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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배경이 눈에 들었다. 방, 내방. 익숙한 침대, 익숙한 의자, 익숙한 천장과 익숙한 러그의 감촉. 그리고 익숙한 남자.

 

보고 싶었어.

 

흰 셔츠에 검은 바지, 맨발 차림으로 남자는 익숙한 듯 방 이곳저곳을 거닐다가 자신이 침대 위에서 몸을 일으키면 어, 일어났어? 하고 인사를 했다.

 

여긴 내 방이야.

알고 있어. 보고싶었어, 알베르토.

 

여전히 남자는 제 할 말만 했다.

짧은 꿈. 묘한 아쉬움으로 입맛을 다시며 머리맡의 물을 찾았다. 목이 탔다.

 

이틀째,

 

왜 자꾸 나타나.

글쎄, 만나고 싶었어.

 

무언가 대꾸를 하려던 순간 잠에서 깨었다. 어찔한 현기증에 또 물로 목을 축였다.

 

사흘 째,

 

드렉슬러

한 번 더 네가 부르는 이름이 듣고 싶었어.

 

나흘 째,

 

오늘도 있는 건가.

너랑 있는 시간이 좋아.

 

닷새, 엿새, 이레, 여드레, 아흐레, 열흘…묘한 꿈으로 로라스는 자신이 점점 말라가고 있음을 느꼈다.

 

내 꿈에서 나가, 난 자네를 꿈 속에서 더 보고 싶지 않아.

 

맞춰오는 눈동자가 묘하게 반질거렸다. 아, 아니 난…당황으로 더듬거리며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드렉슬러는 처음으로 활짝 웃었다.

 

사랑해.

안녕.

 

멍청한 얼굴로 눈을 떴다. 안녕? 이별을 고한 것인지 그 이후로 더이상 꿈은 꾸지 않았으나, 안녕? 저는 마지막인사를 못했다. 이기적인 놈. 항상 이런 식이지. 자네는 항상 자기밖에 몰라. 조금 초조한 기분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꿈 속에서 그를 볼 순 없었다. 왜 찾아오지 않아. 드렉슬러. 눈을 감으며 늘 꿈 속 그가 했던 말을 되뇌었다. 사랑한다고 했던가. 그럴리가 없잖아. 자네가 그런 말을 했을리가 없어. 이유를 들어야겠어. 왜 이런 이야기를 한 건지. 여전히 꿈에 남자는 나오지 않았다. 익숙한 방은 정말 제 방이었고 항상 그것은 꿈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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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 위에서 그를 기다렸던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불편했으나 눈이 부셨고 힘들게도 사랑하고 있었다. 여자는 길의 끝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듯 하다가 순간 미련 없이 고개를 돌려 반대편의 길로 걷기 시작했다.


태양이 이글거리는 오전의 일이었다.


짐을 가득 실은 마차는 이제 좁은 흙길로 들어섰다. 다그닥대는 말굽소리가 계곡을 울렸다. 곧 비가 올 것 마냥 하늘은 우릉거렸고 구름은 머리 바로 위까지 빼곡히 찼다. 가파른 산세와 빽빽한 나무 숲으로 좁디좁은 길을 헤쳐나가며 마부는 고삐를 좀 더 바투 쥐었다.


뿔나팔 소리가 울린 것은 바로 그 때였다.


멀리서부터 사람들의 고함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습기찬 공기가 진동했다. 수많은 발소리가 말발굽소리를 집어삼키고 땅의 울림에 놀란 말이 날뛰었다. 마차 안 여시종은 긴장으로 땀이 찬 손을 꼭 쥔채 제 여주인을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굳게 입을 닫고 여자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곧은 시선으로 정면을 응시할 뿐이었다.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여자는 평소에도 말이 많은 편이 아니었다. 언제나 고요한 것을 좋아했고 가끔가다 나누는 담소를 피하지 않았을 뿐으로 호들갑을 떠는 것은 어쩌면 그녀에게 가장 어울리지 않는 일중 하나일 것이다. 여시종은 그녀를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고 커튼 틈 사이로 바깥의 동향을 살폈다. 모든 것은 아비규환처럼 보였으나, 여시종은 제 주인이 당황하지 않는 것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한두 방울씩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수완이 좋은 드렉슬러가 직접 큰 거래를 성사시키기 위해 자리를 비우는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다만, 이번은 경우가 달랐다. 평소처럼만 무사히 짐을 싣고 돌아왔더라면.


그녀의 실종은 그리 오래지 않아 본가의 귀에 들어갔다. 비록 경제적으로 몰락하여 집안의 여식까지 상인에게 넘겼다고는 하나 귀족은 귀족.


상인은 제 불뚝한 배와 팔뚝에 밧줄을 감아 자신을 포박하는 병사들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았다. 제 재산은 모두 몰수될 것이고 목숨이라도 건질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감사해야했다. 하다못해 둘 사이의 자식이라도 있었더라면. 말도 되지 않는 것에 헛웃음이 났다. 팔려온 주제에 도도하기 짝이 없는 콧대로 애정은 고사하고 손찌검까지 하지 않았던가.


움직이려하지 않는 발을 억지로 질질 끌며 문밖을 나서자 3일째 내리 퍼붓는 비를 가리는 것 없이 고스란히 맞아야했다. 재수 없는 날이로군. 물에 젖어드는 가죽신의 코를 바라보다가 상인은 눈을 들었다.


그 비에 젖어 형형히 빛나는 푸른 빛을, 그는 아마도 평생 잊지 못할 것이었다.




귀족이란 것은 점점 쇠락하여 이름 뿐인 것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간의 전쟁으로 창고는 바닥이 났고 세금징수는 여의치 않았으며 짜내도 짜낼 것이 없는 상황 속에서 자리에 앉아 서류만 뒤적이던 이들은 일찌감치 폭넓은 바지를 정강이까지 걷어입고 나무를 베어 땅을 만들기 시작하던, 둘이 만난 것은 그런 시기였다.


유명한 기사집안이었던 알베르토는 전쟁의 패배로 순식간에 그 명성을 잃었다. 뿔뿔히 흩어지는 가족들 사이에서 고작 12살이었던 로라스 역시 예외일 수는 없었다. 잠시동안만. 제 아들은. 이번. 곡식. 영토. 왕. 명예. 제 안을 흔들어놓는 대화를 더는 견딜 수 없었다. 예의를 차려 자리를 빠져나와 성의 뒷문으로 향했다. 바람이라도 좀 쐬면 괜찮아지겠거니. 푸릇한 잔디밭은 숲의 경계까지 30야드정도 펼쳐져있을 뿐이었지만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성 안보다는 훨씬 나았다. 무엇이라도 지금 시간을 잊을 수 있는 것이 필요했다. 로라스는 잔디 위에 팔베개를 하고 누워 하늘을 보았다. 풀물이 베면 지지 않을 텐데. 생각해봤자인 일이었다.


한창 성장기인 뱃속이 시간을 맞춰 울렸다. 벌써 저녁시간이군. 배는 고팠지만 입맛은 돌지 않았다. 저 곳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배고파?"


장난스런 목소리가 물 흐르듯 귀로 흘러들었다. 목소리를 확인하려고 자리에서 벌떡일어나 좌우를 살폈으나 시야내 에 걸리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꺄르르- 맑은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야."


놀림 받고 있다는 생각에 인상을 쓰자 "위." 라는 대답이 들렸다. 나무 가지 사이로 주홍빛 등불이 좌우로 흔들리며 드레스자락이 얼핏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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샹들리에, 웅성거리는 대화 소리, 한 구석의 관현악단, 칵테일바와 서버, 그리고 사람들, 사람들, 사람들. 파티는 이상할 것이 없었으나 오전 중에 끼인 안개처럼 위화감이 들었다. 로라스는 한쪽 벽에 기대어 파티장을 한 눈에 담았다. 조반니, 알폰소, 돈, 카를로스, 존, 프랭크, 벤자민, 안드레아, 마셜, 라이오넬, 제프리, 기타등등. 기타등등. 스치는 것만으로도 그네들에 관련된 자료가 죽죽 치고 들어왔다.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 한데 모여 아무렇지 않게 웃고 어울리고 있었다. 간질간질한 가슴팍에 멍하니 웃음이 나오려하자 머리가 아팠다.

