있었다. 이번의 그는 이상하다기보단 미친 사람처럼 굴었다. 필히 일이 생긴 것이다. 그것은 확실했다.



토마스는 자켓을 다시 걸치고 목도리를 둘러맸다. 약국에서 술이 깨는 약을 사다가 다시 얘기를 시작해볼 참이다. 꼭 드렉슬러 때문이 아니더라도 리처드는 영국에 와서 가장 오래 알고지낸 친구이기도 하다. 이렇게 그를 방치할 수는 없지않은가? 그렇게 알 수가 없는 불길함이 엄습했다. 오늘은 노을이 붉고 기네. 이 때문일지도 몰라. 토마스는 약봉지를 고쳐쥐며 중얼거렸다.



-



연기가 가시질 않고 어느 새인가 어둠 뿐인 공간에서 희미하게 눈 앞이 보였다. 꿈 없이 깊이 잠든 걸까. 그는 성공한 건가. 로라스는 제 손을 쭉 뻗어 손바닥을 이리저리 뒤집어보았다. 무언가 달라진 것은 없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몸을 일으켰고 침대에서 발을 내렸다. 바닥이 없었다.



낙하.



비정상적인 근육의 움직임.



떨어짐.



발 아래의 깊은 어둠은 중력만이 남아 몸을 빨아들였다.



-



"탕-!"



총소리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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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자면 그는 일종의 로맨티스트다. 별을 쫓고 늘 끊임없이 상상하며 움직여 현실을 살아가지만 그 자리에 머물러 살아가는, 고인 샘물이다.

 

어느 순간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모든 것이 사로잡히는 때가 있다. 흔하지 않지만 흘러가버릴, 아주 단순하고도 중요한 생각 말이다. 다리오 드렉슬러에게 이것은 별마저 저버린 새벽녘에 제 서재의 파일철 위에 나란히 새겨진 듯 적힌 제 이름을 본 순간 떠올랐다.

 

일종의 나열에 그는 순식간에 질려버리고 말았다. 정말로 깨달아버리고 만 것이다. 지겨워서 죽어버릴지도 몰라. 이것은 전쟁의 시작 전에 습관처럼 중얼거리던 말이다. 그는 고개를 들어 제 주변을 둘러보았다. 변하지 않는 일상, 변하지 않을 제 자리, 변하지 않는 세상, 변하지 않을 제 생각.

 

1934. 34. 달력은 제 나이를 떠올리게 했다. 몇 번이나 이런 순간이 찾아왔었지? 그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시계는 계속 움직였다. 어린 시절보다 빠르게. 또 의미 없이. 끊임없이 떠오르는 아이디어들. 생각들. 의욕. 성취. 갈망. 욕구. 저를 살아나가게 했던 것들이 몸을 불렸다.

 

뻔뻔하기 그지없이 당연스럽게도 그런 것들에 의지해 저는 살고 있었다. 수없이 많은 이들이 죽고 죽어나가는 상황 속에서 몇 번인가 시체를 밟고 전진한 적이 있다. 얇은 천과 그보다 두꺼운 철판, 다시 철판, 천조각, 그 아래의 살덩이. 그 감촉을 기억하느냐 묻는다면, 아니. 3의 눈을 통할 때는 비참하고 괴로웠던 일들이 정작 바로 제 발 아래에서는 하나의 과정이 되었다. 그 좋은 머리로, 그 비상한 두뇌로 기억해내는 것은 효율을 위해 걸러진 필요한 데이터들뿐으로, 저는 정말 삶을 살고 있는 것인가. 나는 운명을 살아간 것이 아닌가. 최악이었다.

 

그는 자존심이 강했다. 모든지 스스로 결정하지 않으면 안됐고 그래서 가문에서 퇴출당했으며 그래서 그것이 아무렇지도 않았다. 새벽의 생각은 참으로 무서운 것이었다. 그래서, 무언가가 내 삶을 살고 있다면. 사로잡힌 생각은 털어내기도 전에 스며들었다.

 

상냥한 목소리가 등 뒤로부터 굳어버린 어깨를 감쌌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제 이름이다.

 

다리오 드렉슬러는 알베르토 로라스가 좋았다. 명백하게 로라스는 드렉슬러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는 제 욕망을 참아는 냈지만 숨길 줄을 몰랐다. 그리고 그것에 눈이 어두워져 제 앞을 잘 보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드렉슬러가 제 마음을 숨겨놓고 꺼내지 않는다는 것을 몰랐다. 참아내지 않아도 좋을 관계가 되어서도 그것만큼은 몰랐다.

 

날 사랑해?”

 

멀뚱히 저를 쳐다보는 시선에 당혹스러워하던 로라스의 얼굴에 온화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것은 정말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는 눈가를 휘고 입꼬리를 끌어당겨 환하게 웃었다.

 

그래. 사랑하네.”

 

로라스는 제가 그 말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쁘다는 듯이 굴었다. 드렉슬러는 그의 감정들이 시간에 따라 옮겨 다니는 것을 자세히 보았다.

 

사랑하네. 말을 마치고도 사랑이라는 단어는 입안을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로라스는 드렉슬러가 몹시 좋았다. 그의 첫인상은 처음에는 그저 그랬다. 늘 변덕스럽고 제멋대로에 이기적으로 보였으니까. 하지만 그곳에는 맥락이 있었다. 그는 그저 자기자신을 확신하는 사람이었고 스스로를 믿었으며 그만큼 사랑할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당위성을 따지자면 그렇다는 것이고 사랑에 빠진 것은 그저 저항할 수 없는 욕망에 의한 것이었다. 한 번은 왜 저를 사랑하게 됐느냐는 물음을 받은 적이 있었다. 로라스는 그 질문에 대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것은 그저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 로라스는 아무 경험도 없는 신출내기 기사도 아니었고, 여자를 모르는 갓 입학한 아카데미생도 아니었다. 그는 매력적이었고 신사적이었으며 또 언제든지 그를 원하는 여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기사도에 관해 고루하게 적혀 내려진 삼류 연애소설처럼 사랑을 나눌 기회가 충분히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사랑의 종류 중 하나였음에도 만족스럽게 뜨겁지 않았다. 그 끝에서 그는 늘 제대로 된 사랑이 찾아오리라고 믿었다.

 

이로써 로라스 역시 로맨티스트인 셈이다. 물론 드렉슬러와 조금은 다른 종류의. 로라스는 제가 그에게 제 사랑을 고백하던 날을 떠올렸다. 드렉슬러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어떻게 제게 사랑을 고백할 수 있느냐 물었다. 그 질문에 로라스는 드렉슬러의 사회적 위치, 성별, 또 세상의 편견에 관해 자신의 굳은 다짐을 설명했다. 드렉슬러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음을 털어내듯 웃고는 다시 말했다. 고백으로 잃어버릴 우리의 관계에 대한 두려움을 어떻게 이겨냈느냐. 그것이 그의 물음이었다. 로라스는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고는 오른손을 왼 가슴 위에 얹어 답했다. 내 온 마음으로.

 

관계는 섹스가 키스보다 빨랐다. 육체적 욕망의 뒤를 드렉슬러는 기다린다고 했다. 제 육체가 로라스에게 매력적이었을 것이라 기대하기는 어렵지만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지 않겠느냐, 침대 위에서 드렉슬러는 농담조로 웃었다. 로라스는 그 모습 뒤의 두려움을 읽었다. 그가 겁을 내는 것은 처음 보았다. 두려움의 근원지를 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자체로 묘하게 흥분이 되었다.