 

익숙한 군화발에 시선을 채여 시야에 제복의 남자가 걸어오는 것이 보이자 로라스는 저도 모르게 가슴팍 근처까지 날을 세워 손을 들어올렸다.

 

"이런…."

 

"위험했군."

 

제복의 남자는 웃으며 속삭였다. 자연스럽게 붙잡힌 손에 악수를 했다.

 

"그렇군요, 로위드 대령님."

 

등 뒤로 나는 식은 땀에 마주 웃는 수 밖에 없었다.

 

"마티니?"

 

"예."

 

바에 앉아 시시한 얘기를 나눴다. 밖의 날씨는 보았나? 나는 조금 먼저 도착해서 말일세. 선선한 정도고 구름이 낀터라 계속 맑을지는 모르겠군요. 아내분은 어떠신가요. 출산날짜가 다가와 예민한 상태네. 제 기한에 아이를 낳지못하면 위험할지도 몰라. 의사는 우선 기다리라고만 하는군. 아직 기간에 여유가 있어 기다리고 있는 중이지만 혹시 아나. 병원을 바꾸는 편이 나을지. 하지만 제가 알기로는 그 병원의 의사가 제일 능숙하다지요. 병원 역시 이 근방에서 제일 훌륭한 곳 아닙니까? 이제와서 병원을 옮기는건 오히려 산모에게 위험한 선택일지도 모르죠. 옳은 얘기처럼 들리지만 나는 아무래도 예비 아버지로써 불안해서 말일세. 그 의사는 일전에 의료사고를 낸 적이 있거든. 한 번 실수한 사람은 그 부분에 더 민감한 법이죠. 두 번 실수한 사람은 그 실수를 필히 다시 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지.

 

냉랭한 분위기로 바텐터는 빈 잔에 술을 채워넣었다. 병에서 액체 흐르는 소리가 울렸다.

 

"부디 순산해야할텐데."

 

"괜한 걱정이십니다."

 

"그러고보니 자네도 슬슬 짝을 찾아야지. 마음에 차는 아가씨는 만났나? 나는 자네가 여자 만나는 걸 본 적이 없어. 혹시 멀쩡히 생겨선 씨주머니가 텅 빈 것 아닌가? 요샌 가끔 그런 생각도 하지."

 

"대령님의 뛰어난 상상력에 맞춰드리지 못해 죄송할 따름이군요. 제 짝은 아직 인연이 아닌가봅니다."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고? 혹시 남자 좋아하나?"

 

"그런 일 없습니다."

 

 쯧, 로위드는 가볍게 혀를 찼다.

 

"아니야, 그건 또 모르지. 신께서 결정하신 일인데 어떻게 받아넘길 수가 있겠어. 상대가 남자면 어떨까. 여자를 사로잡으려면 무엇이 필요하지? 옷, 신발, 보석. 남자라면 집이나 차, 돈인가. 아니지 아니야. 무드가 없지. 사랑에는 무드가 필요해. 필요하다면 반지라도 주어서."

 

눈이 번뜩였다.

 

"사로잡아야 하지 않겠나."

 

 등 뒤로 식은 땀이 흐르고 있었다. 제 검지 손가락의 반지가 유난히 빛났다.

 

 

대령은 미혼이었다.

 

 

 

와장창. 철기 쏟아지는 소리가 복도를 사정없이 후려쳤다. 제 공방이었다.

 

"미친 새끼."

 

정신없이 쫓아들어가니 열린 문 뒤로 황망히 방에 서있는 머저리가 보였다.

 

"내가 뭐랬지? 다른 방들은 어떻다고?"

 

금지. 입술이 우물거렸다.

 

"…길을 잃어버렸네."

 

"거짓말쟁이."

 

톡 쏘아 들어오는 말투에 시선을 내리깔았다.

 

"미안하네."

 

"거짓말쟁이."

 

생각없이 방문을 열면 큰소리가 나도록 물건을 장치해둔 것은 자신이었다. 침입자는 죽여버려야지. 드렉슬러는 그정도로 제 영역에 발을 대는 이를 싫어했다.

 

"본 소감이 어때? 네가 첫 손님이야."

 

같은 마피아 새끼니 별 상관없나. 그리 기분나쁜 느낌은 아니었다. 이제 며칠 남지 않았다는 것은 새삼스러울 부분이 없었다. 어제도 시간은 흘렀고 지금도 흐르고 있으며 아마 내일도 흐를 것이다. 그것은 대체로 그랬다. 팔짱을 껴 입구의 문지방에 몸을 기댔다.

 

중앙에 돌기둥은 맨홀에서의 물을 흘리기위해 나중에 세운 것이었다. 100평방미터는 족히 돼보이는 넓은 공간은 벽을 따라 공구와 시대착오적인 물건들이 줄을 서 배치되어있었다. 로라스는 낡은 인간이군. 하고 드렉슬러를 비아냥거렸으나 비웃음만 돌려받을 뿐이었다. "절박해지면 뛰어나지는 법이니까. 원래 그런거야. 자연섭리지." 시덥잖은 소리를 넘기고 벽을 따라 마저 걷던 로라스는 우뚝, 발을 멈췄다. 철, 강하고 빛나는 은빛 광물. 제련되어 날카롭게 빛나는 것은.

 

"후스타(Justa). 랜스인가? 어지간히 엔틱하군."

 

"틀렸어."

 

곧장 돌아오는 대답에 고개를 돌리자 담배를 빼어문 드렉슬러가 곧게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조금 숨이 막혀 길을 열자 떨어지는 선의 긴 팔이 랜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건 내가 만든 거야."

 

"1대 1의 후스타에서나 사용되는 구시대 유물 아닌가."

 

"그래서 좋은 거야. 알베르토."

 

창을 쓰는 손길이 눈을 사로잡았다. 손가락. 단단한 뼈로 불거져나온 마디가 생각보다 굵었다. 연필만 잡아본 샌님이 아닐 거라고, 그래, 그런 생각을 했었지. 조금 웃음이 났다.

 

"단 한 번."

 

순식간에 들어올려진 창은 물결을 타는 물고기처럼 유영하며 곧게 날아갔다. 콰득. 날아간 창은 하얀 페인트로 거칠게 그려진 과녁 정중앙에 꽂혀 온 몸을 푸드덕댔다. 전율이 흘렀다.

 

"단 한 번 말이야."

 

문짝에 그려진 엉성한 페인트과녁, 랜스, 철냄새 가득한 공방. 철냄새는 제게는 너무 익숙했다. 친숙하고 친밀하여 계속 자신을 자극하고 있었다. 로라스는 멍청히 과녁에 꽂혀진 창을 바라보았다. 한 번. 단 한 번.

 

"무모한 무기군. 그저 상징적일 뿐인 비효율덩어리야."

 

"그거면 충분해."

 

목소리에 웃음기가 섞여들어 이것은 마치 일상생활 속 대화의 재간넘치는 농담정도로 들렸다. 순식간에 불안이 흘러넘쳤다. 답을 원하는 얼굴에 드렉슬러는 또 등을 보였다.

 

"그래서 충분하다고."

 

그러고보니 그는 저를 알베르토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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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시 정각, 2시 48분

열두시 정각, 2시 54분

 

나흘째, 드렉슬러는 책상 위에 엎드려 십분 정도 쪽잠이 들었다. 프레파라트 위의 시료가 사라졌다. 커버글라스는 잘 덮여있었다. 갈라진 돌 틈새로 바람과 함께 비치는 빛에 눈이 부셨다. 조짐이 좋지 않았다.

 

로라스는 그 날 이후로 항상 10시쯤이면 구불구불한 지하미로를 지나 드렉슬러의 연구실 문을 두드렸다. 돌이끼, 마른 돌 냄새. 뚜벅뚜벅, 걸음 소리가 명랑했다. 똑똑.

 

대답은 없었지만 사람은 있었다. 정확히는 사람들이 있었다.

 

"매일 같이 오는군."

 

"물품 외에도 일이 많으니까요."

 

로라스는 말 없이 토마스가 앉아있는 제 침대-엄밀히 말하자면 드렉슬러의 것인-를 바라보았다. 토마스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너무 몰아세우지 마세요. 알아서 잘하는 사람이니까요. 그렇죠?"

 

인상은 드렉슬러 쪽에서 썼다.

 

"저 자식은 날 몰아세우지 않아."

 

"하지만 RX가 이렇게까지 제대로 자지 못하는 건 처음 보는데요. 늘 눈가는 붉고 코끝이 헐어있는 걸 제가 모를 줄 아셨어요?"

 

"그건 저 자식이 밤마다,"

 

드렉슬러는 버럭 소리를 내었다가 입을 한 번 다물었다. 적당히 둘러댈 말을 찾는 입술이 우물거렸다.

 

 "...밤마다 자꾸 개새끼처럼 구니까."

 

 "그렇지, 자네는 나 때문에 밤새워 울고 말일세."

 

천연덕스러운 대꾸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로라스는 물흐르듯 자연스럽게 멀뚱히 서있는 토마스를 밀어내고 제자리를 찾았다.

 

 "누, 누가…! 네가,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야."

 

 얼굴이 붉어져 황급히 자리를 떠나는 토마스의 뒤를 보고 로라스는 조금 웃음이 날 것 같았다. 그러다 그 뒤를 쫓아 나가는 드렉슬러에 기분이 상했다.

 

"이쪽은 환자인데 말이지…."

 

 

 

 

엿새째 열두 시 정각.

 

"칼 같군."

 

우선적으로 배양 배지에서의 형질 분획은 성공적이었다. 이제 몇 번의 임상실험을 거쳐 넉넉히 보름정도면 약은 갈래가 보일 것이다. 이렇게 모든 것이 순조로운데. 그럼에도 드렉슬러는 초조해 견딜 수가 없었다.

 

오전중에 급히 넘어온 전서에는 익숙한 약어가 쓰여있었다. The present. WC CTD.-J

 

조셉. 보름. 보름. 손 끝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검은 개는 시간이 갈 수록 점점 드렉슬러에게 관심을 보였다. 이제는 드렉슬러를 보며 꼬리도 슬렁슬렁 흔들어댄다. 결 좋은 꼬리가 휙휙 바닥을 쓰는데도 바닥의 먼지는 일어날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먼지. 먼지? 드렉슬러는 천천히 검은 개를 쓰다듬다 털을 한움큼 움켜쥐었다.

 

열두 시 정각, 3시 7분

 

빌어먹을. 옳다. 빌어먹게도 자신의 예상은 벗어난 적이 없다. 시간이 없었다.

 

핑핑 돌아가는 머리에 따라오지 못하는 손이 답답했다. 이미 머릿속 또렷하게 보이는 내용을 흰 종이 위에 써적어 내리면서도 급해지는 마음에 몇 번이고 연필심을 부러뜨렸다.

 

젠장. 젠장.

 

바들거리는 오른쪽 팔에 결국엔 연필이 동강이 났다. 등을 끌어안겼다.

 

일어나는 시간을 알리라는 요구에 로라스는 그 때부터 항상 이렇게 눈을 뜨면 드렉슬러의 등 뒤로 달라붙었다. 말 없이 가만히 기대어있다가 경직됐던 어깨가 익숙해질 쯤이면 왔던대로 또 말 없이 제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말 만으로도 괜찮잖아."

 

"자리가 너무 춥대도. 그렇다고 내가 춥다는 이유만으로 난방을 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며칠 전 스스로가 했던 말을 고스란히 들으며 드렉슬러는 어처구니가 없어 뒤를 돌았다. 변형, 변질, 변수의 위험이 있는 것은 금지. 이 방 외에 다른 곳의 출입도 금지. 외박도 금지. 금지. 금지. 모조리 금지였다.

 

"그렇다고 해서 네가 말을 잘 듣느냐, 어떻게 생각해?"

 

"글쎄."

 

로라스는 가볍게 웃었다.

 

"아픈 아이는 의사선생님 말씀을 잘 들어야겠지."

 

"말은…"

 

제자리를 찾아 몸을 바로하는 드렉슬러는 또 등뿐이었다. 로라스는 턱을 쓸었다.

 

"일이 끝난 뒤에도 쭉 찾아와도 괜찮겠는가?"

 

"나는 누구 밑으로 들어가는 거 안 좋아해."

 

일절 고민 없이 뱉은 말에 말문이 막힌 것은 로라스였다. 톡톡, 손 끝으로 뺨을 두드렸다.

 

"너무 멀리 나간 것 같은데."

 

사각거리던 손이 잠시 멈췄다.

 

"틀렸나?"

 

으음, 로라스는 곤란한 듯 앓는 소리를 냈다. 예민하긴. 무릎 위 담요를 고쳐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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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시 정각, 2시 45분

 

까득까득, 손톱을 씹었다. 어쩌면, 정말로. 단정히 눈을 감고 잠들어있는 사내를 보았다. 리처드, 리처드. 조셉, 조셉 퍼거슨. 퍼거슨. 퍼거슨. 거친 모래알 같은 이름들이 입 안을 굴러다녔다.

 

미세하고 조그마한 것들이 신경 끝에서 맴을 돌았다. 그것은 사고의 진행을 방해하는 오탈자 같은 것들이었다. 성난 황소처럼 달려드는 시간에 붉은 케이프만을 들고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화이트 칙스. 창백하고 메말라 온갖 편향으로 가득찬 짐승우리.

 

드렉슬러는 다시금 조그마한 소년으로 돌아간다. 볼품없이 말라 이국의 짐승들과 함께 철창에 갇힌 소년으로 돌아간다. 짐승 냄새. 짐승들의 냄새. 창 사이 들어오는 햇빛으로 공중에 떠다니는 온갖 털과 비듬과 먼지와 그들의 삶을 보았다. 부족한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며 땀내 가득 배인 손으로 삶을 놓질 못했다. 허기지는 것은 배가 아니었다.

 

작고 뚱뚱한 남자가 뒤뚱대며 걸어와 철문 사이로 종이 조각 몇 장과 목탄 조각을 넣어주었다. 콧수염을 찡긋거리며 뱁새 같은 눈으로 남자는 자신을 바라보았다. 내미는 것을 낚아 챘다. 때 끼인 손으로 그것을 움켜쥐고서 빼앗기지 않으려 날을 세웠다. 남자는 웃었다.

 

아까워. 아까워.

 

조셉.

 

기척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연구는 잘 되어가는가. 멍해보이는 걸."

 

농 섞인 어조에 시간을 일지에 적으며 대꾸하지 않았다. 로라스는 몸을 일으켰다.

 

"자네가 잠을 제대로 자고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데."

 

돌아보지 않는 뒷모습에 검지가 목 언저리를 배회했다. 뻣뻣히 굳은 뒷목은 저도 느낄 수 있었다.

 

"남이사."

 

"난 지금 내가 자네 시간에 대한 지불 역시 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닌가?"

 

드렉슬러는 화가 치밀어 벌떡 일어섰다. 감히, 누구를. 입 안에서만 맴도는 말을 뱉어낼 수는 없었다. 처음부터 심상찮더니만. 이것으로 리처드가 붙인 사족은 명백한 것이었다. 귀찮은 영감.

 

 

"나는 네 생각보다 훨씬 성격이 나빠. 그건 못들었나?"