 

첫 사정으로 드렉슬러는 처음과는 달리 굉장히 부끄러워했다. 흥분의 열기인지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어서는 지금처럼 또 가만히 저를 올려다 보았다. –둘의 첫 체위는 정상위였다. 로라스는 여전히 이것을 제일 좋아한다.- 드렉슬러는 제가 어떠했느냐고 가만히 물었다. 마치 제가 그를 강간한 기분이 들어 로라스는 순간 죄책감에 빠져들었다. 그것은 순식간에 제 영혼을 물고 흔들어댔는데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 있을만한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투박하지만 긴 손가락이 우아한 그의 양 손이 제 가슴팍을 밀어내려 들었다. 로라스는 당혹으로 그 양손을 베개 위로 내리누르고 정신 없이 그의 얼굴 곳곳에 입을 맞추며 드렉슬러에게 키스를 애원했다.

 

그리고 드렉슬러는 그 애원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로라스의 생각보다 드렉슬러는 그를 먼저 사랑하고 있었다. 그저 숨기는 것이 더 능숙했을 뿐으로, 제 속도 오랜 시간 동안 까맣게 타 들어가고 있었다. 제게 외면은 타고난 것처럼 익숙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과는 늘 맞서 싸워왔기 때문에 저도 몰랐던 일이다.

 

사랑. 드렉슬러는 이 단어가 껄끄럽기 그지없었다. 그 앞에서 저는 저항도 해보지 못한 채 끌려들어가고 만다. 로라스를 사랑하고 있느냐면 그랬다. 너무나 열렬히 사랑하여 제 마음을 뱉어낼 용기조차 내지 못할 만큼 사랑했다. 자신은 용맹했고 똑똑했으며 지적이고 근사했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너무나도 겁쟁이어서 놀랍게도 저는 한 번도 로라스에게 사랑한다 말한 적이 없었다. 그에 반해 로라스는 어떠한가.

 

나는 자살할 거야.”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편히 기대며 드렉슬러는 늘어지듯 말했다. 로라스는 큰 충격으로 떠듬떠듬 입을 열기 위해 입술을 달싹이며 한 발짝 앞으로 나왔다. 개의치 않고 드렉슬러는 말을 이었다.

 

만약 내가 자살한다면,”

 

그만.”

 

낮은 목소리가 떨림을 가득 안고 흘렀다. 평소보다 묵직한 소리는 명령이었고 곧 절망이었다. 다시금 입이 열리자 결국 로라스는 빠르고 힘 있는 걸음으로 드렉슬러에게 뛰어들었다.

 

그만. 그만해.”

 

큰 소리가 났다. 고르지 못한 숨이 쉭쉭거렸고 드렉슬러는 그 소리가 제 심장부근까지 저릿하게 하는 것을 알았다. 밀어내는 손길에 로라스는 생각보다 쉽게 밀려났다. 그는 절망으로 잔뜩 일그러진 눈을 한 주제에 드렉슬러를 안심시키려 억지로 웃고 있었다. 드렉슬러는 이것으로 로라스가 제게 완전히 매여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꼈다. 그래서 더욱 더 말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왜 그런 소리를 해. ? 그만하게.”

 

로라스의 눈 앞의 드렉슬러는 첫날의 침대 위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다만 이번에 드렉슬러는 스스로 로라스의 목에 팔을 감아 그를 다시 힘껏 제 품에 안고 속삭였다.

 

만약 내가 자살한다면 알베르토, 그건 널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야.”

 

드렉슬러는 로라스의 정수리에 몇 번인가 입을 맞췄다. 성스러운 의식처럼, 이러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그것은 그간의 무엇보다도 자연스럽게 일어났다.

 

사랑해, 알베르토. 사랑해.”

 

드렉슬러는 로라스를 사랑했다. 스스로를 사랑하는 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그 새벽 내, 그리고 그 아침, 점심과 저녁까지 그는 그간의 제 결정들에 관해 끊임없이 고민했다. 생각이 갈무리되기 시작하자, 그것이 먼 미래일지 가까운 이래일지는 알 수 없었음에도 그는 이미 이 생의 끝에서 스스로가 자살하고야 말 것임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갈망하는 자유를 얻는, 가장 근사치에 가까운 마지막. 자신은 이제는 이것을 열망할 것이다. 그것은 예견과 같은 종류의 깨달음이었다. 그리고 이 잔인한 계산 속에 로라스가 서있었다. 제 사랑은 그에게는 마지막 배려가 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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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오전의 일이다. 드렉슬러가 다녀간 날 이후로 리처드는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음식에 넣는 주류점의 제일 싼 와인부터 아껴놓았던 최고급 양주에 이르기까지 가게 내의 술을 모두 동 낼 기세로 그는 눈을 뜨면 술부터 찾았다.


그만 좀 드세요.”


보다못한 토마스가 한마디 하자 리처드는 눈을 부릅뜨고 술방울 맺힌 콧수염을 덜덜 떨었다. 마셔도 마셔도 술이 부족했다. 그러니까, 잊을 만큼은 아니었다. 저는 아무리 알코올을 들이부어도 정신하나만큼은 멀쩡했다. 아마 이것은 녀석도 그럴 것이다. 아니, 녀석은 스스로가 맨정신이 아니기를 절대 원하지 않을 것이다.


니미.”


리처드는 나무잔을 테이블에 강하게 내리쳤다. 손이 징징 울리는 것이 취기로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몽롱한 기운에 더 화가 치밀었다. 그는 그렇게 몇 번이나 나무잔을 휘두르다가 돌벽에 잔을 집어던졌다. 결국 잔은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결대로 박살이 나 버렸다.


그 소란에 토마스는 잠시 움츠러들었다가 가게 한 켠의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챙겨 바닥을 쓸었다. 리처드는 일주일 전부터 평소대로 물건을 주문하지도, 손님을 받지도, 일을 알선하지도 않고 있었다. 처음 며칠간은 제대로 자질 못하는 것 같더니 삼일 전부터는 음식도 입에 대지 않고 오롯이 술뿐이다. 토마스는 한숨을 쉬었다.


도대체 왜 이러시는데요. 요 전부터 계속 술만 드시잖아요.”


리처드는 그 다정한 어조에 심술맞은 늙은이마냥 콧잔등을 끌어올려 얼굴을 찌푸렸다. 콧방울을 실룩거릴 때마다 붉은 뺨 위로 검버섯과 주름이 꿈틀거렸다. 거친 숨 사이로 술냄새가 지독히도 났다.


노망이 났나보지.”


리처드는 제 풀에 지쳐 구석지의 바 의자에 올라앉았다. 높은 의자로 다리가 덜렁거리자 주먹으로 무릎을 몇 번 내리쳤다. 당연한 듯이 통증이 둔했다.


부서진 파편을 나무상자에 담아넣고 토마스는 리처드의 옆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항상 굳건해보이던 노인은 정말로 노인이 되어 왜소하고 힘 없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이 보였다. 세월을 쥐어온 거친 손이 옹골차게 주먹을 쥐고 무릎 위에서 떨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거죠?”


토마스는 제 허벅지에 가슴팍을 꼭 붙인채 그 사이로 고개를 밀어넣어 몸을 웅크렸다. 피가 머리로 몰렸고 시야가 어둑해졌다.


그 사람, 이상해요.”


머뭇대듯 느릿느릿 흘러나오는 말에 리처드가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그간 안 하던 짓을 해요. 그 남자 때문일까요?”


그간의 피곤으로 눈꺼풀이 느리게 움직였다.


지랄은.”


리처드가 말했다.


그런가요.”


토마스가 말했다.


녀석이 좋으냐.”


리처드의 말에 토마스의 입가에 미소가 잔잔히 떠올랐다.


. 무척요.”


리처드는 토마스를 힘껏 떠밀었다. 외다리 의자가 휘떡거렸고 토마스는 그만 바닥에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미친놈.”


리처드는 말을 씹어뱉었다.


미친놈! 미친놈!”