 

"불 같다는 이야기야 들었지. 다른 것은 글쎄."

 

치미는 분노를 애써 감추지 않는다. 그 모습이 로라스는 꽤 재밌다고 생각했다.

 

"그래, 내가 결례를 범했군. 천천히 하지."

 

양 손을 들어올려 어깨를 으쓱 거리고 침대로 되돌아가 앉는 로라스의 모습에 드렉슬러 역시 다시금 자리를 찾아 펜을 들었다. 이리저리 휘갈겨지는 수식들은 평소보다 날카롭게 비틀려져 써내려졌다. 별 것이 다 문제를 일으켰다. 종이를 북 찢어 책상 구석 한 쪽으로 던졌다. 분이 풀리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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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두시 정각, 2시 36분

 

일지를 적어넣고 다시 책상 앞에 앉아 배지를 확인하고 혈청 분류작업을 시작했다. 실험실의 도구와 시약으로는 진행상 한계가 있었다. 피곤했다. 잠시라도 눈을 붙일까. 고개를 저었다.

 

깜박깜박 눈을 떴을 땐 마치 데자뷰처럼 전날과 똑같은 자세, 똑같은 모습의 드렉슬러가 보였다. 깜박깜박. 그 뒷모습을 또 한참동안 보았다.

 

한 폭의 잘 짜여진 그림처럼 노란 전등 아래로 드렉슬러는 미동도 거의 없이 가만히 앉아있었다. 제멋대로인 성정과는 다르게 빈틈없이 꽉 채워진 등이다. 과거를 두려워하고 경계하는 등. 구겨진 셔츠 아래로는 분명 잔지방 하나 없이 근육들이 꿈틀거리고 있겠지. 드렉슬러가 고개를 돌렸다.

 

"일어났으면 말을 해. 이것도 적어 넣어야하니까."

 

"알겠네."

 

"뚫어져라 무슨 생각해?"

 

"빨간 드로즈 차림의 자네가 하와이에서 훌라춤을 추는 상상을 했네."

 

"웩."

 

후후. 혀를 내밀어 과장을 떠는 모습에 로라스는 눈을 접어 웃었다.

 

"오늘도 눈가가 발갛군."

 

"알러지가 있어."

 

"동물의?"

 

"익숙하지 않은 털 달린 모든 것에."

 

"괴상하군."

 

"평범하지."

 

눈가를 문지르는 손길에 드렉슬러는 어깨를 으쓱였다.

 

"약은?"

 

"둘 다 부작용이 있어서."

 

"자네라면 더 좋은 약을 만들 수 있잖아?"

 

"하나를 가지려면 하나를 포기해야할 때가 있어."

 

"지금은?"

 

"머리가 멍할 바에야 조금 우는 게 낫지."

 

다시금 손 끝이 눈가를 쓸었다.

 

"다녀오지. 오늘도 열 한시쯤 오겠네."

 

"반 정도만 일찍 와줬으면 하는데."

 

물음으로 돌아선 로라스에게 드렉슬러는 조금 웃어보였다.

 

"소개시켜줄 사람이 있어."

 

 

물류 확보 및 배달, 그 외 잡무를 맡고 있어. 토마스 스티븐슨.

 

로라스는 한 시간 일찍 실험실에 도착했다. 서류가방을 간이 침대 옆에 세워놓고 담요와 반쯤 읽은 책을 꺼내 담요는 무릎 위에 덮고 책은 펼쳐들었다.

 

일찍 왔네. 그렇게 됐네. 식료품을 쌓아놓는 옆 창고에서 두런두런 대화 소리가 들리더니 곧 실험실 문이 열리고 드렉슬러와 하얀 목도리의 남자가 들어섰다. 가벼운 목례와 어색한 인사가 지나고 로라스는 다시금 드렉슬러를 바라보았다.

 

"믿을 수 있나?"

 

"나는 신뢰하고 있어. 없어선 안 될 사람이기도 하고."

 

"내가 사람을 붙여준다고 하면?"

 

"나가는 문은 저쪽이야."

 

로라스는 다시금 토마스를 바라보았다.

 

"자네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마주한 눈에 꿀꺽, 토마스는 마른 침을 넘겼다.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토마스 스티븐슨입니다. 알베르토씨."

 

"알베르토 로라스입니다."

 

"마에스트로라고 부르면 돼. 이쪽에선 다들 그렇게 불러."

 

"코드명인가?"

 

"떨어져있어도 결국 뒷골목이야."

 

하하. 얼버무리듯 웃는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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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정말, 말도 안 되긴 하네.”

 

 로라스의 말처럼 그는 정말 12시가 되자마자 개로 변했다. 신체의 변화가 있거나 빛이 번쩍한다거나 하는 별다른 징후 없이 그는 입고 있던 옷과 함께 고스란히 사라졌다가 그림자처럼 짙은 검은 색의 커다란 개가 되었다. 중간길이의 털과 북슬 거리는 꼬리, 커다란 덩치와 다르게 날렵해 보이는 실루엣.

 

 “로라스?”

 

 개는 짖지도 않고 얌전히 앉아 드렉슬러를 응시했다. 개의 눈은 새까만 털과는 다르게 푸른빛이 쨍하니 도는 맑은 하늘색으로 흐릿한 불빛 아래서조차 그 묘한 빛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눈동자에 고스란히 담긴 제 얼굴을 보며 드렉슬러는 순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엣취!! 에취!! 에취!!!”

 

 동물 알러지. 완전히 잊고 있었다.

 

 연거푸 재채기를 해대며 약을 찾아내 삼켰다. 재채기는 멎었지만 눈물이 줄줄 흘렀다.

 

 “, 진짜 짜증난다.”

 

 훌쩍.

 

 “다 때려 치우고 싶다.”

 

 훌쩍. 훌쩍.

 

 눈물을 흘리며 드렉슬러는 로라스로 추정되는 개에게 손을 뻗었다. 개는 꼬리도 살랑거리지 않고 으르렁거리지도 않았으며 자신을 향해 뻗어오는 손에도 번쩍이는 주사기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드렉슬러는 개를 조심히 눕힌 후 결을 따라 털을 쓰다듬었다. 털은 매끈하고 아주 부드러웠다.

 

 “조금 따끔할 거야.”

 

털을 조금 깎고 알코올 솜으로 소독 후 주사기까지 꽂아 넣었지만 차가운 은빛 바늘이 살을 뚫고 들어갈 때조차 정말 놀라울 정도로 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저 반응이 없을 뿐인데 덤덤한 얼굴이 사람일 때와 겹쳐 보여 순간 열이 받았다.

 

 훌쩍.

 

 “건강진단을 좀 해야겠는데.”

 

 훌쩍.

 

 2 32.

 

 개가 됐을 때처럼 다시 사람으로 돌아온 시간을 기록했다. 개는 때가 되자 그곳이 제자리인 듯 침대 위로 올라가 처음처럼 자리를 잡았다. 로라스 역시 처음과 똑같은 방법으로 원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그는 잠들어 있었다.

 

 “인정하긴 싫지만, 재미있긴 하군.”

 

 드렉슬러는 턱을 쓰다듬곤 로라스의 위로 담요를 덮어주었다. 처리할 일이 굉장히 많았다. 흥분으로 머리가 빠르게 돌고 있었다.

 

 

 

5시경 잠에서 깨어난 로라스는 눈을 끔벅이며 몸을 일으켜 앉은 후 한참 동안이나 드렉슬러의 뒤통수를 응시한 뒤에야 입을 열었다. 좀 잤는가? 아니.

 

 “실제로 늑대인간을 치료한 적이 있다고 들었어. 사실인가?”

 

 “사실이야. 인어도 본 적 있고 설인도 만났지. 내가 드라큘라 얘기도 했던가?”

 

 대수롭지 않게 대꾸를 하며 드렉슬러는 현미경에서 눈을 뗄 줄 몰랐다.

 

 “그것 참 믿기 힘든걸.”

 

 “그러시던가. 가끔씩 어떤 사실은 많은 사람들에게 거부되곤 해. 자기 상식이 아니라거나 뭐 그런. 그래도 그게 사실이란 건 바뀌지 않고 어쨌건 난 천재거든. 그래도 어떤 사실이든 부정하는 건 개인 자유니까. 믿건 말건 그건 네 맘이지.”

 

 “화났나?”

 

 “조금.”

 

 “솔직하군.”

 

 “…”

 

 말꼬리가 늘어졌다. 뒷 말을 위한 침묵이라기에는 꽤 긴 것이 지나가며 눈에 들어온 것들이 잊혀지지 않을 때 즈음에서야 드렉슬러는 접안렌즈에서 눈을 떼고는 한 손으로 양 미간을 꾹꾹 눌렀다.

 

"나야 대체로 그런 편이지. 이리 좀 와봐.”

 

조금 무겁게 느껴지는 몸을 일으키자 오래 된 매트리스에서 삐걱대는 소리가 났다. 로라스는 뒤에서부터 드렉슬러를 끌어안고 그의 어깨에 턱을 괴었다. 젖은 나무와 가죽냄새가 났다.

 

 “뭘 보면 되지?”

 

 덜컹. 들려진 무릎에 벽에 붙은 나무 탁자가 조금 들썩였다. 왼뺨과 어깨, 양 팔뚝에 닿은 온기가 어색해서 드렉슬러는 그로부터 고개를 최대한 떼어내고 로라스 쪽으로 살짝 얼굴을 돌렸다.

 

 “너무 가까운 거 아냐?”

 

 “잠자리가 나빴어. 딱딱하고 추웠거든.”

 

 “추위를 많이 타나 보지?”

 

 “외로움도 많이 타는 편이지.”

 

 “그런 건 별로 알고 싶지 않은데.”

 

그런 가. 로라스는 드렉슬러의 따끈따끈한 뺨에 얼굴을 기대어 웃었다.

 

 “이거나 봐. 동그란 원형질 근처에 보랏빛이 나는 검은 색 알갱이 같은 거 보여?”

 

 “.”

 

 “이 현미경은 일식 이후에 생긴 능력자들의 능력이나 정제된 안개를 볼 수 있도록 내가 직접 개조한 거야. 그리고 지금 보고 계시는 게 바로 둘 중 무언가 되시겠습니다.”

 

 “대단하군.”

 

 보고 있던 것에서 눈을 떼고 나서 로라스는 드렉슬러를 향해 진심으로 감탄했다. 드렉슬러는 조금 멈칫하는가 싶더니 파하-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당연하지! 누구 작품인데.”

 

 “그래서 얼마나 걸릴 것 같나?”

 

 로라스는 얼떨떨할 정도로 순식간에 분위기를 바꾸었다. 냉냉한 교섭꾼의 얼굴과 벌어진 거리에 순간 입이 꾹 다물렸다. 더듬더듬. 드렉슬러는 말을 이었다. 어…음….


 “그게좀 걸릴 것 같은데. 기억에도 문제가 있다고 했으니 종류를 확인하는 데만 3. 네 원래 형질이랑 분획하고 실험하고. 재료가 까다로워서 활동비도 좀 받아야 될 것 같고 해독제 제조에 안정성 테스트까지 하면한 달 정도? 아마도?”

 

 “보름.”

 

 싸한 침묵이 흘렀다.

 

 협상과정에서 처음 기한을 정할 땐 예상치보다 좀 더 넉넉히 불러야 한다는 것을 둘 다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상대 또한 알 것이란 것 역시. 하지만 로라스는 이미 기한을 정해두기라도 한 것 마냥 단호하게 절반씩이나 날짜를 깎아 내렸다.


 ‘? 이것 봐라?’

 

 “이십일.”

 

 드렉슬러는 이마를 문지르며 이 고지식한 남자에게 선심이라도 쓰는 듯이 기한을 다시 정정했다.

 

 “보름.”

 

로라스는 단호했다. 싸늘한 기운이 서서히 바닥부터 차오르고 있었다.

 

 “너무 촉박해.”

 

 “보름. 지원은 아끼지 않도록 하지.”

 

 “다른 게 아니라 위험해서 그래. 나도 이십일 이상은 못 봐줘.”

 

 드렉슬러는 로라스와 괜한 신경전을 벌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의 물러섬에도 상대는 꿈적도 하지 않았다.

 

 숙적인 맹수를 눈 앞에 둔 듯 험악한 분위기로 둘은 곧 서로를 물어뜯을 것처럼 시선을 맞췄다. 금방이라도 앞으로 튀어오를 듯한 긴장으로 제 온몸의 근육이 팽창하는 것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것은 분위기가 이보다 조금 더 험상궂어진다면 언제든지 맞서 싸울 준비가 되어있다는 뜻이었고 어쩌면 예상 밖의 피가 여기저기 튈지도 모른다는 얘기였다. 드렉슬러는 그 장면들을 상상하며 가장 먼저 로라스의 어디를 날려보낼지 순서를 정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돌벽의 피청소는 귀찮다.


 고개를 살짝 들어올리며 로라스는 앉아있는 드렉슬러를 조금 더 내려다 보았다. 짙어진 음영 속에서 파란 눈은 마치 인형의 유리눈알처럼 서늘하고 생기가 없었다. 그는 이런 협상에 능했고 상대에게 수를 내어주는 게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누구보다 더 잘 알았다. 상대를 잘 모를 때는 적정선까지 약간의 열을 가하는 공정이 필요했으며 만족스럽게도 그것은 지금까진 언제나 제 역할을 다했다. 하지만 이번 건은 리스크가 너무 컸다. 그는 정말로 시간에 쫓기고 있었고 목숨을 위협받았다.


 “그거 아는가? 정말 위험한 건 시간이 지체되는 거야. 이쪽은 정말 녹록치 않거든.”

 

눈동자엔 아무것도 담겨있지 않았지만 그 태도만큼은 소름이 끼치게 매서웠다. 고고하고 도도해서 마치 이 세상의 것 같지 않은. 웃기고 있네. 드렉슬러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로라스의 앞에 정면으로 마주섰다.

 

 “이쪽도 마찬가지야. 너 진짜 처음부터 계속 재수없게 구는데,”

 

 드렉슬러는 싸움을 피하지 않았다. 콧잔등이 맞닿을 정도로 오히려 거리를 바짝 붙이며 시비라도 거는 모양새로 손 끝을 이용해 로라스의 가슴팍을 푹푹 찔러댔다.

 

꼬박 밤을 새워 일해도 보름은 말이 안되거든. 약이 잘못 돼서, 그런 일은 애초에 없겠지만- 그래도 그런 가능성을 심어야 한다는 자체가 용납이 안 된단 말이다. 배를 타건 비행기를 타건 내 알 바 아니지만 육로로 이동할 수 있는 이 땅덩이 내에서 나보다 빨리 약을 만들 수 있는 놈은 없어. 아니, 이건 나밖에 못해. 그건 장담하지. 내 방식이 마음에 안 들면 그냥 혼자 뒤져. 이런 일에 나 끼워 넣지 말고.”

 

 거친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섹시하군.”

 

 “어쩌라고 이 게이새끼야.”

 

 이글거리며 쏘아보는 눈이 무색할 만큼 로라스는 여유롭게 웃었다. 드렉슬러는 그 얼굴이 재수없다고 생각했다.

 

 “좋아, 한 달 주지. 대신 잠은 약이 완성될 때까지 이곳에서 자겠어. 이 정도는 괜찮겠지?”

 

 “좋아.”

 

 “좋아. 우리 이제 괜찮은 거지?”

 

 마치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로라스는 손을 내밀었다.

 

 “…그래.”

 

 드렉슬러는 깊게 한숨을 내쉬곤 그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책상 앞에 다시 자리를 잡았다.

 

 “오늘 저녁 11시쯤 오겠네.”