소리는 경멸이 어려 쩌렁쩌렁 가게 안을 울렸다. 넘어질 때의 큰 진동으로 외등이 좌우로 흔들거려 이 때마다 리처드의 얼굴이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했는데, 이것이 마치 그가 꼭 지옥에서 걸어나온 사자같이 보이게 했다.


녀석은 독이야! 너같이 약한 놈은 단숨에 죽어버리는! 네 놈한테선 풋내가 나. 덜 여물어 나는 비린 냄새 말이다. 이 멍청이. 멍청한 녀석. 너같은 놈이랑 같이 있는데 대체 나보고 어떻게 제정신으로 있으란 말이냐!”


한참을 씩씩거리다 폭발하듯 터져나온 말에 토마스는 그것이 무슨 뜻이냐 묻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일에 어리둥절하여 벗겨진 안경을 겨우 고쳐썼을 뿐이다.


돌연 리처드는 빗자루를 들고 돌아와 토마스를 내려치기 시작했다. 치매! 내가 치매가 왔다! 난감해하며 왜이러시느냐 반복해 묻는 그 억울한 목소리에 리처드는 벌건 눈을 하고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나가라! 나가라!”


결국 토마스는 매타작에 쫓겨 문 밖을 나섰다. 눈 앞에서 문이 쾅 닫혔다.


나중에 다시 올게요! 술 그만 드시고요!”


벌게진 팔뚝과 잘못 맞아 피가 나는 이마를 닦으며 토마스는 그렇게 말했다.


이 멍청한 놈아! 다신 오지마!”


대꾸는 고약했다.


리처드는 문틈새로 토마스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마지막까지 머뭇거리다 한참이 지나서야 발을 뗀다. 미련한 녀석. 내일까지는 아마 오지 않을테다. 그럼 그것으로 됐다. 그는 테이블 위의 와인병을 들어 병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


. 불안은 형체가 없었다. 이제는 살을 저미던 찬바람이 누그러들고 호수의 얼음이 더이상 단단하지 않듯이 어쩌면 곧 내일 다시 봄일 것이다. 제 목숨값인 해는 점점 이르게 뜬다. 각오한 죽음으로 그의 곁에서 눈을 감는다면 저는 행복할지도 몰랐다. 사실 로라스는 오늘 그 지하의 방을 제 무덤으로 정했다. 그래서 밀어내는 손길로 무엇이 불안한지도 모른채 그는 초조해했다.


그러니까, 안녕. 마지막 말이 안녕. 제가 그 말에 대꾸를 했는지, 했다면 그의 얼굴을 보며 했는지, 아니면 모든 것이 자신의 착각인지. 로라스는 차 안에서 내내 그 생각을 했다. 울 것 같았던 젖은 파란 눈을 떠올렸다. 깊이 젖어든다. 상상은 쉽게 빨려들었다. 어디까지가 제 상상이고 어디까지가 사실인지에대해 로라스는 스스로가 끔찍할 정도로 계속해서 생각을 이었다.


괴로웠다. 매연을 내뿜으며 차가 달려나갈수록, 늘 잠들던 곳과 멀어질수록, 차 창으로 주홍빛 가로등불이 저를 스쳐지나갈수록, 숨이 메스껍고 두근거리는 두통으로 괴로웠다. 부족한 잠이야말로 지난 보름간 제가 견뎌온 고난이었다. 로라스는 떠오르는 셔츠의 바스락거림으로 양 손을 맞대어 손 끝을 비비고 숨을 들이마시며 방금의 향을 좇았다. .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꿈을 꾸라고 했다. 우선은 잠을 자야했다.


-


또 밤. 몇 번이나 읽어 헤어진 가죽책에 종잇장을 끼워넣었다. 축축한 제 손으로 표지의 색이 변한다. 어쩌면 남자의 우유부단함도 다 제 탓일테다. 확신없이 헤매는 불쌍한 녀석. 결국은 제 짝이 아니었던 것이다. 드렉슬러는 애써 그런 생각을 했다.


그 선실에서의 커다란 그림자에 눌려 저는 그 때부터 전혀 자라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걸어온 모든 길은 그저 욕망에 쫓겨 몰리는 삶에 불과했다. 제 재능과 기술과 힘과 능력. 심지어 충동은 가끔씩 제 눈을 뽑아버리라 부추겼다. 하루가 돌아 다시금 밤이 되면 물 속에 이젠 그만 손을 담그라고 기억 속 바다 밑의 인어가 속삭였다.


그 때는 결국 도망치고 말았다. 방 안에 우두커니 앉아 떠올리는 바다는 밤하늘처럼 멀고 또 가까웠다. 그것은 늘 어딘지 모르게 그리웠고 어딘지 모르게 두려웠다. 드렉슬러는 제 머릿속에서 제가 난 곳을 지나 삶을 겪고 고통을 반복해 살았다. 어느 날, 리처드가 말을 걸었다.


이 곳은 별이 빛나는 쓰레기장이야. 가장 노후해서 이 근방에서 제일 맑은 곳이지.


하늘은 쏟아질 듯 가까웠다. 밤하늘은 빛나고 있었다. 검게, 또 검게. 그는 저를 정말로 싫어했다. 그리고 또 지금 제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을테였다. 그저 어중간한 동정심과 제 능력에 대한 경이 때문에 흔들리는 사람들중 하나일 뿐으로 그가 저에게 특별해진 것은 하나, 이 쏟아질 듯한 하늘 때문이었다. 서녘으로 찬 바람이 불어왔다. 저는 살아있었다. 그것이 중요했다.


조그만 구멍 사이 별빛이 새어들었다. 밤하늘 아래에서 드렉슬러는 문득 서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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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는 방금까지 로라스가 앉아있던 자리에 고요히 시선을 얹었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저는 언제나 중간 다리일 뿐. 지금도 중요한 것은 드렉슬러가 무엇을 원하느냐, 그것 뿐이었다. 리처드는 이번 만큼은 드렉슬러가 제 앞길을 정하도록 내버려둘 심산이었다. 그는 늙었고 지쳐있었다. 사랑하여 미워했던 제 동생은 죽었다. 너무 오랫동안 누군가를 미워했고 너무 오랫동안 이 곳을 떠나지 못했다. 저는 말하자면 망령인 셈이다.


목숨 값을 저울질하러 일전의 남자가 찾아왔다. 덕분에 이제는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았다.


노인은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




로라스는 섣불리 문을 두드리지 못했다. 어두운 밤길을 달리는 동안 유난히 자동차가 돌바닥 위를 구르는 느낌이 선명했던 탓이고, 제가 오늘 따라 정신이 맑고 예민한 탓이고, 어쩌면 오늘이 마지막인 탓이다. 녀석이 무언가 부탁을 하던가. 노인은 그렇게 물었다.


그렇게 앞을 몇 분 쯤 서성거리자 기척 없이 문이 열렸다.


눈 안에 남자가 가득 찬 것도 잠시 드렉슬러는 미련 없이 뒤를 돌아 늘 앉던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유향을 태운 냄새가 방 안에서 약하게 났다.


방은 예전처럼 다시 어두워져 있었다. 테이블 앞에 낮게 달린 가스등만이 희미하게 방을 비췄고 늘 제가 눕던 곳은 어둡기만 했다. 마치 빛이 닿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걸음이 쉬이 떨어지지 않아 로라스는 방문만을 겨우 닫고 문앞에 덩그러니 섰다. 눈썹이고 머리카락이고 제멋대로 자라있는데도 옆모습이 단정하다. 눈만이 여닫히다 입술이 열렸다.


오늘이 마지막이네.”