 

 “그래라.”

 

 

로라스는 드렉슬러를 볼 수록 재미있을 작자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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굵은 손, 기다란 손가락, 길쭉한 팔다리, 무두질 공정의 냄새가 배어있는 싸구려 가죽 자켓. 미간의 주름, 고뇌하는 인상, 햇볕을 못 봐 창백하지만 라틴계 특유의 구릿빛 피부. 더러운 성격, 마찬가지로 더러운 입. 별칭 RX(처방전).

 

 로라스는 드렉슬러의 첫인상을 이렇게 묘사한다. 어쩐지 굉장히 끌리는 남자.

 

낮조차 해가 들지 않는 미로와 다름 없는 슬럼가. 누렇게 변한 수건과 이불들이 공중에 얼기설기 엮여 매달려있었다. 퀴퀴한 누린내와 오줌 지린내, 그리고 무언가 썩어 들어가는 냄새들이 걸음을 옮기는 벽돌 사이사이마다 한데 어울려 지독하게 코를 찔렀다.

 

넓은 거리에는 인적이 드물었지만 중심길보다 어두운 골목골목엔 눈이 많았다. 모두들 어째서인지 숨을 죽이고 있었다. 부드럽게 뚜벅거리는 구둣발 소리, 잘 다려진 양복, 중절모와 스카프, 그리고 검은 지팡이.


모두의 시선 한가운데, 이런 무질서와는 어울리지 않는 남자가 왕의 행진처럼 당당히 길을 걷고 있었다.

 

-

 

다리 아래 수로를 따라 걷다 보면 별이 보이는 맨홀뚜껑 아래에서 그를 만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못 구하는 약이 없고 못 만드는 약도 없다. But cash.’

 

 로라스가 들은 드렉슬러의 가게 지침은 이것뿐이었다. 그는 좀 제멋대로라. 그에 대한 정보를 좀더 요구하자 노인은 기름때가 낀 손가락으로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듯 했다. 그렇군. 로라스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며 숨을 내쉬었다. 노인은 콧수염을 찡긋거리며 뭐 그렇지-라는 표정으로 어깨를 마주 으쓱대곤 몇 가지 주의사항을 일렀다. 사람을 싫어하니 웬만해선 혼자 움직일 것. 무기를 가져가지 말 것. 절대, 절대, 그를 아랫사람 취급하지 말 것. 날짜는 전서구로.

 

 “그것뿐인가?”

 

 “심플하지.”

 

 금화 한 닢에 이정도 정보라. 과연 어떤 얼굴일지 궁금하군. 로라스의 날카로운 눈매에 노인은 낄낄대며 웃었다.

 

 “급한 건 내가 아니라 자네니까 말야. 정보 값은 내 마음이지!”

 

 사실이었다. 로라스는 노인에게 깊이 인사를 했다.

 

 “신의 가호가 있길.”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노인은 눈을 끔벅이더니 호탕하게 웃어 젖혔다.

 

 “의뢰를 받으려 들지 않걸랑 리처드가 부탁했다고 해!! 알겠나? 땅딸보 리처드일세!!”

 

 로라스는 감사의 표시로 가볍게 모자를 들어올리곤 다시 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

 

 하던 일을 내려놓고 잠시 기지개를 폈다. 간이로 마련해놓은 침대에 엉덩이를 붙이고 뜨거운 머리를 돌 벽에 기대어 잠시 식히니 숨통이 조금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벽이 무너져 천장과 생긴 틈으로 별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을 멍하니 보다가 드렉슬러는 몸을 일으켰다. 슬슬 손님이 올 시간이었다.

 

 희미한 가스등 아래 한 사람의 실루엣이 보였다. 열 발자국쯤 떨어진 거리에서 드렉슬러는 인기척을 냈다.

 

 “의뢰인?”

 

 “그렇소.”

 

 “자세한 얘기는 안쪽에서 하지. 따라오도록 해.”

 

 둘은 정적 속에서 다시금 안쪽으로 한참을 걸었다.

 

 챙강-! - 탕타다당

 

 돌연 쇠끼리 부딪히는 파열음이 복도를 울렸다. 지팡이인척 하고 있던 검 집이 바닥을 구르고 꼬챙이 같은 쇠 지렛대와 얇은 검이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무기는 금지라고 했을 텐데.”

 

 “먼저 공격한 건 네 녀석이지 않나!

 

 “어쨌든 간에 무기 소지는 금지야, 귀족 나으리. ? 분명 듣긴 한 거지?”

 

 “물론.”

 

서로 양보 없는 팽팽한 기 싸움 도중 먼저 물러선 것은 드렉슬러였다. 어째서? 로라스는 차마 묻지 못했다. 흐린 조명에서조차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 당혹스러웠다.

 

돌아가. 기운 빠졌어.”

 

그럴 순 없네.”

 

 “기본 규칙도 안 지키는 녀석이랑은 일 안 해. 알겠어?”

 

 “잠시만, 얘기 좀 하지.”

 

 붙잡힌 손을 거세게 털어냈다.

 

 “따라오지마!”

 

 드렉슬러는 뛰기 시작했다. 로라스 역시 제 뒤를 쫓아 같이 뛰는 것이 느껴졌지만 이 복잡한 수로를 제대로 다닐 수 있는 사람은 저뿐이었다. 저런 녀석 따위 길을 잃던 말던 무슨 상관이람. 어차피 군데군데 나있는 환기구 때문에 밖으로 빠져나가긴 어렵지 않았다. 고생은 좀 하겠지만 적어도 재수 없게 죽는 일은 없겠지.

 

 “속이 다 시원하네!”

 

 “화가 좀 풀렸는가?”

 

 “와악- 시발!!”

 

 로라스는 무기가 없다는 표시로 양 손을 들어올렸다.

 

 “, 어떻게어떻게…”

 

 “자네 뒤를 따라왔네. 일부러 떼어놓으려는 것 같아 발소리는 좀 죽였지만.”

 

 넋이 나간 표정의 드렉슬러가 입을 열었다.

 

 

 “재수 없어, 진짜.”

 

-

 

돈이라면 얼마든지 지불할 테니-”

 

 “감히 누구한테 마약판매상 취급을 하는 거야?”

 

 그 이후로 로라스는 드렉슬러를 끊임없이 조르고 있었다. 사실 가장 안쪽의 작업실까지 혹이 붙은 이상 모든 상황은 드렉슬러에게 불리했다. 모두들 그가 제멋대로라고 하지만 드렉슬러에겐 드렉슬러 나름대로의 규칙이 있었다. 살인은 하지 않을 것, 마약 제조는 거절, 사용처를 명확히 알 것, 재수 없는 놈 거래는 받지 않을 것 등등-

 

 로라스는 그야말로 골칫거리였다. 안타깝게도 협상을 할 줄 모르는 남자는 불청객에게 협박과 욕설과 또 협박을 쏟아부었으나 완고한 인상의 이방인은 도저히 뜻을 굽힐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그는 농담 삼아 뱉은 허이고, 이러다 무릎이라도 꿇겠다?” 라는 말에 여기에 꿇으면 되나?” 라며 주저 없이 무릎을 굽힐 듯 하다가도 대화 중엔 또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서 매사 고압적인 자세로 일관했다. 지는 뼛속까지 귀족이라 이거야? 뭐 이런 게 다 있어? 드렉슬러는 로라스에게 완전히 기가 질려버렸다.

 

 “자네, 들은 것보다 더 성격이 나쁘군?”

 

 “남이사. 초면 인사가 '개' 같은데 이보다 어떻게 더 나긋하게 굴어 드릴까, 신사양반. 그런 걸 원했으면 창녀촌을 가야지!”

 

 “명의로군.”

 

 “무슨 소리야?”

 

 “밤이면 자꾸 '개'로 변해서 말이야.”

 

 “?”

 

 “그게 내 의뢰일세.”

 

 “미친 그게뭐야…”

 

 “자정일세.”