흐르는 소리에 로라스는 화들짝 놀랐다. 몸만을 비틀어 드렉슬러는 로라스를 올려다 보았다. 한 손은 제 다리 위에 한 손은 가죽책 위에 얹은 채다. 로라스는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드렉슬러는 별 일 아닌양 서랍장 속에서 검은 벨벳주머니를 꺼내 쥐었다. 단단히 굳은 로라스의 얼굴이 우스울 따름이었다.


놀랐어?”


드렉슬러는 슬며시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언제부터 알았나.”


물음에 웃음이 진해졌다. 답안지를 같이 들고 오지 말았어야지. 그는 속으로만 생각했다.


요새 꿈은 꿔?”


둘 사이의 거리는 이제 두 뼘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등 뒤의 불빛으로 로라스의 얼굴에 그림자가 지자 드렉슬러는 웃기를 멈췄다.


사실은 걱정했어. 오늘 네가 혹시라도 늦게 올까봐서.”


만지작거리는 주머니 속에서 달그닥달그닥 돌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오늘은 재워줄 수가 없었거든.”


드렉슬러는 손을 뻗어 로라스의 손을 끌어당겼다. 펼쳐진 손바닥 위에 주머니를 쥐어주고 짙은 음영으로 푸른기가 사라진 눈을 바라보았다. 기억 속 검은 바다가 다시금 일렁거렸다.



"네가 필요한 건 거기 다 들어있어. 전부."


드렉슬러는 더이상 로라스의 눈을 마주보지 못했다.


"불을 붙일 부싯돌과 밑받침까지. 커튼을 치고 방문을 닫아. 회색 연기가 자욱해지겠지만 겁먹지말고."


어거지로 또박또박 뱉어내어졌다. . 타죽는다. 단어들이 우물거리려는 것에 드렉슬러는 입술에 힘을 주었다. 순간 커다란 손이 주머니와 함께 쥐어졌다. 굳은 살로 다져진 손끝은 다정하게 그 위를 쓸었다.


-. 알베르토.


드렉슬러는 로라스의 품 속으로 뛰어들었다.


좋은 꿈 꿔라.”


끌어안기자 참을 수 없어져 힘껏 마주 안았다. 뺨이 제 귓가에 스치고 고집이 찬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로라스는 드렉슬러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손 끝에 감기는 차가운 가죽느낌이 불편했다.


파헤치듯 독한 냄새의 가죽자켓의 틈을 젖혀 얼굴을 파뭍고 숨을 들이마셨다. 로라스는 이어 자켓을 벌려 얇은 셔츠 위로 드렉슬러를 조금 더 끌어당겼다.


자네에게서 봄바람에 실린 겨울냄새가 나.”


들어올려진 고개는 눈이 부시게 반짝거려 드렉슬러는 키스하려는 입 위에 손바닥을 씌웠다.


드렉슬러는 자신의 손등 위에 입을 맞췄다. 키스하듯 부드럽게 핥았고 장난치듯이 살짝 깨물기도 했다. 그 부드럽고 장난스런 입맞춤이 손등 위에 내릴 때마다 입술과 맞부딪히는 맨 살갗에 로라스는 숨이 차 헐떡거렸다.


제 숨으로 축축해진 손바닥에 입술을 묻고 로라스는 눈을 감았다. 단전부터 가슴까지 잔떨림이 올랐다.


네가 딩고는 아니잖아.”


그제야 젖은 눈동자가 보였다.


작은 선물을 준비했어.”


드렉슬러는 로라스를 끌어당겨 이마에 키스했다. 그렇게 소근거렸고 조금 웃었다.


메리제인을 조금 넣었어. 좋은 꿈을 꿀 수 있도록 그녀가 도와줄 거야.”


그는 괴로움으로 일그러진 얼굴에 울 것 같아 조금 더 웃었다.


떠나면 안 돼.”


소리는 희미하기만 했다. 로라스는 주먹을 움켜쥐고 같은 말을 몇 번 더 힘을 주어 말했다. 떠나면 안 돼. 떠나지 말게. 떠나면 안 돼. 몇 번을 반복해도 마찬가지로 소리는 힘이 없었다.


시간이 없어. 이제 다 됐어. 가야 해.”


드렉슬러는 로라스를 방문 밖으로 밀어내기 시작했다.


금방 돌아올 걸세. 눈을 뜨자마자 달려올테니까,”


약 때문에 어지럽고 목이 좀 마를 거야. 자기 전에 아무것도 먹지말고.”


조금씩 뒷걸음질 치던 로라스는 드디어 문을 움켜쥐었다.


떠나면 안 되네. 꼭 다시 올테니까.”


오지마. 망설임으로는 할 수 없는 말이 있었다. 소리를 입에 물어 삼켰다. 날카로운 통증으로 찢어질 듯한 곳은 기도였으며 가시가 난 것으로 심장에 공기가 걸리는 듯하여 괴롭기 짝이 없었다.

오지마라. 오지마라.


저를 보고 웃을 로라스의 얼굴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저를 저주하거나, 제 자신을 저주하거나. 오열로 저를 슬프게 할 것이다.


알베르토.”


로라스는 부여잡은 문을 놓지를 못했다. 몇 번을 힘을 주어 되뇌인 문장보다 오히려 제 이름은 무겁고 나지막했다. 이름. 나는 그래. 아직, 자네 이름. 미는 손에 힘없이 가슴이 휘청거렸다. 드렉슬러는 로라스를 밀어내는 것을 그만 두었다.


그래. 네 맘대로 해. 하지만 정말, 정말 시간이 없어.”


이제 어조는 애원에 가까웠다. 드렉슬러는 제 가슴 속에 울먹거리는 것을 애써 삼켜내고 미간을 찌푸렸다. 입가는 일그러졌고 이가 악물렸다. 이 이상은 보는 것이 고통이었다.


일이 뒤틀리면 다시는 네놈 얼굴 같은 건 보지않을거야.”


돌아오면….”


의미없는 다짐 대신으로 로라스는 입을 열었다. 머뭇대는 것에 지친 드렉슬러의 한숨에 입술이 달싹였다.


돌아오면, 다시 한 번 무릎을 빌려주게.”


어색한 미소가 걸린 얼빠진 얼굴에 드렉슬러는 빠르게 눈을 깜박였다.


그래….”


그렇게 하자. 드렉슬러는 제 엄지로 검지를 문질렀다. 그렇게 하자, 알베르토. 눈이 정신없이 깜박였다.


돌아오면, 돌아오면….”


이어지지 못한 말에는 조금의 빈틈도 없었다. 드렉슬러는 마지막으로 로라스를 밀어냈다. 손이 문고리를 놓치고 서서히 문이 닫혔다.


좋은 꿈 꿔라.”


안녕. 말꼬리가 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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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은 불안한 정서로 감상이란 이름 아래, 나는 또 아름아름 걷는다. 적막한 심상은 헤아릴 길이 없어 비어버린 곳에 나는 그렇게 어거지로 노래를 흥얼거렸다. 자, 모두 다 잊어버리자.



 나는 이런 내가 물린다. 추억에 취해 단 것을 잔뜩 집어먹은 성인처럼, 일주일 내내 먹어치워야했던 첫 라자냐처럼, 그리고 끈질기게 뛰어대는 이 고동소리처럼 나는 내가 물린다. 그런데 너는 왜 이리 지겹지도 않은지.



 너는 참 음식을 정갈히 먹는다. 의자에 기대 묶여 자세교정을 받았던 꼬마시절이 생각날 정도로 바른 자세로, 흐트러짐 없이.



 스프에 빵을 찍어 입에 넣다가 힐끗 그 반듯한 얼굴을 훔쳐보았다. 손가락에 스프가 묻고 입가에도 묻었다. 스프가 묻은 손가락을 쪽쪽 빨았다. 너는 이쪽을 쳐다보지도 않는다.