 

 “자정?”

 

 “자정.”

 

 진짜 그게 뭐야이게 이젠 농담 따먹기까지 하나 싶었지만 시종일관 진지한 얼굴에 그런 기색은 읽히지 않았다그래서 더 당황스러웠다.


 “자정까진 삼십 분도 안 남았어.”

 

 “그럼 조금 기다려 주게.”

 

 “의뢰 안받는다니까.”

 

 서로는 서로에게 벽과 대화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로라스 역시 이젠 한계였다. 소리를 지를 것 같은 기분이 되자 그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그것을 다시 코로 내뱉었다. 이것조차 통하지 않으면. 결심을 내렸다.

 

 “땅딸보 리처드씨 부탁인데도?”

 

 반응이 있었다. 드렉슬러에겐 다행인 일이었다.

 

 “…뭐야? 너 그거 어디서 들었어?”

 

 “글쎄똑똑한 자네가 한 번 생각해보지.”

 

자신의 승리를 직감한 듯 로라스는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화가 나고 배알이 꼬였지만 어찌된 일인진 몰라도 저 이름은 로라스가 퍼거슨의 마음에 들었다는 얘기다. 자신은 그에게 빚이 있다. 드렉슬러는 검지손가락을 갑자기 치켜들더니 무언가를 참아내는 듯 눈을 꾹 감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그대로 뒤를 돌아 로라스에게 등을 보였다.

 

 “그 망할 돌팔이 영감, 뒤지지도 않지 진짜.”

 

 손가락은 까딱까딱 간이 침대를 가리키고 있었다.

 

 “앉아.”

 

-

 

“RX?”

 

 “그냥 드렉슬러라고 불러.”

 

 “그럼 렉스.”

 

 “아 좀. 말 더럽게 안 듣지…. , 몰라몰라몰라. 네 맘대로 해.”

 

 채혈을 하고 미리 작성되어 있는 계약서 양식을 훑었다. 상황을 보고 특수성에 따라 나머지 부가사항을 정한 뒤 마무리로 싸인을 할 것이다.

 

 “늑대인간, 드라큘라는 들어봤어도 개는 또 처음이네. 언제부터 이랬어?”

 

 “정확한 것은 나도 몰라. 개가 되는 게 맞는지도 잘 모르겠군.”

 

 로라스는 저 역시 의문이라는 듯이 팔짱을 껴 턱을 괴었다. 미끄러지듯 전진하던 펜이 돌연 가던 길을 멈췄다.

 

 “무슨 소리야?”

 

 “가정부의 말에 의하면 내가 요새 자정마다 사라진다고 해. 그리고 달빛이 약해지면 3시쯤 침대 위에 누워있다고 하더군. 그리고 그 맘 때쯤 커다란 검은 개가 마당이고 복도고 갑자기 나타난다지. 괴담 같은 느낌이지만 좀 더 대화를 해보니 문젠 이것뿐만이 아니야.”

 

 “그리고?”

 

 “기억을 조금씩 잃어버리고 있어.”

 

 “기억을?”

 

 “사소한 것들. 내가 쓴 편지, 좋아했다던 차(), 머리맡의 낯선 책 같은 것들이네. 시간, 기간, 뭐 하나 겹치는 게 없지. 왜 이것들을 잊어버렸는진 나로썬 전혀 알 수가 없어. 지금은 이런 것들이지만 좀 더 심각해지면 일하는 데도 지장이 가서 말이야. 난 내 머리를 창고처럼 쓰고 있거든.”

 

 “하는 일은?”

 

 로라스는 조금 곤란한 듯이 웃었다. 드렉슬러는 엄한 표정을 지었다.

 

 “나에게 뭘 숨기면 아무것도 해결해 줄 수가 없어.”

 

 “군수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네. 조금불법적인 것들이지.”


 "그 가정부와 대화를 해볼 수 있을까?"


 "글쎄, 그건 좀 어렵겠군."


 

 어째서라는 말이 나오려다 목에 턱 걸리는 기분이 들었다. 어깨를 으쓱거리는 로라스를 보며 드렉슬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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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창에 가둘 새가 필요한 게 아니잖아.

 

 참다못해 내뱉은 말은 고지식한 남자답게 한 없이 옳은 말이었다. 둘은 연인이고, 또 서로가 사랑하는 사람이고. 언제고 함께 하고 싶은 마음으로 손을 뻗으면 닿는 곳에, 아니 손을 뻗지 않아도 불안하지 않은, 남자는 상대가 그런 사람이었으면 했다. 수 많은 이야기가 해피엔딩을 얻기 위해서 필요한 몇 가지 중에서 반드시 갖춰야만 하는 것. 상대가 날 사랑하고 있다는 믿음. 직접 마주하니 생각보다 복잡하고 미묘한 것을 너무 단순하게 여긴 탓일까.

 

 수 많은 일과 서로가 걸어온 길과 향하는 곳, 원하는 것, 숨을 쉬는 공간 마저 겹치는 것은 없었다. 가느다란 인연에 매달려서는 어쩌면 둘 다. 혹은 나 혼자. 한 순간에 남자는 보이지 않는 실에 매달려 춤추는 기분이 되었다.

 

 시간을 줘.

 

 그는 그렇게 말했다. 서로의 고집은 우열을 가리느니 주먹싸움을 하는 것이 나았다. 남자는 인내심이 좋았다. 한결같이 그만을 바라보고 사랑했다. 그렇게 질질 끌어 지금 여기까지 왔다. 남자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허공에 걸리는 것은 하나 없었다. 두 발만 바닥에 붙어있을 뿐 남자는 밀면 미는 대로 비틀거리며 넘어질 것이었다.

 

 서로간에 대해서 생각할 시간, 그가 필요한 거리, 내가 필요한 거리, 겹치지 않고 남과 같은 거리에서 서로를 바라만보는.

 

 그것이 싫었다.

 

 머리 맡 캐리어. 그는 정말로 짐을 쌌다. 여행을 간다고. 세상 구경을 하고 다시 돌아오겠다고. 다른 생활로 자주 함께 눕지 못한 침대는 오랜만에 따뜻하고 또 싸늘해서 남자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끓어오르는 가슴으로 수포가 생겨 진물이 나는데 떠나는 그를 잡을 수 없는 것은 어쩌면 남자는 서로에게 못할 짓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속삭이는 밀어도 애틋한 마음도 짧은 키스도 없이 귓전을 흔드는 그의 신음은 뜨겁고 또 달콤해서 남자는 중간에 멈춰서서 그의 가슴에 이마를 괴었다.

 

 가지마.

 

 툭하고 터지는 눈물을 막을 새 없이 그는 남자를 깊이 끌어안았다.

 

 그 말을, 기다렸어.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가 그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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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렉슬러에게 떠밀려 집 안으로 들어왔을 땐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발을 디디는 순간 그가 머무르는 공간에 갇혀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으니까. 그저 닫히는 문과 함께 어스름에 잠겨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폐부 가득 숨을 들이켰다.

 

순식간에 특유의 잉크와 종이 냄새로 공기가 가득 찼다. 달큰하면서도 질리지 않는 바람 냄새가 기분 좋게 뇌 구석구석을 내달렸다. 정말로 그다. 정말로. 정말로.

 

 “보고 싶었어.”

 

 “난…아니야. 저리 비켜.”

 

 믿기지 않아 얼굴을 다시 보려던 그 순간 거리가 벌어졌다. 다급히 그의 손을 잡아챘다. 어째서 자네는 항상.

 

 “제발 날 밀어내지 말아.”

 

 쥐어낸 손 위에 입을 맞췄다. 이렇게 뜨거운 손으로, 미련이 떨어지는 그 두 눈으로.

 

 “돌아가.”

 

 “어디로?”

 

 “어디로든지.”

 

 “갈 곳이 없어.”

 

 “널 기다리는 사람이 있잖아.”