 더운 여름. 영국의 습기는 마르지 않는 땅 위에 이글거리는 태양의 열기를 꽁꽁 묶어놓으려들었다. 단추를 두세 개 풀고 손부채질에 늘어져있으려니 물 한 잔과 그늘막의 네가 보였다. 잘 여며진 옷, 긴 소매, 긴 바지. 그런데도 그곳에는 희미한 바람기가 느껴져 답답한 줄을 몰랐다.



 제일이였던 것은 언제나 비상 후의 먼 거리에서의 감상으로 네 뜀박질은 순간의 환상이자 열기이며 꿈결같아 더 그랬다. 볼 수 없는 표정의 너는 늘 부드럽고 강한 미소를 걸고 먹잇감을 찾아 눈을 빛냈다. 강하고 아름답다고.



 그래, 그 때 그랬다.



 감상은 끈질겼다. 거리를 조절하는 것이 익숙치않아 어지간해선 흩어지지 않았던 집중력이 별 다른 이유없이도 비명을 질렀다. 제 집처럼 드나드는 것은 네 손에 쥐어준 구리열쇠. 걸어다니는 것은 갑주의 신발 소리. 창이 공중을 가르며 웅웅 울고 너는 몇마디 말도 없이 내 공간을 지배하려 들었다.


 너는 이기적이다.


 연필 끝이 아작이 났다. 칠의 맛과 나무의 텁텁한 조각이 혀끝에 맴을 돌았다. 흑연, 그 매끄러운 맛.


 나는 글쓰기를 하듯 매끄럽게,



 "좋아해."



 라고 기어코 운을 뗐다.



 머릿속에서 돌려보았던 몇 번의 시뮬레이션보다 다정하게 말이 흐르자 나는 조금 기분이 좋아져 슬며시 웃고야말았다. 단단히 굳은 네 눈의 각막에 여과없이 투과되고 있을 그 꼴사나울 얼굴이 네 푸른 바다에 가득 담기지 못하게. 깜박깜박. 눈꺼풀은 느리게 움직였다. 미끄러져 내린다.



 "그런가."



 오롯이 들은 대꾸에 나는 그만 미끄러져내린다.

이것으로 되었다. 나는 네게 이정도이면, 그리고 너도 내게 이정도이면 그만이다. 다행스럽게도. 안도의 한숨이 흘렀다. 그것이면 되었다. 어쭙잖은 미소로.



 매끄러운 것은 매끄럽게 길을 타고 나아갔다. 그런 것이 된 애정의 감상은 더이상 보고 싶지 않았으므로 잘된 일이라고 나는 여겼다.


 변화는 달갑지 않았다. 아무 것도 바뀌지 않은 듯 생떼를 쓸 때면 더 그랬다. 덤덤했던 것들이 얼마지나지 않아 살갗이라도 찢어발겨놓은양 로라스는 어울리지 않는 짓들을 하기 시작했다. 늘 같은 시간 같은 장소 같은 사람과 있는 주제에 대화의 흐름과 분위기가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만 조금씩 바뀌었다. 멍청하게도 그는 이것이 나에게 통할 것이라고 확신하는 듯했다. 여자 이야기, 신과 술과 그리고 여자 이야기. 심장이 쿵쿵 뛰어 뒷덜미가 잡아채어지는 듯했다. 머저리 새끼.


 나는 조금도 미안하지 않았다. 다만 그가 너무 역해서 견딜 수가 없을 따름이었다. 목덜미를 물어뜯어 입을 닫아버리자. 몇 번이나 생각했다.



 결국 나는 축객령을 내렸다. 당황하지도 않고 너는 그 붉은 빛이 아름아름한 노란 열쇠를 늘 네가 앉아있던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쇠가 나무를 때리는 달그닥소리에 손끝이 살짝 놀라는 것이 보였다.  손은 다시금 열쇠를 쥐었다. 그리고 다시 내려놓았다.


 "내가 그렇게 싫으냐."


 신소리를 했다. 내 모든 것이 우스갯소리처럼 들려 네가 '그래, 역겨워서 참을 수가 없어.' 따위를 중얼거리거나, 소리치고 얼른 문을 쾅 닫아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랬다. 그것이 지금 나의 유일한 소망이자 바람이었다. 주먹이 말렸다 펴졌다, 어설프게도 너는 어쩔줄 몰라했다. 그것을 그렇게 불러도 좋다면.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거야."


 바보같이 입술이 떨리지 않게 기를 썼다.


 "잠시만,"


 잠시만 널 사랑할게. 매듭을 짓지 못하고 입술을 으깨어 물었다. 서툴러서는 모두가 다친다. 나는.


 성큼성큼 긴 다리가 내걸었다. 바짝 붙는 얼굴을 나는 붉어져있을 얼굴로 밀어내었다. 수치와 모멸. 가득 담긴 동정이 일렁거려 그 끝을 성둥 잘라내 뒤로 하고 나는 결국 자리를 뛰쳐나왔다.



 걷는다.



 나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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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먼 로이드는 새벽 다섯시면 자리에서 눈을 뜬다. 올해 쉰하나인 그는 열여덟에 군대에 자원입대했고 제1차능력자전쟁에 참전했다. 대영제국의 군인이자 비능력자로써 최전선에서 공을 세운 것을 인정받아 훈장과 작위도 가지고 있었다.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생활에 부족함이 없었으나 이것은 넘치지도 않았다. 그는 늘 이것이 불만이었다.


부품 어딘가에 녹이 슬었는지 수도의 밸브를 돌리자 끼릭끼릭 거슬리는 소리가 나며 물이 튀었다. 로이드는 콸콸 쏟아지는 물줄기에 손을 넣어 찬물로 세수를 하고 새수건으로 얼굴을 훔쳤다. 하루하루 제 몸은 삭아간다. 아마도 살아온 날이 앞으로 살아갈 날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그렇게 세면대 위 거울 속에는 별 볼일 없는 오십대의 늙은이가 서있었다.


비능력자로써 그는 뛰어난 것이 없었다. 다만 운을 실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는 제가 가진 것보다 분에 넘치게 끌어들이는 운을 비열하고 저열하게 이용해 이 자리까지 오른이로 굉장한 실력자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우연하게 주워들은 정보를 어떻게 써먹어야할지, 필요한 이야기들을 얻을 수 있는 곳이 어딘지, 그는 기가 막히게 잘 알고 있었다. 스스로도 가끔씩 제 실력에 소름이 돋고는 했다.


소령. 중령. 대령. 직위가 바뀌는 그 순간은 늘 짜릿했다. 권력은 달았다. 그러나 군인은 신이 아니었다. 늘 제 위에는 누군가 있었다. 온갖 더러운 권모술수로 여기까지야 어떻게든 올라왔으나 저는 태생이 더러운 놈이었다. 절대 이길 수 없는 게임에서 그저 앞으로 앞으로 전진하는 기분이 들었다. 공허한 삶을 메꾸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권력이 필요했다. 돈, 그에겐 돈이 그랬다.


RX. 우연은 얄궂은 데가 있어서는 기대하지 않은 선물을 꼭 이렇게 살짝 얹어놓고는 했다. 그는 그 이름을 저울질했다. 어느 쪽이든 팔아치우면 그만이지만.


 제 주요 고객인 화이트 칙스의 매음굴에 찾는 이들의 발걸음이 점차 줄기 시작했다. 회백색의 가루가 팔리지 않고 쌓여갔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잔고를 깎아먹으며 몇 달간의 추적의 끝에 그들은 그들의 약을 중화시키는 해독제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가 의도를 밝히지 않은 채로 이곳저곳에 약을 뿌려대고 있었다.


화이트 칙스는 이 일을 로위드에게 직접 의뢰했다. 저희들은 구역다툼이 있어 다른 지역에는 손을 뻗지 못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로위드는 약쟁이 몇을 잡아 주요 거래처에 들어앉혀놓았다. 못구하는 약도 없도 못만드는 약도 없다. But cash. 리차드를 만나는 일은 비교적 쉬웠다.


리차드는 거래를 받지 않았다. 해독제에 관해서도 모르쇠로 일관했다. 덮수룩한 눈썹 아래 까만 뱁새눈이 섬찟하게 빛났다. 수문장은 녹록치 않았다.


로위드는 도움을 받기로 했다. 적절한 역할의 멍청이로. 명분에 집착하는 그는 이번 역시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굉장한 실력자가 있고 다른 이의 눈을 피해 은둔해있으며 오직 그 노인을 통해서만 거래를 받고 있는데 전쟁으로 흉흉할 때에 다른 국가로 넘어가거나 일정 조직의 손에 들어가서는 큰 일이 날 이라 대영제국의 안녕을 위해 꼭 확보해야할 인물이라고. '나라의 일'. 키워드는 언제나 먹혔으며, '속죄'. 그 양념마저 완벽했다.


-

13일째의 새벽


눈이 번쩍 뜨였다.

 


바스락거리는 입술의 거스러미가 잘 정돈된 살갗을 거칠게 스쳤다. 닿은 것이라고 말하기도 민망한 감촉이 여전히 아리고 저렸고 손끝으로 살짝 살짝 건드릴 때마다 기억 위로 떠오르는 감촉에 온몸이 전율했다. 가슴이 끓었다.


드렉슬러는 제 타임아웃의 끝에 비릿한 미소를 걸어넣고는 제가 어둠 속으로 끌려들어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아아, 익숙한 향기가 분명 제 뺨에 스쳤는데. 뇌속의 혈관이 엉켜 곧 터질 듯이 두근거렸다. 두통이 곧 생각이어서는 로라스는 제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몰랐다.


위험했다. 계획. 희생. 내가 저버린 것들에대한 속죄와 그리고 두근거림. 체념하고 놓아버린 삶에대한 미련, 미련. 종류가 다른. 아아, 위험하다. 그는 위험해. 저는 어둠속으로 스스로 걸어들어간 사람이었다. 뛰어난 이단자를 꾀러 놓아진 미끼였고 모든 것은 청산이었으며 결국엔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기억 속으로 스스로 걸어들어가려했다. 그러나, 미련하게도 두근거림으로 살고자한다. 끓어오르는 것은.


로라스는 당혹스러웠다. 지켜달라니, 무엇을. 어디까지 알고 있는걸까.


떨리는 손은 금방 들킬 것이었다. 로라스는 드렉슬러를 더이상 끌어안지 않았다.


로라스는 리처드를 찾아갔다.

 

-

 침대 위의 노인은 주름지고 앙상한 손가락에 실을 엮어 거미줄을 만들었다. 금발의 남자는 묵묵히 침대맡을 지키며 노인의 시트 끝자락을 노려보았다.

 "제임스."

 거칠고 메마른 음성은 듣기 거슬리는데가 있었다. 남자는 흠칫 떨며 고개를 들었다.

 "여깄습니다, 맥그리거씨."

 "어지간히 내가 원망스럽겠군."

 노인은 이채가 흐르는 푸른 눈을 느릿느릿 깜박였다. 제임스라고 불린 남자는 입을 열지 않았다.

 "나는 탐욕스러워. 예전부터 그랬지. 비밀보따리를 잃어버린 이후에는 한껏 날이 서서는 히스테릭해졌고 말이야. 그게 자네가 몇 살때인지 혹시 기억하나?"

 "...열 살이었을겁니다."

 "제임스. 작은 제임스야. 알겠지만 나는 가정문을 싫어해. 모를 때는 확실히 모른다고 하는 게 좋아."

 "...죄송합니다."

 "아니, 그럴 것 없어."

 노인은 가래가 낀 듯한 목으로 콜록콜록 기침을 했다.

 "고작 예순에 몸이 엉망이야. 겉보기엔 여든은 넘은 노인같지않나? 좋은 것을 먹고 좋은 것을 입고 늘 최고만 누렸는데도 이 모양이야. 하지만 여전히 나는 수장이고. 장기가 멀쩡한 것이 없는데도 그래."

 노인은 차오르는 숨을 고르며 검지의 반지를 문질렀다. 원숭이를 집어삼키는 뱀이 붉은 루비 뒤에 또아리를 틀어 자리를 잡았다.

 "1916년 3월 28일. 꽤 추운 날이었어. 멍청한 자식의 이마에 바람구멍을 내주었는데, 녀석이 잽싸게 도망가버렸지."

 제임스는 노인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점점 힘에 부침을 느꼈다. 울컥거리는 울대를 꿀떡 삼켜냈다.

 "내가 꽤 못살게 굴었거든."

 노인은 즐거운 듯 킬킬 웃었다.

 "등짝에 낙인은 내가 직접 찍었어. 자글자글 살타는 냄새가 내게는 풀코스 요리보다 훨씬 먹음직스러웠고. 그 사그러들지 않는 불꽃이 눈에 비치면 온 몸이 오싹해지곤 했지. 너도 그 아이를 알잖아?"

 추억에 잠긴듯 가늘게 뜨여진 눈은 도로록, 제임스를 향했다. 제임스는 제가 저도 모르게 노인을 노려보고 있었다는 사실에 화들짝 놀랐다.

 "아, 더이상 아이가 아니겠군."

 노인은 능청맞게 시선을 갈무리하며 마른 손을 가볍게 말아 쥐었다.

 "나는 그 녀석의 속이고 겉이고 모조리 가졌어. 늘 갈증이 나고 역겨웠는데도 옆에 꼭 붙이고 있었지. 사실 그 때도, 지금도 한 번도 가진 적이 없었는데 말이야. 녀석은 주먹을 움켜쥔 채 절대 펴지 않았어. 매질도, 폭언도 소용이 없었지. 그 살갗을 갈기갈기 찢어놓을 수는 있었어도 절대 이겨낼 수는 없었다고. 정말이지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도 나는, 멍청하게 녀석의 손가락을 부러뜨려서라도 이 반지를 끼우려고 했어."

 분노에 찬듯이 앙상한 몸이 바르르 떨렸다.

 "반가운 친구의 소식을 들었어."

 노인은 순식간에 평온을 찾았다.

 "오랜만에 가지고 싶은 것도 생겼고."

 제임스는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노인은 빙그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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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겁게 사랑하고 불꽃처럼 타오른 뒤엔 비가 내리고 다시금 새싹이 오르겠지.


헐떡대는 숨소리는 먼저 가라앉은 열기가 마치 꼭 순간의 안개인듯 굴었다. 굳이 시시비비를 가리자면 고약한 영국의 안개마저 견디지 못할 정도로 선선한 바람에 갓 맺힌 땀방울조차 눈 깜박할 사이 식어버렸으므로 이것은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후희의 킁킁댐과 곧이어 버스럭거리며 시트를 쓸어댈 조그맣고 사소한 익숙함이 흐릿한 불빛아래 찾아오지 않았다. 감각이 죽어가며 시간이 멎어버리고 있었다. 꿀꺽, 드렉슬러의 침넘기는 소리를 안타깝게도 둘 모두 듣고 말았다. 로라스는 몸을 일으켜 세우지 않았다. 가슴팍이 들썩였다.


드렉슬러는 혀로 제 치열을 더듬었다. 치아 뒤와 천장. 혀가 입 안에서 뒹굴었다. 이쯤, 그리고 이쯤. 찌릿거리던 감촉은 아무리 뒤져도 찾을 수가 없었다. 제 옆에 누워 마찬가지로 천장만 보고 있을 나무토막을 떠올렸다. 효과가 있었다.