 

 날 기다려줬으면 하는 이는 있지. 울컥거리는 기분에 입을 다물었다. 저 입가에 미미하게 걸린 웃음이 무엇을 뜻하는지 나는 알 길이 없었다. 그와 함께 행복할 수 있는, 우리를 위한. 그가 사라지고 수많은 가설과 이유와 방법들을 고민했지만 이미 꼬일 대로 꼬인 문제는 실마리조차 잡히지 않았다. 나는 그를 지켜주기는커녕 그의 옆에 있을 수 있는 방법조차 몰랐다. 그녀의 말처럼 나는 서툴렀다. 나는, 무력했다.

 

 “그녀와는 헤어진 지 이미 오래야…. 그녀가 통보했고 나는 받아들였네. 우리의 헤어짐이 문제될 것은 아무것도 없어.”

 

 “그곳이 네게 어울려.”

 

 “편지, 하나도 읽지 않았지?”

 

 “당연하지.”

 

 대화를 이어나가는 것은 고통이었다. 제대로 쉬지 못한 머리는 몽롱했고 담담히 대답하는 드렉슬러에게선 더 이상의 빈틈을 찾을 수 없었다. 궁지에 몰린 것은 나뿐이라는 생각이, 이것이 혼자만의 싸움이라는 생각이 나를 외롭게 했다. 그를 움켜쥔 채로 한 손만을 들어 얼굴을 쓸어 내렸다.

 

 “나는 그녀 때문에 자넬 만난 게 아니야. 그런 의미로 생각하고 있을 줄은 난 전혀 몰랐네. 우리가 헤어진 것 역시 자네 탓이 아니라는 얘기도 해야겠어. 자네는 항상 자책을 하곤 해. 좋지 않은 버릇이고, 아,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자네 앞에만 서면 바보 같이 다 잊어버리고 말아. 두서가 없어 미안하네….”

 

 말이 길어질수록 이것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편지에도 몇 번씩이나 적었던. 그는 읽으려 하지 않았던 것들. 그에게 해야 할 말, 그가 들어야

할 말은 따로 있었다. 그런 기분이 들었다. 드렉슬러가 입술을 가볍게 물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 버릇을 나는 안다. 그는 영민하고 또 예민했다. 내가 머뭇거리는 것을 그가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이래서는 달아난다. 또 달아나고 만다.

 

 “나야말로 그간 우유부단했어. 미안하다. 확실히 거절을 했어야 했는데. 네가 날 정말 사랑한다 하더라도 난 아니야. 이마저도 그간의 정을 생각해서 참고 있는 거니까 그만둬줬으면 하는 게 내 솔직한 심정이고. 우린 여기까지다, 로라스.”

 

 “자네는…정말 예전과 변한 게 없군. 항상 밀어내기만 해.”

 

 나는 쫓기고 있었다.

 

 “그러냐.”

 

 “그런데도, 나는. 자네를 놓을 수가 없어.”

 

 밀어닥치는 감정에 후두둑. 눈물이 쏟아졌다. 그가 고개를 돌렸다.

 

 “미치겠군.”

 

 저 굳게 닫아버린 눈을 더 이상은 견딜 수가 없었다. 고개를 돌리는 드렉슬러를 쫓아 그의 얼굴을 살폈다. 날 봐줘. 드렉슬러. 눈을 뜨고 날 좀 봐주게.

 

 “난 항상 그랬네. 말없이 자네가 사라진 뒤에 여기 오기까지 너무 오래 걸렸어. 이제야 품 안에 넣었다고 생각했는데….”

 

 “시끄러워, 조용히 해. 머리가 아프단 말이야.”

 

 신경질적인 대답과 찌푸린 얼굴. 그런데 나는 어째서 항상 그로부터 미련을 읽게 되는지. 입을 틀어막은 손을 치우고 그 자리에 다시금 입술을

댔다. 예전처럼. 항상 그렇게. 부드럽게 열리는 입술과 감겨 드는 혀를 엮고 그를 깊이 끌어당겼다.

 

 “왜 자꾸 날 헷갈리게 하는 거지, 드렉슬러. 왜 그저 놓는 것조차 하지 못하게 만드는 거냔 말일세.”

 

 그 다정함에 서러워져 미처 입술을 다 떼지 못한 채 웅얼거렸다. 잠깐의 혼란, 그리고 체념. 체념이라니. 나는 필사적으로 그를 끌어안았다. 잠시의 시선을 조용히 닫고 그는 다시금 입을 맞췄다. 숨이 멎었다.

 

 아아. 드렉슬러.

 

 그는 한껏 농익은 손길로 나를 이끌고 있었다. 부드러운 움직임에 애정이 어려 나는 또 사막에서 길을 잃은 여행자가 되었다. 어딘가에 있을 오아시스. 갈증이 길어질수록 신기루가 뚜렷해지듯이 잿빛을 잔뜩 머금은 저 하늘에서도 언젠간 비가 오리라- 갈증. 온 몸이 사시나무마냥 떨려

단추 하나 제대로 풀지 못하는 내 손을 그는 다시 단단히 감아 쥐었다.

 

 그의 체취가 가득한 보드란 침대보 위에 그를 누이고 다시 마주 쥔 손가락 마디마디 키스를 했다. 가늘게 떨리는 손, 붉게 익은 입술, 일렁이는 잿빛 하늘. 견디고 견디면 결국 비가, 비가 오리라. 등 뒤로 날이 밝고 있었다.

 

 “이렇게 손에 쥘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은 것이 별이라고 자네가 그랬지. 그 때부터 나에게 있어 별은 자네 하나뿐일세. 사랑하네, 사랑하고 있어, 드렉슬러.”

 

 “그렇게 보지마.”

 

 “사랑스런 나의 novio.”

 

 도망치는 그를 부여잡고.

 

 “듣고 싶지 않아.”

 

 “빛나는 나의 별.”

 

 나는.

 

 “로라스, 제발.”

 

 나는, 다시금.

 

 “나야말로…! 나야말로 부탁일세… 제발…. 제발 나를 들어줘, 드렉슬러…”

 

 쥐어짜이는 심장의 고통에 몸을 웅크려 그의 가슴에 이마를 괴었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땀에 달라붙고 힘이 잔뜩 들어간 어깨를 벌레가 기어 다니는 듯한 느낌이 선연했다. 이후에 모든 것이 끝날 것임을 알리는 듯한 침묵 속에서 나는 재기할 수 있는 열쇠를 찾아 헤맸다. 혼란 속에서 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단지 손안에 쥔 절박함만으로 입을 열었다. 사실 답 같은 건 없다는 사실을, 나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자네가 없으면 나 역시 빛을 잃고 말아, 렉시. 차라리 그것이 나아. 나는…그대 없인 더는 살 이유가 없어. 정말로, 나를 사랑하지 않아? 내가 본 그대의 찰나는 정말 내가 너무 바란 나머지 만들어낸 환상인가? 응?”

 

 “나는…난…”

 

 그는 손끝으로 내 얼굴을 더듬어 들어올렸다. 그렇게 괴로운 얼굴로 자네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당장이라도 시트를 쥔 손을 펴서 자네를 달래주고 싶은데. 눈을 감았다.

 

 “대체 너, 왜 이렇게 까지 하는 거야.”

 

 그는 울먹였다. 자신의 감정과 밀어붙여지는 현실. 모든 것에 유감을 표하며 나는 조금 웃었다.

 

 “내가 자네를 사랑하니까. 그리고…”

 

 달싹이는 입술이 잠시간 머뭇거렸다. 비록 이것이 내 착각일지라도, 그래서 모든 것을 잃게 될지라도.

 

 “자네가 날 사랑하니까.”

 

 그렇게 얼굴 윤곽을 따라 한참을 쓰다듬던 손이 무엇인가 결심한 듯 단단히 얼굴을 감싸 쥐었다.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아무래도 널 사랑하는 것 같아.”

 

 짙은 키스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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