이번엔 입술을 치아로 물어 우물거렸다. 도톰한 살은 씹어댄 탓에 부어올라 치아가 닿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곧 터질듯이 매끈한 안쪽에 혀끝을 굴렸다.


이쯤, 이쯤. 계속 더듬었다. 뺨과 목, 가슴, 배의 굴곡과 무릎을 굽혀 허벅지까지. 시트가 버스럭거리는 소리는 그제야 났다.


제가 제 몸을 더듬거릴동안 로라스는 몸을 씻고 화장수를 발라 제 살정돈까지 마쳤다. 비 냄새. 가라앉은 영국의 새벽, 아침. 회색 도시, 그 웅장함과 과거. 과거. 찬란히 아름다웠던. 드렉슬러는 그 과거가 생각보다 변변치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과거는 시간을 뒤집어쓰고 무엇이든 아름다워지지 않는가. 그리고 결국 빛이 바래고 자연스럽게 잊혀진다. 무엇이든.


뜨거웠다. 무엇보다 뜨거워서 저를 내주고 허락하고 사랑했다. 했었다.


등을 돌아누웠다. 시트를 어깨까지 얹고 눈을 감았다. 일정한 무게의 한결같은 걸음소리, 물잔, 겉옷, 방 문고리. 문고리.


"가지마."


문이 닫힐 때가 되어서야 소리가 희미하게 새었다.


문이 닫혔다.


잠시의 침묵과 놀라운 발소리가 울렸다. 떨어지는 겉옷과 끌어안기는 어깨와 뜨거운 손과 목덜미를 더듬는 입술이 순식간에 위로 쏟아졌다.


드렉슬러는 뛰어든 로라스를 깊이 안았다. 사랑해. 사랑해. 귓가에 끊임없이 속삭였다. 내가 더. 더 많이. 소리가 속닥거려 귓속이 간지러웠다. 사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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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유로웠던 얼굴이 단숨에 일그러졌다.

 

 털썩. 삐그덕.

 

 의자 소리가 요란했다.

 

 "젠장"

 

 드렉슬러는 양 손에 얼굴을 묻었다.

 

 원하던 대답을 들었다. 미련은, 남는 것은. 제겐 이젠 정말 시간이 없었다. 날짜는 코 앞으로 다가왔으며 리처드가 준비한 선물은 제게 들어맞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지만. 약한 단어들이 제 나가는 길에 발을 걸었다. 마음의 준비는 다 되었었던 것이 아닌가. 아니다, 준비는 모두 되었다. 방금은 잊혀질 그 조금 서러운 것에 작별인사를 했을 뿐. 그리고 조금, 아주 조금 기대했을 뿐. 꼴이 우스웠다.

 

 파란 눈이 번들거렸다. 개는 낯선 곳이 두려운 듯 밝은 등을 향해 몇번이고 축축한 코를 움찔대고는 다음을 기다리듯 얌전히 드렉슬러를 바라보았다. 드렉슬러는 흐린 초점으로 그 끝에 눈을 맞추어 무릎에 턱을 괴었다.

 

 "멀리 떠날 거야. 네 녀석이 내 기억도 다 먹어치우면 좋을텐데."

 

 소리를 지르기에는 미적지근하고 울음을 터뜨리기에는 차오른 물이 얕았다. 어찌하지 못할 답답함에 드렉슬러는 빙글빙글 웃었다. 개는 두려운 듯 다리 사이로 꼬리를 감추고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드렉슬러는 제 목이 부풀어오른다고 생각했다. 알러지 반응처럼 콧속이 답답해지고 점막이 부풀어 세포 하나하나에서 삐걱삐걱 소리가 날 것 같은 불쾌감을 느꼈다.

 

 "다 씹어먹으라고.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네가 보고 있는 것, 듣고 있는 것 전부 삼켜대고 있는 걸 알아. 녀석은 모르겠지. 아무것도 모를거야. 자, 어서! 죄다 먹어치워보라고!"

 

 그는 결국 괜한 시비를 걸고야 말았다. 엉망으로 꼬여버린 삶으로 휘는 눈가와 내질러진 고함에 개는 공포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뛰어오르는 대신 점점 뒷걸음질만쳤다. 덜덜, 그 떨림이 눈에 보였다. 젠장. 드렉슬러는 나쁜 사람은 못되었다.

 

 "이리와."

 

 개는 방금의 두려움은 잊은 양 또 슬금슬금 벌려진 팔 사이로 파고들어 드렉슬러의 어깨에 턱을 괴었다.

 

 "멍청해가지고."

 

 누구에게 하는 이야기인지 저도 도통 알 수가 없었다. 파묻은 코 끝의 털이 부드러웠다.

 

 "가끔 기억해줘."

 

 털 사이로 손가락을 묻으며 드렉슬러는 좀 더 숨을 깊이 마셨다. 시간이 갈 수록, 개를 끌어안을 수록 손

의 떨림은 점점 더 심해졌다. 두려웠다. 욕심과 이성사이에서 드렉슬러는 고뇌하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올 수록 모든 것이 두려워지고 있었다.

 

 


/

 어두운 밤이었다. 그 날 이후로 로라스는 더이상 제 등을 끌어안지 않았다. 다 잘 되어가고 있었다. 14일째의 새벽에 드렉슬러는 가죽자켓의 깃을 세워 얼굴을 가렸다. 검은 모자를 눌러쓰고 시궁창을 따라 걸었다. 썩은 진창이 신발 바닥에 늘러붙고 괴상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점점 익숙한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이끼 낀 판자를 두드렸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오렌지 빛 등불과 주름 자글한 노인이 얼굴을 보였다. 콧수염이 찡긋거렸다.

 

 "영감, 늙었군."

 

 "네 놈도 금방이야."

 

 리처드는 등불을 후-, 불어 끄고 길을 열었다. 드렉슬러는 비좁고 어두운 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어둠이 찾아오고 창가의 별빛으로 곧 실내가 희미하게 보였다.

 

 "선물은 어떻게 했어."

 

 "내 것이 아냐. 답장도 했었잖아."

 

 "네 놈은, 마음이 약해서 안되는 거야."

 

 리처드는 제 입가를 움켜쥐었다.

 

 "프란시스코네 아들놈이 군에 들어갔다는 소식은 그렇게 놀라운 얘기는 아니었어. 로라스, 그 집안 놈의 자식들은 터뜨리고 쏘아대는 거라면 환장을 하는 녀석들이니까. 제 아버지와 사이도 좋지 않던 녀석이고 하니 제 살길 찾으러 나갔겠거니. 다들 그랬지. 그런데 몇 년 전에 제가 먼저 돌아오겠다고 한 거야. 프란시스코는 몸이 좋지 않았어서 자리를 보존하기 힘든 상태였어. 조직을 맡기기엔 얼간이 녀석들 뿐이었고. 아마 얼씨구나 했겠지. 조직 내 조그만 전쟁후 그렇게 들어앉은 자식을 나는 너한테 보냈다. 네 놈도 사실 이유는 알고 있잖아."

 

 리처드는 빠른 걸음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무 잔에 와인을 가득 채워 단숨에 반쯤 비웠다. 와인 방울이 맺힌 콧수염이 바르르 떨렸다.

 

 "당신은 너무 생각이 많아."

 

 드렉슬러는 엄지로 검지를 문질렀다. 톡톡, 식탁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거절하려고 했다. 네 놈은 이런 일이라면 질색을 하니까. 그런데 고지식한 군바리, 그 냄새가 지독하더군. 그 자식이 내게 인사를 했단 말이야. 허리를 깊이 숙여서, 이렇게, 죽은 사람한테 하듯이 말이야."

 

 리처드는 와인을 한모금 더 마셨다.

 

 "누군가가 보낸 것도 분명해 보였어. 큰 거물. 군인의 뒤라면 분명. 그런 생각이었지. 그대로 보냈다가는 네 녀석 성질머리론 퇴짜를 놓았을테고, 그래서 이름을 달아보냈다."

 

 드렉슬러를 바라보는 리처드의 눈이 일렁거렸다. 붉어진 코는 금방이라고 훌쩍거릴 듯이 보였다.

 

 "별이라면 응당 빛이 나야지. 내 형은 별을 타고 우주로 갈 생각이었겠지만 나는 그런 야망을 갖을 정도로 큰 그릇이 아니야. 너도 알고 있겠지."

 

 "조셉은 해도를 펼쳐들었고 영감은 옥상으로 날 데려갔지. 여전히 원망하고 있어. 별이 빛나던 밤하늘아래말이야. 녀석은 날 좋아해. 그러면 안 되는 거라고."

 

 "그 때는, 그게 좋은 생각 같았어."

 

 "조셉은 내게 늘 자신을 아버지라 부르라고 했어. 난 한 번도 그를 그렇게 부른 적이 없고."

 

 "그래, 그랬겠지. 얼마나 멍청한 녀석이냐, 내 동생이라는 놈은."

 

 리처드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Mi padre."

 

 무거운 공기에 웃음기가 가셨다. 어둠 속에서 등불에 눈만이 번들거렸다. 추위가, 그 찬 공기의 무게가 옷속으로 파고들어 뼈가 시렸다. 해가 뜰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새벽이 가고 있었다.


 "감사 인사하러 온 거야. 몸 조심해. 간다."

 

 별이 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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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 뒤에 뿌리 깊은 화상으로 새겨진 상처가 꿈틀거렸다. 원숭이를 집어삼키는 뱀의 괴상한 문양은 저도 전에 본 적이 있다. 등은 키와 함께 커지고 커져 흉터의 자국을 넓혀 경계선을 흐려놓았다. 그러나 그것은 사라지지 못하고 흉하게 자리를 넓혔을 뿐이다. 아물지 못한 성장이란 그런 것이다. 필시 달궈진 쇳덩이가 어린 시절의 여린 살을 뭉개고 익혀 그 연한 조직을 쪼글쪼글하게 만들어 물을 채워넣었을 것이다. 자신이 뭉개고 싶은 것은 아마도 그 어린 시절일테고. 로라스는 드디어 눈을 감고 억눌렸던 스냅샷의 빈 공간에 그 등을 채워넣었다.

 

 푸른 바다가 어둑어둑했다. 일렁거리는 검은 물결은 탁하고 침침하여 매순간 바위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날 줄 알면서도 혀를 널름거리고 저를 향해 아가리를 벌리려들었다. 그것은 더이상 푸르지도 않았다. 온갖것을 불싸질러 잿가루를 만들고 그것을 곱게 빻아 물에 탄다고 해도 이보다 더 무채색일 수는 없었다. 깊은 곳은 모든 색을 빨아들였다. 그리고 곧 저도 집어 삼킬 속셈이었다. 두려움은 어린 드렉슬러의 발에 족쇄를 달아 육지에 그 두발을 묶어놓았다. 결국 제 아비도 무너져가는 나라의 가상사리에서 풀썩이는 모래먼지의 냄새를 맡고 배를 띄운 배신자였으니 이미 허옇게 질린 두 손은 바다에 담글 길 조차 없는 것 아닌가. 그래서 더욱 갑판에 올랐다.

 

 드렉슬러는 무릎을 가슴팍에 끌어안고 물로 가끔씩 목을 축이며 늘 그 곳에 있는 짐상자마냥 자리를 지켰다. 누군가가 저를 알아볼까 두려웠다. 그렇게 저를 번쩍 들어 두 다리를 하늘로 향하게 하고 배 건너로 꼬꾸라트릴 것만 같았다. 물 속에 처박히면 인어가 몰려들어 제 팔이고 다리고 우적우적 씹어먹을 것이다. 뼈는 사라지지 못하고 제 의식에 엉켜 밑으로 밑으로 가라앉을 것이다. 그렇게 붉은 별이 되겠지. 하지만 아무도 붉은 별을 그려넣어주진 않을 테였다. 제 자리는 없었다. 그럼에도 배를 탔다. 배를 탈 때마다 늘 그랬다.

 

 17년을 꼬박 세상구경을 했다. 그 시간동안 늘 드렉슬러는 도망자였다. 수없이 많은 사람 속에서 티끌이 되어버린 자신을 느끼면서도 무언가 제 뒷덜미를 낚아채 바닷속에 처박아넣을 것이라는 공포에서 도저히 자유로워질 수 없었다. 그렇게 저를 쫓고있는 것을 얼음으로 가득찬 산 속에서 보았다. 검은 돌 위에 켜켜히 얼어붙은 얼음에 제 얼굴이 비쳤다.

 

 청산을 위해 돌아왔다. 영국땅을 밟은 것은 아무도 깨어있지 않을 새벽으로, 다행히도 리차드는 그저 늙었을 뿐이었다. 안녕, 영감.

 

 로라스는 차마 침대 위에 앉을 수가 없었다. 앉았다간 괴상한 냄새가 날 것만 같았다. 밝은 방이 불쾌했다. 잘 개어진 제 담요와 베개를 노려보았다. 제 담요와 베개를 노려보았다. 제 것인데.

 

 로라스는 무엇을 향해 화를 내는지를 모르고서는 화를 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무작정 화만 차올랐다. 더이상 참았다가는 짐승마냥 으르렁거릴 것 같았다. 그래서 입을 열어야만했다.

 

 

 "잡무에 비역질도 들어가는 모양이지?"

 

 

 모르는 척하고 싶지 않았다. 적성에 맞지 않았다. 숨길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제 앞에서 드렉슬러는 낱낱히 까발려져야했다. 가슴 속에 엉기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야했다. 그만이 그랬다.

 

 

 "왜 화를 내지?"

 

 

 돌벽에 잔 금이 가있었다. 수리가 필요해보일 정도는 아니었는데 핏발이 서 노려보는 눈에는 그 자잘한 잔 금마저 눈에 거슬렸다.

 

 

 "화를 낸다고?"

 

 

 뒤를 획 돌아 로라스는 드렉슬러와 눈을 맞췄다. 망설임도 없이 단호한 말투로 로라스는 순간 드렉슬러가 애처로워보인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 화 내고 있잖아."

 

 

 드렉슬러는 조금 웃고 있었다.

 

 

 "아니야."

 

 

 "거짓말쟁이."

 

 

 우물거리는 사람은 없었다. 정해진 스크립트처럼, 미리 짜여진 시놉시스처럼 공간에 갇혀 빠져나가지 못하게 드렉슬러는 서서히 로라스의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응? 그렇잖아."

 

 

 가까워지는 거리에 맥박이 뛰었다.

 

 

"아니면, 로라스."

 

 

 숨이 졸렸다.

 

 

"이게 화를 내는 게 아니면."

 

 

 한 발자국.

 

 

 "날 지켜줄거야?"

 

 

 그렇게 다가서는 입술에 주춤, 로라스는 뒤로 물러섰다. 아차.

 

 

 "거 봐."

 

 

 빙그레 웃는 웃음이 또 끝에 걸렸다.

 

 

 "거짓말쟁이."

 

 

 뒷걸음질 친 다리가 침대에 걸려 로라스는 그 자리에 주저 앉고 말았다. 삐그덕, 소리와 함께 방이 침침해진 기분이 들었다. 세상이 들썩였다. 그들은 뛰고 있었다.

 

 

 "앞으론,"

 

 

 입을 가렸다.

 

 

 "이런 짓 하지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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